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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나무와숲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영어이름을 가져야 할 일이 몇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이름을 고집한 이유를 나조차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을 계획이었고 굳이 그들에게 나를 맞출 필요가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올 곳이 있었다. Native Speaker가 될 수도 없지만 되고 싶지도 않았다.
이민자들은 다를 것이다. 그들은 돌아올 곳을 마련해 두고 떠나지 않는다. 어제 TV에서 본 캐나다의 중국인 이민자가 말했듯이 이민에서 성공하려면 갓난아이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 사회에 가능한 한 잘 섞여야 한다. 새로운 사회에서 인정 받아야 떠난 곳에서도 그들을 인정한다. 자꾸 떠나온 곳을 돌아보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가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건, 정말 오래된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첫 번째 소 문항인걸.
하지만 이 소설 속 사람들은 아무도 정면 돌파를 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관찰한다. 릴리아는 ‘숨기는 것이 많은’ 헨리를 관찰한다. ‘인생에서는 B+ 학생, 불법 외인, 정서적 외인’… 헨리는 존 강을 관찰한다 (이건 그의 직업이다). 매일매일 존 강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고 송고한다. 그렇다고 릴리아가 헨리를 알게 되고 헨리가 존 강을 알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너무 여러 겹의 마음결을 가지고 있다.
구분할 수 없는 어려움은 또한 언어의 문제이다. 헨리 박과 박병호, 두 개의 이름. 교양 있는 영어를 사용할 때와 한국어로 소리지를 때의 존. 영어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치료하는 릴리아. 그 아이들의 아름다운 원래 이름들. 그들이 모두 Native speaker로 수렴할수록 스스로를, 서로를 알고 싶은 그들의 희망은 점점 아득해진다. 영어로 쓰여진 아름다운 이 소설은 우리에게 그걸 되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