지난 2010년 연말 갑자기 중국 전문가 타령들이 각 언론을 장식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번의 경우는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폭격 사건을 겪으면서, 중국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있는데다가 수교 20여 년이 다가오는데도 아직 '중국을 잘 모른다'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러한 호들갑 속에 역대로 주중 한국 대사 중에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대사가 한 명에 불과했다던가, 정부 내에도 중국 전문가가 없다고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근원적으로 중국이 오만해졌다는 등의 다양한 분석이 줄을 이었다. 그 결과 정부는 부랴부랴 외교안보연구원에 중국연구센터를 개설하였고, 외교통상부에서는 '중국 관련 일일 언론 보도' 내용을 전문가들에게 이메일 서비스를 시작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우리는 정말 중국 전문가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있기는 있지만 중국을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친중 인사'로 역차별(?)을 받는 경우는 아닐까? 그런데 왜 미국은 정당이 다른데도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존 헌츠먼을 대사에 임명했었고, 후임으로 중국계 미국인 게리 로크를 임명하였을까?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인가? 그렇지 않으면 혹시 우리 사회의 리더 그룹 대부분이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라 중국에 대한 저평가가 일상화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외교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이고 내정의 연장선이다. 따라서 어떠한 외교 정책인가는 결국 지도자의 대외 인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지도자가 "우리가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이 중국에게도 좋은 일이다"라고 인식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 중국은 여전히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으며 중국의 역할은 북한 문제나 잘 해결해 주길 기대하고 있으니 한중 관계가 좋을 리가 없다.
국제 사회에서 중국은 이미 명실상부한 강대국이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존 나이스비트는 중국이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서 세계를 바꾸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또한 '팍스 시니카(Pax Sinica :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 유지)'를 구현할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것이 중국인들의 대체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중국은 2029년까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만5000달러, 국가 전체의 GDP는 25조 달러를 기록해, 중국의 GDP가 세계의 2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표는 미국이 세계 패권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때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당시 미국의 GDP는 세계의 18.9%를 기록했었다.
|
▲ <그레이트 차이나>(한인희·강준영·양평섭·박한진·전병곤·강진석·임대근·장리리 지음, 대선 펴냄). ⓒ대선 |
<그레이트 차이나? : 한·중·북 애증의 삼국지, 그리고 끝없는 스트레스>(대선 펴냄)는 한국과 중국의 중국 전문가들이 <프레시안>의 '중국 탐구'에 연재 중인 글들을 모아 <중국 속의 中國> 시리즈로 두 번째로 출판한 것이다. 크게 두 분야로 나누었다. 하나는 '한·중·북 애증의 삼국지'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북한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고, 또 하나는 '파워 중국의 끝없는 스트레스'로 중화의 부흥을 꿈꾸는 중국이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그레이트 차이나'로 가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극복해야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작업은 이른바 '집단 지성'으로서 매우 의미가 있다. 나는 중국을 연구하는 그룹이 더욱 다양하게 이러한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제너럴스트'의 시대는 가고 '스페셜리스트'의 시대가 도래했다. 한 전문가가 중국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연구를 국가가 국익의 차원에서 정보를 통합하고 이를 활용하는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을 더 깊이 연구해야한다. 그리고 분야도 다양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은 '그레이트 차이나'가 될 것인가? 필자들은 '그레이트 차이나'를 흥미 있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영문으로 'GREAT'를 다시 해석하고 있다.
"'중화의 부흥'을 통해 '위대한 중국(Great China)'을 이루려는 꿈은 국제 무대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 주요 2개국(G2)으로 미국과 양대 강국의 시대를 열었고, 소프트 파워의 첨병인 공자(孔子)를 천안문 광장으로 끌어내는 '문예 부흥'을, 유인우주선 썬저우(神舟) 7호를 성공적으로 발사, 우주 탐사를 강화하면서 첨단 국가 중국의 이미지 부각에 주력하고 있다.
핵무기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전력으로 평가받는 스텔스기 개발과 항공모함 건조를 비롯, 첨단 무기 개발에 뛰어들어, 미국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갖추겠다는 야망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세계의 공장 중국은 세계 수출 1위국으로 부상하였으며(Trade), 이제는 세계의 시장으로 강력한 경제적 영향력을 세계적으로 투사하고 있다" (머리말)
그러나 이러한 '그레이트 차이나'를 달성하기 위해서 중국 앞에 놓인 상황은 그렇게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한반도 문제다. 이는 단순하게 남북한 문제이기보다는 중국과 미국 등 다양한 요인이 모두 엉켜있는 실타래이기 때문이다.
