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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교향곡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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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대향(). 평남 평양() 출생. 오산고보() 졸업. 일본 도쿄문화학원[] 미술과 재학 중이던 1937년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의 자유미협전(:제7회)에 출품하여 태양상()을 받고, 1939년 자유미술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945년 귀국, 원산()에서 일본 여자 이남덕(:본명 )과 결혼하고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신사실파() 동인으로 참여했다.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도일()하자, 부두노동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후 일본에 보낸 처자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정신분열병증세를 나타내기 시작,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죽었다. 작풍()은 포비슴(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서 한국 서구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선화()는 표현의 새로운 영역의 탐구로 평가된다. 작품으로 《소》(뉴욕현대미술관 소장), 《흰 소》(홍익대학교 소장) 등이 있다.

해와 아이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복사꽃과 아이들

 

 


 

 

 

 

 

 

 

 

 

 

 

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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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1937
-캔버스에 유채, 351*782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1930년에 그려진 피카소의 통렬한 파시스트 고발 및 반전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정치, 예술 논쟁을 불러일으킨 최대의 걸작이며 대작이다. 1936년 피카소의 모국 스페인에서는 프랑코(뒤에 종신 총통)에 의해 공화국 체제를 반대하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나치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가 프랑코를 지원하는 가운데 1937년에는 나치스의 폭격기가 피레네산 근처의 작은 도시인 게르니카를 짓이겨 버렸다.
그 죄악상을 파리에서 전해 들은 피카소는 당장 일련의 데생을 하기 시작했다. 죽음과 공포 속에서 울부짖는 인간과 쓰러진 말과 소 등이 상징적으로 강조된 형태로 그려졌다. 그리고 그것들이 대작 <게르니카>로 집대성 된 것이다.
그전에 피카소는 마침 파리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위해 벽화를 스페인 정부로부터 위임 받았었다. 피카소는 이를 위해 <게르니카>를 약 한달만에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것은 독재 세력과 잔인한 살육에 대한 정치적 저항과 분노를 표명한 피카소의 최초의 대작이면서 동시에 입체주의의 평면화라는 피카소의 또 다른 새로운 방법을 펼쳐준 작품이다

[창가의 정물]
-1934
-캔버스에 유채, 80.6*101cm
-시카고 미술관

활짝 열린 창가에 놓인 테이블 위에 꽃병과 과일이 놓여 있다. 이러한 정물 배치의 작품은 피카소가 1925년 이후 가끔 시도한 주제인데, 여기선는 그전에 볼 수 없는 부드럽고 온화한 색체와 필치의 구성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는 입체주의 초기의 전개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여기서 화가의 관심보다 한정된 공간 속에 대상의 형태를 분석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좌우로 펼쳐진 창 저쪽의 공간은 그러한 분석적 방법이 잘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색으로 공간을 암시하고자 하는 시도는 일체 배제되고, 평면적인 색면의 배역에 역점이 주어져 있다.


[세 악사]
-1921
-캔버스에 유채, 200*223cm
-뉴욕 근대미술관

 

<파이프를 든 사나이>와 비교될 수 있으면서 훨씬 장식적 평면성이 강조된 작품이다. 그러면서 입체주의의 달성을 딛고 인강를 소재삼은 대표작의 하나이다. 중앙에는 기타를 치는 아를르 캥(울긋불긋한 옷차람을 한 익살광대)이, 그 왼쪽에는 클라리넷을 부는 피에로가 앉아 있다. 오른쪽은 가면을 쓴 검은 옷의 수도라로서, 악보를 펼쳐들고 있는 것 같다. 테이블 밑으로는 개가 있어, 왼쪽 벽면에 개의 머리가 그림자로 나타나 있다.


[파이프를 든 사나이]
-1915
-캔버스에 유채, 130.3*89.5cm
-파리 근대미술관

 

입체주의 화가들에게 있어서 콜라즈의 커다란 이점은 여러 색명을 결합시키는 과정에서 밑과 위로 겹치는 효과의 묘미가 자연스럽게 얻어지고, 형태의 상호 거리감이 스스로 명확해진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피카소는 이 작품에선 유채 표현으로 역이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벅지, 목재, 의자 등은 물질적 요소의 부분들을 단편화시켜 자유롭게 재구성하는 화면을 만들어 내어, 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순수한 공간적 존재의형태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기타리스트]
-1909~10
-캔버스에 유채, 100*73cm
-파리 근대미술관

이 작품은 피카소의 입체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다. 그는 인생의 어두운 면을 서적적으로 노래한 청색시대와 구성적인 분홍색 시대를 거쳐, 1907년부터는 대상을 마음대로 분해하고, 그렇게 분해된 여러 요소를 자신의 조형적인 의도로 다시 재구성하는 입체주의를 시도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억지로나마 기타리스트의 얼굴과 기타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지만, 여기서 피카소의 의도는 결코 기타리스트의 초상이 아니라 선과 면에 의한 순수한 조형적 세계이다. 색채도 전적으로 임의의 갈색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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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금붕어가 있는 어항]
-1914
-캔버스에 유채, 142*98cm
-파리 근대미술관

