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 속의 섹스
캐서린 H.S. 문 지음, 이정주 옮김 / 삼인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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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앎의 고통을 앓았다. 여성혐오, 군국주의, 제국주의, 인종차별, 식민주의가 뒤섞이면 결국 이 모든 얽히고 설킨 피라미드의 최하층에는... 여성이 있다. 이 피해자 여성 집단 앞에 가해자의 인종이나 국적이나 신분이 다 무슨 소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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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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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죽음과 공존하는 삶의 태도를 알려주는 책. 그런데 길어도 너무........길다..... 2/3부터는 그저 비올레뜨 딸의 죽음에 관한 숨겨진 비밀을 알고 끝내고 싶어서 의리로 꾸역 꾸역 읽었다. 한국어판 책제목과 표지가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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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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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거진 2주에 걸친 시간동안 한국에서 퇴사를 하고 놀러온 내가 사랑하는 친구 S와 함께했다.

내 부탁으로 친구가 프랑스에 종이책을 몇권 가지고 와서 선물로 주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책과, 세안용 머리띠 - 본인 것과 커플임 ㅋㅋㅋㅋ- 달고나 만들기 세트, 홋카이도 팬케이크가루, 후시딘 등등... 멀리서 날아온 고마운 마음)



이 책은 이 친구 S가 자신의 올해의 책 중 하나로 최근에 뽑았다고 할 정도로 극찬을 한 책이라 한권 갖다 달라고 부탁을 했더랬다.

아무리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름은 들어봤을 유명한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했던 (그리고 그곳을 퇴사하고 유럽 여행을 온 ^^) S의 2023년 pick 이라 묻고 따지지도 않고 읽기 시작했다.


저자의 아버지는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외부 세계와 단절된채 본인만의 교리 해석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 자신만의 '동산'에 갖혀 살아가기를 강요한다. 그런 가정 속의 8남매(7남매인가 9남매인가?)의 막내로 태어난 저자는 출생과 동시에 사회와 완전 격리된 채 아버지의 세상에서 가족들과 살아간다. 이 책은 그렇게 유년시절을 보낸 작가가 '교육'이라는 것을 통해 여태까지 자신이 속했던 세상을 깨고 나와 시행착오를 거치며 비로소 사회를 만나게 되는 자서전이다.


이 책에서 대척되는 세상은 아버지가 짜맞춘 세상, 그러니까 저자가 '교육'을 받기 전 까지 속했던, 그녀가 아는 전부인 세상과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이다.


그 아버지의 세상이라 하면, 책을 읽으면 충격적이어서 입을 다물 수 없는 내용들의 향연인데, 이를테면 아래와 같다.


- 1999년 지구의 종말을 믿는다.

- 종말이 찾아 오지 않은 1999년 이후의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도 종말이 다가올 거란 확신 아래, 지구 종말 이후의 생존을 위한 준비가 이들의 인생의 목표의 거의 전부이다. 

- 국가나 정부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불신. 그에 의하면 국가와 정부는 그들의 가족을 암살하려는 사회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단체이고, 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반하고 사회공산주의 이념을 국민들에게 물들이기위해 온갖 정책들을 만들고 인간 실험을 자행한다. 이를테면 공교육 시스템이나 의료시스템 모두 국가가 사람들을 조종하기 위한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파도 병원에 가면 안되고, 약을 먹으면 우리의 신체는 사회 공산주의들에게 조종을 당하게 될 것이며, 학교는 

- 안전, 예방 등에 대한 1차원적 기본 욕구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개념이 전무. 예를 들면 자동차를 탈 떄 안전벨트를 메면 안된다. 이는 정부의 반동분자를 길들이기 위한 거짓말 수작일 뿐이다.

- 어린 여자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모두 잠재적 창녀이므로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

- 조혼 장려, 가부장제, 여성혐오의 콤보 등등....


