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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복형제들
이명랑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가만, 책을 덮고 그 이상한 결말을 생각한다. 이복형제들의 지리멸렬을 떠올린다. 영원, 영원히 멀리, 도망갈 수 있을까.
이명랑의 전작, ‘삼오식당’은 친구에게 가 있다. 재미있는 소설이라며 친구에게 주었지만 사실, 다시 보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랬다. 재미있지만 다시 볼 수 없다. 나는 웃기지만 상처를 들추어내는 이야기를 다시 볼 자신이 아직 없다. ‘나의 이복형제들’은 더 깊은, 그리고 이제 막 생겨서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여전히 재미있게 들여다 본다. 떠돌이들, 유랑자들이 이복형제라는 이름을 달고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인다. 그들에게 선악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시장 상인 누구의 형제도 아닌 떠돌이들은 가출 소녀 영원의 쓰기 노트에서나 이름을 얻는다. 머저리, 깜뎅이, 왕눈이, 춘미 언니.
시장으로 흘러 들어온 머저리와 깜뎅이는 저항할 힘이 없다. 맞은 데 이력이 났는지 남편이 때리기 시작하자 얼굴부터 가리는 머저리, 영어를 쓴다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하는 깜뎅이. 그들은 몰래 돈을 모으는 것으로, 둘이 살 크고 흰 집을 그리는 것으로 조용하고 거대한 저항을 시작한다. 둥지를 나눠 쓰고, 통장을 만들어 주는 건 영원의 몫이다. 입술만 빼고는 제 몸 움직이기 힘든 춘미 언니의 리모콘이 되거나 신산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믿고 지내던 진돗개를 처분한 왕눈이에게 개털 색깔의 담요를 사다주는 것도 이복형제들을 지켜보는 영원이의 일이다. 둥지와 동지애를 말한 건 협동합시다 아저씨인데, 그걸 보여주는 건 무당이 되려다 만 영원이다. 운명을 버리고 나서 (운명이 진짜 버릴 수 있는 거라면!) 영원이는 모두의 운명에 스며들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