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 지붕에 대하여

안도현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저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 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 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는 녹슬어 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 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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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7-29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도현의 시는 참 따뜻해서 좋아요. 영화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같은 느낌의 시가 아닐까 했는데 느낌은 다르네요.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눈치채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매일매일 시를 읽는 사람은 인생을 풍요롭게 산다는 말처럼 시는 사람을 순간적으로라도 착하게 만드는 듯 해요.

머털이 2004-07-29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호밀밭님 말씀에 동의.
요즘 좋은 시들을 많이 알게 되네요. 전에는 시를 읽고 '느끼는'게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시 읽는 맛을 알아가는 것 같아요.

Choice 2004-07-29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지막히 일어나서 이규원의 가정음악을 듣는데 저 시가 나와서 적어보았습니다. 해가 뜨거우니 빗소리도 그리워지네요. 사랑,도 그립고.
 

쉰네 살

김지하

사랑 잃어버렸다
봄에
꽃잎 시들고
푸른 하늘 나직하다

아파트 모서리
날 선 내 마음 모서리
칼이 되어
아무나 찌르고 쑤시고
저도 가르고

아아

사랑 잃어버렸다
눈 침침하다

운다

길 양쪽 휘어져
가로수들 서로 맞절하는 오후
쓰린 가슴에
섬김을 배운다

저만큼 거리 두고
공경하는 법
공경으로 사는 법



이제
쉰네 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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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ce 2004-07-28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딱 반이네. 흠.
 

http://www.naxos.com/mainsite/default.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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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ine21.co.kr/kisa/sec-001100100/2004/07/040727102110008.html#

[비평 릴레이] <화씨 9.11>, 허문영 영화평론가 [2004-07-27]

위험한 정치적 선동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올해 칸영화제가 끝난 직후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는 〈화씨 9/11〉에 대해 “이 영화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한 것은 어떻게 변명하든 간에 정치적 제스처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썼다. 올해 칸의 경향이 얼마간 미심쩍었던 나는 시원한 비판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비로소 본 지금, 이 영화에 관한 칸의 선택을 지지한다. 그것은 칸의 선택이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정치적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화씨 9/11〉은 미국의 문제아 마이클 무어가 부시의 재선을 막기 위해 만든 다큐멘터리다. 목적이 명료하고, 내용 또한 명료하다. 부시가 얼마나 무식하고 게으르고 탐욕스러운지, 또 이라크 전쟁을 비롯해 그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폭로한다. 그는 전작 〈볼링 포 콜럼바인〉의 디브이디판에서 “나는 일반적인 디브이디에서처럼 코멘터리를 하지 않겠다. 이 영화는 그것 자체로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화씨 9/11〉보다 모든 코멘터리를 더 무색하게 만드는 작품을 상상하기 힘들다. 여기엔 깊이도 새로움도 없다.

마이클 무어는 기록화면 수집의 대가다. 어디서 찾아냈는지 탄복할 만한 자료화면을 모아놓고 그것들을 교묘하게 짜깁기하는 것만으로 부시와 그 일당을 엿먹인다. 나의 언어를 논리화하지 않고, 그의 언어가 제 스스로 결함을 드러내도록 전시하는 건 고단수의 정치공세다. “세계의 모든 나라를 동원해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할 것입니다. 자, 이제 나의 샷을 보시지요”라며 부시가 골프채를 휘두를 때, 그를 혐오하지 않기란 힘들다. 추하고 맹하고 일그러진 부시의 얼굴은 갖가지 방식으로 전시되며, 그의 나쁜 정책으로 고통받는 미국인의 슬픈 얼굴이 대비된다.

〈화씨 9/11〉은 선전이 아니라 선동이다. 그것도 위험한 선동이다. 이 다큐멘터리에 새로운 것은 없다. 대통령 선거 때 부시 진영의 조작 의혹을 폭로하는 초반 장면들은 〈BBC〉가 보도했으며 무어가 자신의 선동적인 저서 〈멍청한 백인들〉에서 재론한 주장을 몇 가지 자료화면으로 축약한 것일 뿐이며,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오랜 유착 관계, 그리고 군산복합체의 정치 로비는 아주 오래된 구문이다. 후반부에 길게 등장하는 이라크 주둔 미국 병사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스런 육성은 저널리즘의 극히 상식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화씨 9/11〉이 알려진 정보와 의혹들을 부시와 그 일당의 서투름과 개인적 실수와 추한 이미지에 결부시켜 설득하려 할 때, 이 선동은 위험해진다. 부시가 “나는 아내와 아이를 잃어본 적이 없어 그게 어떤 건지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 아프긴 하다”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장면은 거의 살의를 느끼게 하지만, 그가 연기하는(레이건이라면 완벽하게 해냈을) 슬픔의 깊이와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과는 무관하다. 535명의 미국 상·하원 의원 가운데 단 1명만이 이라크에 자식을 보냈지만, 전원이 보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화씨 9/11〉은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지적으로 위험하다. 그것은 지엽적 교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사소한 결함들을 구조적 악과 등치시키기 때문이다.