............................ 사이비 종교의 모든 예시를 충족하는 그런 어떤... 예......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세계 속에 살아가는 가족들은 특히 생존과 직결된 안전에 위협을 받고 저자는 부모로부터, 가정으로부터 '보호받는다'라는 느낌을 가져본 적 없이 유년시절을 보낸다. 인간의 근원적이자 모든 동물의 본능이기도 한 안전에 대한 위협 문제는 나중에 저자가 사춘기를 지나며 여성혐오를 만나며 가족 구성원들로부터의 직,간접적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폭력을 겪는다.

(그리고 물론 이것이 폭력이라는 사실도 후에 '교육'을 통해 깨닫게 된다.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작가는 책을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모르몬주의에 관한 것도, 어떤 다른 종교적 신념에 관한 것도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책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제목에서 부터 말하고 있다) 그것은 '교육'이다.

그런데 작가에게 교육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책을 덮는 순간까지 찾지 못했다. 아니, 책을 읽으면 읽으면서 더 헷갈렸다.


초반에는 야만의 시대를 지나 문명의 세계로 가는 여정을 써낸 책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읽을 수록 이렇게 단순한 서사 구조만은 아닌 것 같은 것이다.


그녀에게 교육이란 문명화로 가는 길인가? 그녀가 학교에서 세상의 상식 속에서 습득한 지식이 교육인가? 

그렇다면 저자에게 학교에 가기 이전의 생활, 그러니까 태어나서 16살 이전까지의 시간들은 교육에 대척하는 삶이었나?

아니면 학교에 가기 이전의 생활도 그 나름대로의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모르몬교 종교 위에 아버지의 신념으로 지은 세상은 야만의 세상인가? 약병원에 가지 않고 오로지 약초와 에너지로 치료를 하고 기도에 신체와 정신의 안전을 모두 맡기는 세상. 전부인 줄 알았던 본인이 속한 이 세상이 학교에 가면서부터 통째로 붕괴되기 시작한다면, 그렇다면 그 교육의 반대편엔 분명히 아버지의 세상이 있는 것 아닐까? 그 세상은 아버지가 자신의 신념으로 지은 종교적 세상이 아닌가? 


그렇다면, 바로 그 그릇된 종교적 교리가 가족구성원을 집어 삼키는 폭력적인 괴물 그 자체의 세상의 원인이었다고 왜 작가는 말하지 않는 것일까? 모순적으로 이 글은 그 누구도 고발하지 않는 고발성 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덮자마자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대단하다'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겁하다' 였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그 끔찍한 모든 일들에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을 통과하고 현재에 이렇게 존재하는 작가, 그리고 이 모든걸 이렇게나 솔직하게 썼다는 작가의 용기에 대해 경외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비겁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결국 모든 걸 쓰면서도 아무 것도 고발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작가는 이 서두에 '이 이야기는 모르몬주의에 관한 것도, 어떤 다른 종교적 신념에 관한 것도 아니다'라고 못을 박고 이 모든 이야기를 고백한 것일까? 


종교적 교리로 인한 (그것이 특정 집단에 의한 사이비든 아니든) 폭력에, 특히 여성에 더 가혹하게 자행되는 폭력에 피해 여성이 자신이 당한 피해에 대해 쓰면서 동시에 이 모든 것은 종교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 모든 이야기에 이젠 조금 지친다.


물론 이 책 전체는 그녀가 겪은 일을 적은 것이기 때문에 인과관계가 언제나 선명한 것은 아니다. 어떤 피해자는 다른 사건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때론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종교적, 여성혐오적 맥락 속에서 때론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교차성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모순점들은 익히 알고 있다. 나는 이 모든 비극의 중심에 자리한 '절대적'가해자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에 있는 그 악의 중심, 이 모든 악몽은 그 '절대적 가해자' 때문이라고, 언제쯤 우리는 돌려 말하는 것을 멈출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모르몬주의에 관한 것도, 어떤 다른 종교적 신념에 관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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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2-02 0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이건 제목이랑 표지가 좀 잘못했네요.. ;;전에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그땐 그냥 넘겼고.. 달자님 리뷰 잘 읽고서 이제야 담습니다. ㅋㅋㅋㅋㅋ

