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째서 변하는 걸까"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 낸 김영하씨

소설가 김영하(36)씨는 그동안 발표한 작품들에서 일부 장르문학의 기법을 차용했는가 하면, 구비문학이나 역사적 사건에서 소재를 빌려오기도 했다. 각기 따로 ‘노는’ 작품들 사이의 공통점은, 작가 자신의 말마따나, “본격문학이 다뤄선 안 될 얘기들만 골랐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등단 10년째를 맞은 그가 최근 내놓은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창비)는 새로운 이야기꺼리를 찾는 실험에서 한 발짝 비켜섰다. 소설가의 관심은 ‘사건’보다는 ‘인간의 내면’에 쏠려있다.


사건 보다 인간내면에 집착

지난 26일 만난 소설가는 이번 작품집에서 “일상에서 그저 별것 아닌 일들이 벌어질 뿐이데, 어째서 인간은 변하는가를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문을 뗐다. “근대초기의 지식인 윤치호는 어쩌다 친일을 긍정하게 됐는가”나 “마담 보봐리가 연애에 눈뜨고 파멸로 치닫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같은 소설의 고전적인 ‘화두’에 대해, 자신만의 답안지를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단편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경우, “즐겁게 작업하는 평소 태도와 달리, 쓰면서 벅차오르는 슬픔 때문에 여러 번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벅찬 슬픔에 글쓰기 애먹어

아델베르트 샤미소의 소설에서 제목을 빌린 이 단편은 외부세계와 격리된 채 살아가는 30대 중반 남성 소설가의 얘기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오랜만에 옛 친구들인 바오로와 미경을 각각 만난다. 가톨릭 신부인 바오로는 ‘나’에게 자신이 얼마 전 미경과 잠자리를 함께 했음을 털어놓는다. 미경이 너무나 불쌍했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는 설명이 따른다. 다시 미경과 마주앉게 된 ‘나’는 미경의 남편이 제 몸에서 타오른 불길로 죽음에 이르는 ‘자연발화’로 숨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날 밤 ‘나’는 미경과의 결혼을 생각하면서, “거대한 새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간다”고 느낀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등장인물들 마음 속의 “어떤 미묘한 흔들림”에 초점을 맞춘다. ‘자연발화’라는 ‘비상’한 사고는 사소한 장치일 따름이다. 소설가는 창공으로 까마득하게 솟구쳐 오른 새에게도 그림자가 달려있다고, 한 개인의 내면도 외부세계가 드리운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들려준다. 그의 이런 세계인식은 몇 십만 원짜리 가야토기가 깨지는 ‘해프닝’을 그린 <이사>나 한 살인사건을 다루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아닌데도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인물들을 보여주는 <크리스마스 캐롤>에도 이어진다.

반면 한 ‘콩가루’ 집안에 고양이까지 끌어들여 하나의 ‘유사가족’을 빚어낸 표제작, 보물선과 충무공 동상을 음모론적으로 엮어낸 <보물선> 등은 작가 특유의 발랄한 상상력과 경쾌한 문장을 기다린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발랄한 상상력 어디 가나요

“이젠 머신이 돼 가는 것 같아요. 작가로서 더 이상 산출하지 못할 거라는 공포에선 벗어났습니다. 매일 오후 여섯시까지 글을 쓰고, 저녁엔 맥주를 마시며 티브이를 봅니다. 외국에 오래 머물렀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에는 창작에 집중하려 해요. 원고지 3000장 분량의 두툼한 장편소설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연애나 가족해체 같은 당대의 풍경을 박물지처럼 그리되, <율리시즈>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처럼 짧은 시간 속에 담게 될 것 같아요.”

글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3/2004/02/0091000032004022718483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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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0

한스는 이메일을 보내겠다고 했다. 떨어져 있는 상태를 믿는다는 건 힘들 일이다. 아무리 유대를 유지하려고 해도 직접 만나 웃는 것과는 다르다. 그의 기별은 굳이 기다려도 좋고, 안 기다려도 좋았다. 그가 이메일을 보내도 좋고 아니어도 괜찮은 이런 평화, 우리가 자주 만나지 않게 될 거라는 사실이 주는 이런 허심한 단절감은 무엇일까.

p.259

"어떤 의사가 그러는데, 내 마음속에 지닌 분노는 내가 아이였을때, 강요된 당근 요리를 먹은 것 때문이라고 했어. 농담처럼 말했겠지만, 사실 난 익힌 당근을 좋아하지 않았어. 작은 당근도 싫어했어.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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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ine21.co.kr/kisa/sec-002700705/2004/02/040226100049050.html

신데렐라의 악몽

<대장금>처럼 날마다 닥치는 시련도 없다. <천국의 계단>처럼 엄청난 비밀도 없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오히려 주인공들의 감정은 좀 복잡하다. 그런데도 묘한 매력이 있다. 나만 끌리는 게 아니다. 시청률 30%를 웃돈다. 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 이야기다.