이 다큐멘터리가 “황색 저널리즘의 좌파적 전유”(유운성, 〈씨네21〉 462호)라는 말에 동의한다. 동시에 이 센세이셔널리즘이 성공하기를 빈다. 김선일씨의 절규에 사로잡히기 오래 전부터, 2003년 3월20일 오전 5시30분 첫 미사일이 바그다드에 떨어졌을 때부터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첫 공격이 이뤄진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우리의 젊고 진취적인 대통령이 “전쟁을 지지한다”고 부시에게 전화했을 때, 그리고 얼마 뒤에 “파병은 본질적인 문제여서, 여론에 좌우되지 않겠다”고 말하며 흔들림 없이 실행했을 때, 그가 말한 본질이 결국 우리의 견해가 아니라 미국과 부시가 쥐고 있는 우리의 밥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우리의 무기력과 굴욕은 씻을 수 없는 것이 됐다. 이 위험한 선동에 그냥 선동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으며, 의사당 앞에서 의원들을 붙들고 자식 파병에 서명하라고 종용하는 마이클 무어 특유의 치기어린 맹동주의를 비웃을 낯짝을 못 찾겠다.

소위 최고의 영화제에서 최고의 영화로 지목된 〈화씨 9/11〉은 최선의 영화가 아니라, 차악의 저널리즘이다. 그리고 영화 비평을 쓰는 자리에서 나는 그런 저널리즘을 지지한다.

허문영/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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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복형제들
이명랑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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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책을 덮고 그 이상한 결말을 생각한다. 이복형제들의 지리멸렬을 떠올린다. 영원, 영원히 멀리, 도망갈 수 있을까.

이명랑의 전작, ‘삼오식당’은 친구에게 가 있다. 재미있는 소설이라며 친구에게 주었지만 사실, 다시 보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랬다. 재미있지만 다시 볼 수 없다. 나는 웃기지만 상처를 들추어내는 이야기를 다시 볼 자신이 아직 없다. ‘나의 이복형제들’은 더 깊은, 그리고 이제 막 생겨서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여전히 재미있게 들여다 본다. 떠돌이들, 유랑자들이 이복형제라는 이름을 달고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인다. 그들에게 선악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시장 상인 누구의 형제도 아닌 떠돌이들은 가출 소녀 영원의 쓰기 노트에서나 이름을 얻는다. 머저리, 깜뎅이, 왕눈이, 춘미 언니.


시장으로 흘러 들어온 머저리와 깜뎅이는 저항할 힘이 없다. 맞은 데 이력이 났는지 남편이 때리기 시작하자 얼굴부터 가리는 머저리, 영어를 쓴다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하는 깜뎅이. 그들은 몰래 돈을 모으는 것으로, 둘이 살 크고 흰 집을 그리는 것으로 조용하고 거대한 저항을 시작한다. 둥지를 나눠 쓰고, 통장을 만들어 주는 건 영원의 몫이다. 입술만 빼고는 제 몸 움직이기 힘든 춘미 언니의 리모콘이 되거나 신산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믿고 지내던 진돗개를 처분한 왕눈이에게 개털 색깔의 담요를 사다주는 것도 이복형제들을 지켜보는 영원이의 일이다. 둥지와 동지애를 말한 건 협동합시다 아저씨인데, 그걸 보여주는 건 무당이 되려다 만 영원이다. 운명을 버리고 나서 (운명이 진짜 버릴 수 있는 거라면!) 영원이는 모두의 운명에 스며들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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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7-17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호기심을 끌었는데 읽지는 못했어요. 저도 <삼오식당>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두 번 읽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이 소설은 그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나 봐요. 관심이 가는 작가이지만 이야기가 쉬 공감이 가지는 않았어요. 이 소설은 어떨지 읽고 싶어지네요.

Choice 2004-07-1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오식당. 보다 읽고 나서 생각할 게 더 많은 거 같아요. 해설에서 양진오 님이 말한 것처럼 이주노동자와 조선족 동포를 우리 문학에 제대로 끌어들인 소설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결말은.. 진짜 이상합니다.--;; 스포일러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