마티스는 세기초에 파리의 새로운 결정적 회화운동이었던 야수파의 한 중심 멤버였으나, 1910년대에 접어들명서 이미 거기에서 이탈하여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명확한 직선과 면, 그리고 찬색 계통의 정적인 색채에 의한 유기적이고 장식적인 화면 구성이었다. 그러한 정신적 변화는 1차대전의 체험에서 받은 영향으로 보는 연구가도 있으나, 다시 하나의 혁명적 움직임이었던 브라크 등의 입체파에 접근하려 했언 점을 말해준다.
분명히 브라크의 색채와 선에 자극 받은 마티스는 여러 형태의 직선적인 구도로 조형적 질서와 균형을 전개시키려고 했다. 그러한 집착의 하나인 이 작품은 금붕어가 들어 있는 어항과 주위와의 관계를 주제 삼고 있으나, 여기서의 초점은 무엇보다도 그 상황의 밝음과 강도의 강조이다. 1910년대에 금붕어를 주제로 한 작품은 모두 금붕어의 선명한 빨강, 부드럽게 움직이는 그 생명의 맑은 표정을 포착하는 데서부터 화면이 형성되고 있다.


[빨간 실내]
-1948
-캔버스에 유채, 146*97cm
-파리 근대 미술관

마티스의 만년의 정점으로 여길 수 있는 작품이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빨강이 압도적인 박력으로 삶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마티스의 화면은 보통 단순함, 명쾌함 등의 특질로 인상지워져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여러 요소가 결합되고 혹은 충만해 있다.
이 작품에서도 서로 형태가 다른 4개의 테이블이 나타나면서, 그 위에는 꽃과 과일이 놓여졌고, 바닥에는 짐승의 가죽이 보인다. 거울과 창이 나란히 설정돼 있고, 직선적인 의자의 다리에 테이블 다리의 곡선이 대응한다.
온갖 선과 온갖 시각이 서로 어울려 있고 그것들은 주조색인 빨강 속에 온통 흡수돼 있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복잡하다는 느낌이나 위화감 또는 충돌감을 조금도 일으키지 않는다. 삶의 윤택함이 완전히 체계화되어 모뉴멘탈한 풍성함을 낳고 있다.
1930년대에 이미 거장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던 마티스는 2차 대전 후의 시도로서 이러한 기념비적인 세계에 도달한다. 오로지 삶을 찬미하고,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이 가져다 준 하나의 장식적인 아름다움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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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1907~1909

-캔버스에 유채, 108×180㎝
-오스트리아 미술관

 

 

 

 

 

 

 

키작은 풀꽃이 만발한 언덕 위에 두 연인이 서로에게 의지한채 서있다. 짧은 순간에 도취되어 지그시 두눈을 감은 여인 하지만 그 순간 의 감흥이 얼마나 큰지는 말려들어가는 손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가운은 마치 후광처럼 짧은 순간의 감흥을 더해주고 두 사람은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하나인듯 하지만 결국 엄연히 다른 둘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패턴화된 장식을 통해서다. 남성의 옷에는 직사각형의 장식을 넣어서 남성성을 드러냈고 여성에게는 둥근 원형의 장식을 넣어서 여성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큰 가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성의 상징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남성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동시에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남성안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정한 화해.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해와 존경을 통해서만이 진정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메세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궁극적인 화해의 이미지는 입맞춤인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클림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통한 영원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신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클림트 자신과 에밀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이 그림은 분명 사랑을 통한 화해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결코 따뜻하거나 희망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관자를 향해 아니 세상을 향해 매몰차게 돌려져 있는 남자의 머리와 창백한 얼굴로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린 듯 꼭감은 두눈의 여자의 얼굴에서 오히려 소외감과 우울함을 느끼게 만든다


 

[개양귀비 들판]
-1907

-캔버스에 유채, 110㎝×110㎝
-오스트리아미술관

 

 

 

 

 

 

 

 

 


해바라기가 있는정원]

- 1905~1906
- 캔버스에 유채, 110㎝×110㎝
- 오스트리아미술관

 

 

 

 

 

 

 

 

클림트는 경제적 여유가 있던 말년에 에밀리 플뢰게,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아테제 호수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곳은 빈에서 고요하기로 정평이 나있었는데, 클림트는 성격이 까다로워서 작업할 때 누가 방해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여 이 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클림트는 다양한 풍경화를 그렸다.

클림트는 풍경화에 절대 인물을 그려넣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모든 풍경화는 캔버스에 유채화, 110㎝×110㎝ 의 정사각형 구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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