외양은 통속 드라마의 원단. 왕자님을 꿈꾸는 신데렐라 이야기다. 이수정(하지원)은 신데렐라답게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다. 혼자 힘으로 세파를 헤쳐왔으니 지고지순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속물 근성으로 똘똘 뭉쳐 있다. 아예 드라마 초반부에 “처음부터 다 가진 놈 하나 물어서 팔자 고치는 것이 꿈”이라고 커밍아웃한다. 그게 무슨 죄냐? 희망없는 인생의 유일한 탈출구인데. 우리처럼.

물론 신데렐라는 오매불망, 좌불안석 기다리던 왕자님을 만났다. 발리에서. 철부지 왕자, 정재민(조인성)은 여차저차해서 속물 신데렐라에게 끌린다. 짝짝짝, 해피엔딩? 오호 통재라. 하필이면 가난한 흑기사, 강인욱(소지섭)이 끼어들 게 뭐람. 당연히 사랑의 결투가 펼쳐진다. 발랑 까진 신데렐라, 두손에 떡을 들고 운다. 돈을 좇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택하자니 돈이 운다. 그 번뇌, 이해가 간다. 그리하여 지고지순하지 않은 신데렐라, 심금을 울린다. 영어로는 이런 걸 리얼리티라고 하지?

까진 신데렐라, 사는 꼴이 가관이다. 왕자가 휴대폰을 안기면 못 이기는 척 받는다. 혼자 남으면 실실 웃음을 흘린다. 그 휴대폰으로 흑기사의 콜을 기다린다. 휴대폰뿐이랴. 아르마니 코트도, 페라가모 구두도 땡큐다. 왕자가 건네는 아파트 열쇠도 덥석. 단, 선물공세는 오케이지만, 육탄공세는 노땡큐다. 흑기사한테는 입술을 주지만, 왕자의 입술은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왕자님 만나기 전에 꼭 화장은 고친다. 일찍이 조상들께서,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복잡한 신데렐라, 온몸으로 증명한다.

캔디인 척하는 것도 짠하다. 왕자 엄마가 “기생충 같은 기집애”라며 귀싸대기를 후려쳐도 도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엄마의 갤러리에 꼬박꼬박 출근해서 속을 뒤집는다. 월급 100만원, 오직 돈 때문이다. 자존심 운운하며 출근을 말리는 흑기사의 충고를 울먹이며 되받는다. “기생충, 버러지, 쓰레기, 거지 깽깽이 그런 말이 뭐가 어때서요? 나 그런 말 9살 때부터 듣고 자랐어요.” 짠하다. 선현들께서는, 눈물이 아래로 흘러도 밥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는 명언을 남기셨다. 신데렐라의 눈물 젖은 밥숟가락이 그 진리를 증명한다.

왕자님과 흑기사는 질투의 화신이다. 그들의 슬로건은 ‘질투는 나의 힘’. 출신성분으로도, 과거전력으로도 숙명의 라이벌이다. 이미 1차대전도 치렀다. 왕자님의 약혼녀 최영주(박예진)가 흑기사의 옛 애인. 불쌍한 왕자, 흑기사에게 약혼녀의 마음을 빼앗기고, 신데렐라까지 빼앗기게 생겼다. 어찌 질투에 눈이 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자님은 신데렐라를 가지고 싶어할수록 흑기사를 질투할 수밖에 없고, 흑기사도 신데렐라를 사랑할수록 왕자님을 시기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둘은 직장 상사와 부하 사이. 하루하루가 지옥일 수밖에. 오죽하면 그 과묵한 흑기사가 “니가 정재민이랑 있는 걸 보면 못 견디겠어”라는 직설화법까지 썼겠는가? 쿨한 왕자님께서 “강인욱이랑 가지마!”라고 절규했겠는가?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의 어법을 빌리면, “신데렐라, 흑기사(혹은 왕자)랑 자지마요. 나도 잘해요”. 요컨대 <발리에서 생긴 일>은 그놈이 그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악몽의 드라마다. 우리 꿈의 레알리슴.