달자 2023-12-02 02:01   좋아요 2 | URL
은오님 안녕하세요! 표지가 영어 원서 꺼 그대로 가져온 거 더라구요...?ㅋㅋㅋ 읽고 나서 은오님 후기 넘 궁금해요 꼭 써주세요! 근데 정말 책 좋아요

청아 2023-12-02 12: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궁금했었는데 달자님 글 읽으니 더 읽고싶어지네요.
역시 제대로 직면한다는게 어렵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도 ‘대단하다‘라는 부분 어느 정도인지 알고싶어져요.^^ 밀린책들이 많아 기약이 없지만 그래도 달자님 글이 반갑기도 해서 다시 찜!ㅋㅋㅋㅋ

달자 2023-12-06 18:42   좋아요 1 | URL
저 작가는 정말... 일단 글을 잘쓰고 솔직하고 똑똑하고... 그 많은 일을 겪고도 우뚝 서는 단단한 멋진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알라딘 사이트를 둘러보다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의 <4월의 유혹>.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출간하는 책들은 구성이 좋아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편이다.

특히 각 시즌 별로 컨셉을 달리 해서 출간하는 세계 문학 시리즈가 흥미롭다.

<4월의 유혹>은 알라딘 서재 팔로워 분들이 왕왕 읽고 후기를 남겨주셨던 책, <불쌍한 캐럴라인>과도 함께, 휴머니스트 세계 문학 시즌 5 -할머니라는 세계-에 포함되어 있다.

















일단 표지에 눈길이 갔다.테이블 뒤로 펼쳐진 눈부신 푸른빛의 바다 해안선을 바라보는 한 여자.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복숭아, 자두로 보이는 제철 과일. 아침으로 먹는 과일인지, 아니면 점심 식사 후 후식으로 먹는 과일인지 햇빛과 그늘의 각도만으로는 바다를 모르는 나는 알 수 없다. 표지를 보자마자 작년 여름에 놀러갔던 이태리의 바닷가가 떠올랐고 그 즉시 사무실을 벅차고 바닷가로 떠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으므로 미리읽기를 눌러 처음 앞 페이지 열장을 읽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버스넛 부인이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뭔가를 묻듯 바라보는 바람에 윌킨스 부인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일이 되려면 그런 식이어야 했다. 혼자서는, 윌킨스 부인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고, 설사 감당할 수 있다 해도 혼자 그곳에 갈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둘이서 함께라면...

윌킨스 부인이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우리 가서 알아보기나 할까요?"

아버스넛 부인의 눈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알아

-미리보기 완료-


알아?? 그 다음에 뭐요??? 아니 적어도 뱉기 시작한 문장은 끝마치게 해 주시고 끊어야 하지 않나요???ㅠㅠㅠㅠㅠ


하아.... 그 뒤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는 이렇게 써 있다.


'이탈리아의 중세식 성에서 4월 한 달을 보낼 기회를 준다는 신문광고에 속수무책으로 붙들려버린, 그러니까 가정, 남편, 지나친 관심, 늙음이란 질척대는 현실을 떠나 천국에 당도해버린 네 여자의 마법 같은 이야기.'


보아하니 윌킨스 부인이 잘 알지도 모르는 아버스넛 부인에게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본인도 알 수 없는 용기로 뜬금없이 이탈리아 중세식 성에서 4월 한 달을 보낼 수 있다는 이 공고에 연락해 보자고 말을 꺼낸 것 같은데 그 다음에 아버스넛 부인의 대답이 너무 궁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10장의 미리보기만으로도 아버스넛 부인이 어떤 캐릭터인지 파악하기엔 충분했기 때문이다. 런던의 중상류층 부르주아의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로필을 가진 그녀는 고고하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지만 사람을 10초 내에 첫인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몇개의 카테고리로 상대를 분류한 다음 계산된 언행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스넛 부인이, 소위 자신보다 가난하고 품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시혜적인 태도로 (본인의 사회적 평판을 생각하며, 그와 동시에 자연적인 일종의 연민 의식을 갖고 친절하게 대하는) 윌킨스 부인을 처음엔 대하다가 윌킨스 부인이 자꾸 저돌적으로 치고 들어 오자 '어 이 여자 뭐지 이 여자는 어떤 카테고리에 분류를 해야 하지' 하면서 출력값에 오류를 보일 찰라 윌킨스 부인이 같이 알아보러 가자고 마지막 어퍼컷을 날리고...!! 아버스넛 부인의 대답 "알아 .......

