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1000권 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비밀

미안합니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두 가지 사안에 대해 사과부터 해야 할 듯하다. 처음 '프레시안 books'로부터 서평 의뢰를 받았을 때 한편으론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내가 서평을 해야 할 책이 만화책이라는 점 때문에 반가웠고, 하필이면 논리학에 관한 책이라고 소개받았기에 걱정이 되었다.

내가 걱정을 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대학 시절 전공 기초 과목으로 수강한 <논리학 개론>의 학점은, 아마 C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주 기초적인 논리학 과목에서조차 성적이 좋지 않았던 내가 논리학과 수학을 소재로 한 책에 서평을 쓴다니! 그래서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난 논리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또 때론 '논리적'이란 말이 싫기도 했다. 결혼 후 부부싸움을 할 때 논리적으로 대화해 본 사람들은 아마 잘 알 것이다. 서로를 마음으로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정을 제거하고 대신 '냉철하게 논리적으로 따지는' 부부싸움은, 감정의 기관차가 머리끝까지 '칙칙폭폭' 하며 올라가 끝내 거친 말로 바뀌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또, 요즘의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자주 보듯,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논리적인 척하는 모습들을 보면 논리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일 수 있는지 여실히 확인하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기호로 가득 찬 논리학 책에는 호감이 가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엄청난 사물들, 사람들! 생긴 모양이 제각각인 사과들인데도 모든 사과는 단지 하나라는 기호 '1'로 표시된다. 크건 작건 발그스레하건 푸르스름하건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1'이라는 기호는 사과, 귤, 오렌지는 물론 엄청나게 높은 마천루 건물들에조차 동일하게 '하나'라고 동일화시킨다. 이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수학의 보편성이 내겐 개개의 것들이 가진 개성을 말살하는 폭력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 독자들에게 자랑할 만한 일도 있다. 대학 2학년이던 어느 날 수학을 전공하던 고교 시절 친구가, 자신의 대학 생활 목표 가운데 하나가 졸업 전까지 400권의 책을 읽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도 뒤질세라 비슷한 목표를 잡았고, 정확하게 세어볼 수는 없겠으나 아마도 1000여 권도 훨씬 넘게 책을 읽은 듯하다. 내게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읽은 책 권수 늘리기 비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만화책이다. 장편만화의 경우 10권을 넘는 경우가 흔하니, 1000여 권이란 숫자는 어쩌면 한참을 모자라는 숫자일 수도 있다. 난 지금도 만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서평 의뢰가 반가웠던 것이다.

러셀, 수학으로 인해 죽음에서 벗어나다!


▲ <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크리스토스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알레코스 파파다토스·애니 디 도나 그림, 전대호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랜덤하우스
그런데 우습지 않은가! 그런 내가 러셀, 칸토어, 화이트헤드와 같은 논리학자는 물론 폰 노이만, 괴델, 튜링과 같은 천재적인 논리학자와 수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의 서평을 쓰다니!

하지만 책장을 넘겨가면서 나는 이런 모든 우려와 걱정들이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수학자 독시디아스, 컴퓨터공학자 파파디미트리우 그리고 만화가 파파다토스와 도나가 함께 펴내고 전대호가 번역한 <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랜덤하우스 펴냄)는 기막히게 재밌고 감동적인 만화책이다.

<로지코믹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한 3일 후인 1939년 9월 4일, 미국의 어느 대학교에서 러셀이 '인간사에서 논리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공교롭게 그 날 대학의 강연장 앞에서는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반대하던 고립주의자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러셀에게 강연을 취소하고 자신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으나, 러셀은 오히려 자신의 강연을 듣고 이 문제에 대해 합리적으로 따져볼 것을 요구한다.

러셀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야 했던 펨브로크로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이 '논리'를 열광적으로 좋아하게 된 과정에서부터 자신의 인생 역정을 거침없이 소개한다. 영국 수상까지 지낸 자상한 할아버지 그리고 자잘한 집안일부터 모든 것에 엄격하던 할머니와 더불어 규칙에 따른 삶을 살게 된다. 펨브로크로지에 도착한 첫 날, 러셀은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신음소리에 놀란다. 나중에 그 괴상한 소리가 미친 큰아버지의 신음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실제로 "나는 그 순간 미쳐버렸다"고 러셀은 고백한다. 러셀의 집안에는 정신병자가 여럿 있는 내력의 가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러셀은 그런 끔찍한 삶의 체험 속에서 이성이라는 희망, "철저히 논리적인 세계를 수학에서 찾으면서" 비로소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암호로 쓴 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거의 모든 인간은 비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더욱 논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 물론 나도 인간이고, 따라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비논리적인 생각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내 안에 있는 그런 경향들을 식별할 수 있고, 따라서 그것들에 더 잘 저항할 수 있다." (73쪽)

할아버지와 부모의 죽음, 큰아버지의 광기 등 어린 시절 처절한 정신적 고통을 겪은 러셀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버린 확실한 지식 즉 수학을 품에 안고서, 수학자가 되기 위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진학한다.

논리와 광기, 우리 안의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수학을 통해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 했던 러셀의 욕망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을 뿐더러 따분한 계산에만 열중하는 수학에 염증을 느낀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나 당시의 수학에 만족하지 못한 러셀은 철학에 열중하고, 수학자가 아닌 논리학자라는 자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첫 번째 부인 앨리스와 결혼한 후 러셀은, 유럽으로 여행하면서 프레게, 칸토어와 같은 당시 최고의 학자들은 만나고, 또 파리의 국제수학자대회에 참관하게 된다. 그 후 러셀은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의 원리> 집필에 몰두한다. 하지만 여러 번에 걸친 개작에 개작을 거듭하면서 <수학의 원리>는 미완인 채로 완성되어 출판되지만, 그 비용은 자신들이 내야 했다.