더욱 적나라한 것은, 모든 사랑의 결투가 무승부라는 사실. 이 드라마의 누구도 사랑을 완전 정복하지 못한다. 신데렐라는 흑기사의 순정을 사랑하지만, 왕자님의 다이아반지도 갖고 싶다. 공주님은 흑기사를 사랑했지만, 왕자님도 놓칠 수 없다. 왕자님과 흑기사의 심사도 복잡하긴 마찬가지. 흑기사가 정말 그 옛날 공주님을 사랑했었는지도 모호하다. 왕자님이 신데렐라에게 처음 관심을 두게 된 이유가 흑기사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는지도 애매하다. 하여튼, 얘는 이래서 좋고, 쟤는 저래서 좋은데, 어쩌라고? 그게 현실 아니던가. 때묻은 세상에서 때묻지 않는 사랑? 설마. 콩글리시로 리얼리티 만빵!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그람시를 아는가? 그러면 헤게모니는? 모른다면 이 드라마를 보기를. 신데렐라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그놈들의 헤게모니”에서 빠져나오는 결말을 목격할지도 모르니까. 그것이 곧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일 테니까. 혹시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면 신데렐라처럼 침 흘려가며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일독하기를. 흑기사의 충고대로 세 페이지만 읽어도 잠이 잘 올 테니까.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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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ce 2004-02-27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집에 가서 엄마랑 뒹굴뒹굴 발리...를 본다. 예전에 어렸을 때는 엄마가 일찍 자라고, TV 많이 보지 말라고 자꾸 그래서 엄마랑 같이 뭘 본 기억이 없는데. 수정이 왔다 갔다 할때마다, 재민이 닭짓 하고 영주가 여기저기 채이고 다닐 때마다 쯧쯧쯧 혀를 차며 같이 보니 재미있다. 게다가 알고 보니 남자 보는 눈도 많이 비슷하다. 인욱이 같은 애, 은근히 사람 골치 아프게 한다는.. 사뭇 진지한 견해를 모녀지간에 나누면서 매 주말 눈을 반짝이며 보는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
 
희망의 이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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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구달은 너무 유명한 사람이다.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어서 (게다가 느낌표 선정도서이기도 해서) 이 책을 사는 것 조차 망설였었다. 출장길에 가져갈 책을 사러 학교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손에 넣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겠지.

과학자가 되기 위해 벌써 10여 년간 교육을 받아온 내가 과학이라는 도구 자체와 그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고 종교와의 조화를 찾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가장 간단한 진핵 생물인 효모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구조와 기능이 보존되어 있는 단백질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나는 분자적 진화가 실제로 일어나 종을 분화시켰고 진화의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진화론에 대해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마다 아이들은 창조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그때 마다 ‘처음 생명의 시작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진화는 실제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 옳은 대답인지 자신이 없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지. 아니, 이것도 내 지식에 대한 자만인가?

‘희망의 이유’를 읽고 나서 이런 것들에 대한 불안함을 덜 수 있었다. 진화, 윤회처럼 내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개념들을 엄격하게 외면한 것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신이 아니었다. 신의 겉에 둘러싸인 제도로서의 종교였다.

제인 구달의 이야기는 나에게 바바라 맥클린 톡(생명의 느낌)과 현경(미래에서 온 편지)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 두 여인처럼 제인 구달도 나에게 힘을 주었다. 신을 사랑하고 과학을 맹신하지 않고 과학을 도구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자연과 사람과 주위의 모든 것들과 조화롭게 사는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동안 과학자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 것이 나에게 때로는 큰 부담이 되어왔다. 이 일은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순전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연구는 쉽지 않고 결과물이 없으면 당장 경력에 문제가 생긴다. 어떤 때는 연구를 해서 논문을 쓰는 것인지 논문을 쓰려고 연구를 하는 것인지 헛갈릴 지경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무언가 알아가는 기쁨을 더 느끼면서 연구했으면 좋겠다. 논문 한 편 더 쓰려고 급급하기 보다는. 나중의 일자리를 생각하면서 야망을 불태우기 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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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나무와숲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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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이름을 가져야 할 일이 몇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이름을 고집한 이유를 나조차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을 계획이었고 굳이 그들에게 나를 맞출 필요가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올 곳이 있었다. Native Speaker가 될 수도 없지만 되고 싶지도 않았다.

이민자들은 다를 것이다. 그들은 돌아올 곳을 마련해 두고 떠나지 않는다. 어제 TV에서 본 캐나다의 중국인 이민자가 말했듯이 이민에서 성공하려면 갓난아이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 사회에 가능한 한 잘 섞여야 한다. 새로운 사회에서 인정 받아야 떠난 곳에서도 그들을 인정한다. 자꾸 떠나온 곳을 돌아보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가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건, 정말 오래된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첫 번째 소 문항인걸.

하지만 이 소설 속 사람들은 아무도 정면 돌파를 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관찰한다. 릴리아는 ‘숨기는 것이 많은’ 헨리를 관찰한다. ‘인생에서는 B+ 학생, 불법 외인, 정서적 외인’… 헨리는 존 강을 관찰한다 (이건 그의 직업이다). 매일매일 존 강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고 송고한다. 그렇다고 릴리아가 헨리를 알게 되고 헨리가 존 강을 알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너무 여러 겹의 마음결을 가지고 있다.

구분할 수 없는 어려움은 또한 언어의 문제이다. 헨리 박과 박병호, 두 개의 이름. 교양 있는 영어를 사용할 때와 한국어로 소리지를 때의 존. 영어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치료하는 릴리아. 그 아이들의 아름다운 원래 이름들. 그들이 모두 Native speaker로 수렴할수록 스스로를, 서로를 알고 싶은 그들의 희망은 점점 아득해진다. 영어로 쓰여진 아름다운 이 소설은 우리에게 그걸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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