알아, 다음에 뭐요 뭐???!!!


사무실에서 몰래 미리보기를 읽다가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속이 탄 나는 화장실 가서 볼일 보다 도중에 끊고 나온 사람처럼 (더러운 비유 죄송합니다) 찜찜하게 있었다. 전자책으로는 출간이 안됐고.. 한국에 다음주에 가긴 하지만 다음주까지 기다리기엔 뭔가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책인데... 이곳 서점에선 한국책을 구할 수도 없고... 하다가 든 생각.

프랑스어 번역본이 있다면???


구글에 이 책의 영어원서 제목인 'The Enchanted April'을 쳐보았다. 빙고. 불어판 제목은 원서 제목을 그대로 불어로 번역한 'Avril Enchanté'. FNAC (프랑스의 교보문고, 라고 보시면 되겠다)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 보니, 회사 근처에 있는 FNAC매장에 문고본 재고가 1권이 있다고 뜨는 것이다!! 좋았어!! 점심 시간에 FNAC에 가서 불어판을 사 오는 거야!!


https://www.fnac.com/a17817581/Inga-Vesper-Un-long-si-long-apres-midi


그렇게 점심 시간에 밥을 빨리 먹고 길을 나섰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서점에 갈 수 있다니.. 감격.. 예전 직장에선 꿈도 못꿀 일이었지..  집에서 회사까지 편도 2시간 걸리던 저 멀리 산업 물류단지 외딴 곳에 있었던 전 직장 다녔을 때를 떠올려보면 도심에서 출퇴근을 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얼마나 큰 복지인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프낙에 도착, 영미소설 코너에서 작가 이니셜 별로 꽂힌 서가를 하나씩 살펴보는데도 도저히 내가 찾는 이 책을 찾을 수 없었다. 서점 직원에게 물어봐서 둘이서 같이 찾았는데도, 혹시 몰라 다른 서가를 뒤졌는데도 결국 찾지 못했다... 작가의 이름은 Elizabeth Von Arnim. 엘리자베스는 이름이니까 성씨의 알파벳 순으로 보통 정렬을 하는 프랑스 서가의  V 책장을 직원가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점원이 원하면 지금 주문하고 다음주에 찾으로 오면 된다고 했는데, 사실 나에겐 지금 이 점심시간에 이 책을 사서 바로 뒷장을 펼치는 게 아니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고맙지만 내가 혼자서 더 찾아보고 아니면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점원에게 말하고 아쉬운 마음에 V로 시작하는 작가의 서가를 다시 한번 하나씩 훑어 내려갔다.


그러다 나도 모르는 어떤 이유로 한 책을 집어 들었다.

Inga Vesper,<Un long, si long après-midi>

(영어 원서 제목은 The Long, Long Afternoon)
















사무실에 다시 돌아가 보내야 할, 보나마나 길게 느껴질 그 날의 오후 때문에 제목이 끌렸던건지, 아니면 책등의 옥색과 노란색의 색감, 그리고 그 위에 새빨간 색으로 쓰인 책제목의 색감이 끌렸던 건지, 아니면 그 둘다에 끌렸던건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어찌해서 난 이 책을 꺼내 뽑아 들었고 책 표지는 옥색 주방 붙박이장, 그리고 창밖에는 빨간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는 샛노란 주방이었다. 옥색 주방 붙박이장 가구를 보자마자 아주 옛날 어릴적 외할머니댁의 공사 전 주방이 떠올랐다. 딱 이런 옥색의 주방이었는데. 엄마가 없는 어느날 오후에 할머니가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면서 그 옥색 주방에서 간식으로 만들어주던 프렌치 토스트가 떠올랐다. 할머니를 돕는답시고 할머니 옆에서 깨금발로 간신히 주방 상판에 손을 올려 야무진 손으로 달걀을 깨서 볼에 넣으면, 할머니는 식빵이 흐물해져 부서질 정도로 계란물에 푹 담갔다가 마가린을 듬뿍 넣어 녹인 후라이팬에 식빵을 올려 마치 전처럼 식빵을 부쳤다. 노릇노릇 익은 식빵을 접시에 담고 할머니는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보고 윙크를 하며 손가락을 입술 위로 가져가고선 '쉿' 하며 흰설탕을 수저로 듬뿍 퍼서 식빵 위에 솔솔솔 뿌려 주셨다.