한번 상상해 보시라. 수년에 걸쳐 오로지 수와 식, 기호로 가득한 알 수 없는 암호로 된 책을 쓰는 데 온 정신이 빠진 사람들. 가장 명확한 토대를 추구하지만, 감정도 대상도 없는 끔찍한 기호들의 세계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을까? 러셀은 삶의 과정에서 만난 수학자들, 논리학자들의 삶은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다. 프레게는 미쳤고, 천재 수학자 괴델은 우울증에 걸렸고, 모리츠 슐릭은 나치 광신자의 총격에 숨졌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자살하고 만다.

학문의 가장 완벽한 기초, 토대를 찾았던 러셀의 삶의 과정이 강연에서 이야기되지만, 결국 괴델을 통해 수학의 확실성, 논리학의 토대는 여전히 불확실성 속에 남는다. 그리고 그네들 대개의 인생에는 광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렇다면 이런 미완의 기획, 실패한 기획이 왜 소설 같은 만화로 그려져야 하는가? 저자들은 책 속에 등장하여 산책을 하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파파디미트리우 : 나는 '광기에서 비롯한 논리학'이라는 주제가 간간히 튀어나올 때마다 영 불편해. 물론 그 주제도 함께 다루면 흥미롭긴 하지만 말이야.
독시디아스 : 러셀이 '1+1=2'를 증명하는데 왜 362쪽(책의 쪽 수)이 들었는지 에릭에게 한 말 기억나나?
파파디미트리우 : "정말 확실하게 증명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지.
독시디아스 : 아마도 러셀만큼 심한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러서라도 확실하게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할 걸세.
파파디미트리우 : '광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건 아닐까? 따지고 보면 세상에 정신병자는 쌔고 쌨잖아….
독시디아스 : 아리스토텔레스 왈, 비극의 효과는 "비극 안에서 완성된다"라고 했어. 교훈을 얘기하려면 비극이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204~7쪽)

말하자면 <로지코믹스>는 철학자이자 수학자, 논리학자 러셀의 생애를 다루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가장 확실한 토대의 논리를 추구한 수학과 논리학이 실은 학자들의 광기와 무관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어쩌면 논리학 속에 광기가 숨어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저자들은 이 모두가 비극이라고 말한다. '1+1=2'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362쪽이나 되는 엄청난 글을 써야했다면, 나 또한 정상적인 상태의 정신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그래서요? 우리가 뭘 배웠습니까?"

강연을 마친 러셀에게 청중들은 "그래서요? 교수님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가 뭘 배웠습니까?" 라고 묻는다. 그러자 러셀은 이와 같이 대답한다.

"우리가 인생을 논한다면, 논리학의 한계는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또 논리학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 겉보기에는 완벽한 이론으로 굳어진다면, 그런 논리학은 극악한 사기일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한 이 말은 옳습니다.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을 전부 다 알아도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이 말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 부탁합니다. 유럽을 덮친 문제들에 맞서 무기를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 전에 두 번, 최소한 두 번 생각하십시오! 이 대목에서 또 다른 오래 된 삼총사를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책임, 정의, 그리고 선악을 느끼는 감각 말입니다." (299~301쪽)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이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가장 확실하다는 이성의 언어, 수학! 분명 그 이성에는 모든 개별적인 것들을 '1'로 동일화하는 거대한 폭력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거기에는 이명박도 노숙자도 모두 똑같이 '1'이라는 평등의 운동도 있었다는 것을 나는 새삼 알게 되었다. 사실 이성의 계몽으로 인해 우리는 신분과 계급을 넘어서 동등한 '개인'이라는 것을 창조해내지 않았는가!

<로지코믹스>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수학과 논리학 분야에서 확실성을 추구했던 학자들의 이야기가, 소설처럼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미덕을 지닌 책이다. 비록 실패한 기획이지만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지은 <수학의 원리>는 컴퓨터 혁명을 가능하게 했고, 우리는 이미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거의 광기에 가까운 노력으로 이성의 언어를 창조하고자 했던 논리학자, 수학자들이 없었다면 이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로지코믹스>는 역시 서양 철학의 고향 아테네 출신의 학자들답게, 그리고 수학과 논리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러셀과 그 주변의 등장인물들의 비극적 삶을 통해 진솔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그려 보여주고 있다. 책을 만드는 과정의 토론들이, 책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책의 피날레는 책과 나란히 전개되어 온 자신들의 친구의 공연,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의 이야기로 끝난다.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의 재판을 여신 아테네는 아테네인들에게 맡긴다. 아테네 시민들이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자, 복수의 여신들은 분노한다. 분노한 복수의 여신들에게 여신 아테네는 이렇게 말한다.

"복수의 여신들이여, 설득을 존중하고 성스러운 이성의 힘으로 구현한 정의를 존중하시오! 나의 도시에 머무르시오. 좋은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좋은 것을 받으시오. 만일 당신들의 분노를 느껴본 적 없는 남자나 여자라면, 그는 삶의 진면모를 전혀 모르는 자요! 그러니 여기 머물러 당신들의 지혜로 나의 지혜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시오. 나와 함께 나의 도시를 다스립시다." (314쪽)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나는 다소 숙연해졌다. 그간 서양 철학이 사랑해 온 이성을 난 왜 그동안 그렇게 불신해왔을까? 이성의 열매가 익기도 전에 우리는 이성의 가지를 도려내 온 것은 아닐까? 우리가 우리 안의 지킬박사를 버린다면 끔찍한 하이드 씨만 남는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독자 여러분들도 내가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동과 재미를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해하기 쉽게 번역한 역자에게 감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족을 단다면, 그림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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