"북중 관계가 과연 한중 관계보다 중요한가의 문제를 살펴보자. 북중 관계에 관해 중국 지도자들은 분명히 정상적인 국가 관계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중 관계의 특수성도 항상 강조되고 있다. 중국도 대북 정책과 관련해서는 전략적으로 실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대북 영향력의 한계를 강조하면서 북한의 국내 안정을 위해 많은 것을 용인하는 한반도 정책을 실시해 왔다. 그 결과 중국은 '핵 보유국을 주장하는 북한'과 '안정된 북한' 사이에서 고민하는 정책적 모호성이 노정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여전히 '관리 가능한 북한'이 필요하므로 북한의 요구를 계속 수용하고 있다. 이 점을 잘 아는 북한은 결정적인 위기 때마다 중국에게 손을 벌리고 있다. 때문에 북중 관계는 한마디로 애증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35쪽)
여기에서 우리는 왜 중국이 우리에게 운명처럼 중요한지를 파악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렇다.
"한반도 문제의 난국은 모두 북한과 관련되어 있다. 비록 애증의 관계가 교차하고 있지만 불확실한 북한의 미래에 배팅하기보다는 비록 힘들지만 현재의 북한이 중국에게는 전략적으로 훨씬 매력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이러이러한 입장이 중국에 어떻게 유리하니 우리의 뜻을 받아들여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또는 통일된 한반도가 중국에게도 이렇게 유리하니 이랬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요구나 정책은 중국 측에 전혀 전략적 고려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이제 중국을 말로 설득하기 보다는 내부적으로 중국과 같이 북한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정책이나 정책을 펼쳐가는 것이 더욱 실질적일 수도 있다" (36~37쪽)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국과 미국은 어떠한 의미인가?
"우리는 한중 협력이 긴밀해질수록 한미 협력이 손상되거나 견고한 한미 관계 하에서 한중 협력은 커다란 효용성이 없다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물론 한미 관계는 우리의 국익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동맹 관계이지만 중국의 위상과 중미 협력, 경쟁 관계 등 동북아 국제 관계의 변화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한미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도 한중 협력을 확대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한중 관계, 한미 관계, 중미 관계가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촉진적인 관계로 설정되고 작동되어야 할 것이며, 최소한 한반도 및 북한 문제에 관한 한 한·미·중 3자 협의체를 구성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49쪽)
이제야 분명해졌다. 그러나 중국도 반드시 깊이 인식해야하는 것은 '그레이트 차이나'든지, '중화의 부흥'이든지 간에 절대로 주변국을 희생하거나 패권적 행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역사에서는 최고 정점에 이르면 다시 하강한다는 것이 진리다. 그럴 만한 요인들은 무수히 많다. 중국의 미래 발전에 발목을 붙잡는 것은 외부적인 강대국 간이나 주변국과의 관계 이외에도 중국 내부 문제라는 점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중국 사회를 이끌어야할 지식인들은 '문화 권력'으로 관방과 결탁(238쪽)하였고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또 우리의 장자연 사건과 같은 중국의 연예계의 숨겨진 규칙 '첸꿰이저(潛規則)'의 폐해 등은 중국 사회 각 분야에 만연하였으며(260쪽) 결국 '빨간 불이라도 손잡고 건너면 무섭지 않다'라는 중국식 속담이 오늘의 중국의 문제점을 가장 적절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문화계가 '자존심의 현대화'(318쪽)를 위해 노력한다는 글에서는 희망을 갖기도 한다.
이 책은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전문가들이 소개하고 평가하고 있다. 과거 중국을 하나의 연구 대상으로 평가해오던 많은 서적들과는 달리, 다양한 시각에서 이슈별로 평가하고 분석했다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날로 제고되고 있는 중국의 국제적 위상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의적 문제들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풀어줌으로써 일반인들에 대한 접근성도 고려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중국의 부상을 기존 사실이라 전제하며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존재하고 있던 선입관을 배제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인식상의 영향력, 즉 중국이 '위협'적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출판물들과 구별되기도 하다. 또 중국 문제를 한반도 문제와 연관 지었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한반도 문제와 한중 관계를 둘러싼 현안을 파악하고, 향후 중국의 행보를 가늠해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적잖은 시사점을 남길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