책표지만 봤을 뿐인데 벌써 입에선 뜨겁고 폭신하고 달큰한, 이제는 먹을 수 없는 할머니의 프렌치토스트의 맛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책표지 밑에 써 있는 한 문장에 눈길이 갔다.


"Hier, j'ai embrassé mon mari pour la dernière fois.. Il ne le sait pas, bien sûr. Pas encore."

(어제, 나는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키스를 했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른다. 물론, 아직은.)


뭐지? 가정스릴러물인가? 하고 책의 첫번째 페이지를 펼쳤는데 다시 이 문장이 써 있었다. 그러니까 책 표지에 쓰여진 이 문장은 이 책의 첫문장이기도 한 것이다. 책을 뒤집어 뒷면에 쓰여진 책 설명을 읽었다.


캘리포니아의 햇빛이 쏟아지는 주방, 조이스는 창밖에 서서 꿈을 꾼다. 그녀는 백인이고 부자이다. 가정주부인 그녀의 시야는 그러나 곧, 잘 다듬어진 정원의 덤불에 막히고 만다.

루비, 조이스의 집에서 가정주부로 일하는 그녀는 인생을 바꿀 꿈을 꾼다. 하지만 때는 1959, 미국 사회는 가난하고 젊은 흑인 여성에겐 내어줄 것 하나 없어 보인다. 

조이스의 실종과 함께 가식과 위선으로 덧칠된 미국의 꿈이 서서히 벗겨지기 시작한다.

여성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평등을 위한 투쟁은 이제 시작이지만, 이 멋진 두 여주인공은 이미 자신들의 외침을 들려주고 있다. 자유에 불타는 희망의 외침을.


부자 백인 가정주부? 그리고 흑인 가정부? 1959년 미국?

이 교차하는 여러 정체성이 추리소설에서 어떻게 풀어질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차피 찾지 못한 <4월의 유혹> 불어판 대신 이 책을 구입하고 서점을 나섰다. 서점에선 인터넷이 터지지 않아(네 그렇습니다... 아직도 프랑스에선... 실내 매장에 들어가면 데이터가 터지지 않는 곳이 많답니다.....) 이 책이 한국어 번역본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었는데, 사무실로 돌아와 검색을 해 보니 아직 한국에선 소개가 되지 않은 작가라고 한다.  

구체적인 상황 묘사와 등장인물들의 사소한 언행이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곤 하는 추리소설 장르 특성상 이를 외국어로 읽으면 아무래도 내가 놓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모국어로 읽는 것보다 읽을 때의 긴박감이 떨어져서 재미가 줄진 않을까 생각해서 추리소설을 불어로 읽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근데 오호라 이 책, 엄청 잘 읽히는데? 책이 쉬운 것인가 (맞음) 아니면 내 불어 실력이 늘은 것인가(아님)


다 읽고 나면 후기를 남기겠음! 한국어로 번역을 해서 출간해도 좋을만큼 재밌는 책인가, 아닌가..! 내 마음에 든다면 내가 번역 제안서를 함 출판사에 보내봐...? (어떻게 하는지 모름...)


그나저나... <4월의 유혹> 불어판은 그래서 며칠전 중고책방에서 샀다.

작가 이름이 Elizabeth Von Arnim이라서 저번에 Fnac 서점에 갔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여지없이 V 서가에서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또 없는거야... 그래서 중고책방의 서점 직원에게 결국 또 도움을 요청했는데, Von 의 V 말고 Arnim의 A로 정리되어 있으니까 A서가에 가야한다며 손가락으로 책장으 쓱 훑더니 단박에 책을 찾아주셨다. 암튼, 원래 읽고 싶었던 <4월의 유혹> 불어 문고본을 사긴 했는데 저 <Un long, si long après-midi>(긴긴 어느 오후날) 을 먼저 다 읽고 싶어서 미루고 있다. 그래서 아마 시간상 <4월의 유혹>은 한국에 가서 한국어로 읽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낄낄. 아 얼른 한국어로 쓰인 종이책 읽고 싶다~

이번주 토요일 오후에 한국 도착이니 슬슬 알라딘 장바구니를 훑어서 책을 주문해 놔야겠다. 도착했을 때 이미 내가 주문했던 책이 나를 기다릴 수 있도록~~ 요즘 알라딘 사은품 뭐가 있나 함 봐야겠다.


그나저나 혹시 아시는 분 질문, 번역제안서라는 건 어떻게 써서 어떻게 출판사에 보내나요...? 그 관례라는 게 궁금함.


그럼 이만 총총..


어제, 나는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키스를 했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른다. 물론, 아직은.(불어판 원문을 내가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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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8-23 1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달자 님의 팬이 되렵니다. 아무쪼록 독서 마친 후 감상 꼭 적어주시고요, 번역 제안서도 꼭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음, 사실 형식 같은 거 따로 생각하지 않고 원하는 출판사의 이메일로 책 링크 보내주고 이거 엄청 재미있는데 번역해서 출간 좀 해주면 어떻겠니? 해보셔도 되지 않을까요? 🙄

달자 2023-08-23 21:24   좋아요 3 | URL
옴마나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밥 먹고 왔더니, 알라딘 서재라는 곳을 알게 해준 다락방님의 이런 황송 댓글이..! 제가 팬입니다 아이구 아이구.. 근데 저 또 이렇게 잘한다 잘한다 자란~~다~~ 우쭈쭈 해주시면 또 좋다고 신나서 경솔해 진답니다. 책 거의 다 읽어가요 읽고 나서 귀찮아도 감상문 꼭 쓰기 약속..할게여ㅎㅎㅎㅎ

청아 2023-08-23 2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달자님 프로필 사진 제가 애정하는 영화예요. 글도 어쩜 이렇게 잘쓰시는지요.
내일은 오랜만에 프렌치토스트를 해먹어야겠어요! (저는 이모가 해줌ㅋ)

달자 2023-08-23 21:25   좋아요 2 | URL
어머나 미미님...! 이렇게 댓글도 남겨주시고 감사합니다ㅠㅠ 미미님이 비교도 안되게 훨 잘쓰심...영화 <가장 따뜻한 색,블루>의 아델 배우죠!! 저도 참 애정하는 영화예요 캬 이렇게 저 혼자서 내적친밀...!!! 프렌치토스트 계란물이랑 우유 아주 푹~~적셔서 만들어 주세요 설탕은 눈 딱 감고 팍팍!!

은하수 2023-08-24 1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4월의 유혹 보고 들어왔는데 글이 재밌어서 끝까지 신나게 달렸어요
저 오뎅탕도 제 취향입니다~~~
4월의 유혹도 재미있었어요. 정말 제목대로 멋져요!
저 시리즈도 좋고... 전 비타 색빌웨스트 책 읽었거든요?
진짜 넘 좋아요.... 좋아요만 계속 말할 수 있어서 좋네요^^
4월의 유혹도 재밌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달자 2023-08-24 17:54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은하수님 ! 좋은 걸 좋다고 말하기~~ 4월의 유혹 책을 저도 같이 이태리의 고성 속에서 멋진 풍경과 함께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저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훑어봐야겠어요!
 
[eBook] 개 신랑 들이기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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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단편<페르소나> 좋았다. 문장 하나 하나가 급소를 공격한다. 해외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적 과거의 내가 읽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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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8-24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다와다 요코의 에세이 샀어요. 곧 읽을 겁니다. 훗!

달자 2023-08-24 17:52   좋아요 0 | URL
저도 샀어요!! 후기 기다리고 있을게요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