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와 인간 본성을 진화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인 <오래된 연장통> 출간을 기념하여 지난 2010년 1월 21일(목) 저녁 7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강남출판문화센터에서 특별한 대담회가 열렸습니다. <오래된 연장통>의 저자이자 한국인 최초의 진화심리학자인 전중환 박사와 인터넷상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책벌레(파워블로거)들이 모여 진화심리학에 대해 궁금한 사항들을 묻고 답하며 ‘인간 본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인 자리였습니다.
대담회는 도서 평론가이자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2.0>의 저자인 이권우 선생님의 사회로 진행이 되었고,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저자이자 인터넷 서평꾼인 이현우 선생님(인터넷 필명 로쟈)께서 파워블로거 및 소장 인문학자를 대표하여 전중환 박사와 불꽃 튀는 대담을 나누셨습니다. 두 분의 대담 이후에는 파워블로거들이 직접 저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자료 제공 : 사이언스북스 편집부
간략하게 저자가 <오래된 연장통>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본격적인 대담이 시작되었습니다.
‣ 전중환(저자): 이 책은 APCTP(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에서 발행하는 웹진 '크로스로드(Crossroad)'에 연재된 글들을 바탕으로 새롭게 씌어졌습니다. 진화심리학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기존에 번역 출간되어 있는 진화심리학의 묵직한 입문서(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 등)들과는 차별화된, 진화심리학의 응용적인 측면을 주로 다룬 책입니다.
즉 진화심리학적인 시각이 어떻게 전형적인 인간의 심리학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유머, 도덕, 종교, 예술, 사회 문화 현상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이 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아직 많이 소개가 안 되었지만 그동안 진화적인 시각이 여러 분야들에 응용, 융합되면서 많은 새롭고 재미있는 분과 학문들이 탄생했습니다. 재미있게 공부하고 연구했던 내용들을 국내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이 책을 썼습니다.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대표 책벌레답게 국내에서는 아직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소개조차 되지 않은 1990년대에 이미 해외 언론 매체를 통해 진화심리학을 접하시고 <도덕적 동물>을 필두로 진화심리학이나 사회생물학 관련 저서들이 나오는 즉시 구해서 읽으셨다고 합니다. 진화심리학에 대해 평소 관심이 대단하신지라 이번에 출간된 <오래된 연장통> 또한 무척 꼼꼼히 읽으시고 진화심리학과 관련해서 궁금했던 사항들을 다수의 질문지로 준비해 오셨습니다.
‣ 이현우(로쟈): 국내에는 진화심리학이 주로 연애나 살인 등과 관련된 번역서들이 많이 나와 있어서 그쪽 분야들을 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실제 현재 연구 경향은 어떤지, 그리고 앞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는 무엇이 있는지요?
‣ 전중환(저자): 진화심리학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있는 분야가 짝짓기나 협동 등이고, 그에 비하면 덜하지만 순위나 우열 행동, 공포 같은 물리적 환경에 대한 적응들에 대해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소개되어 있지만 문화에 대해서도 진화적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고요. 흔히 진화심리학이 인간 보편에 대해서만 연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격이나 지능 같은 개인들 간의 차이에 대해서도 최근 활발히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진화심리학이 앞으로 보다 발전하기 위해서 풀어야 할 과제는, 사실은 공부해야 할 게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진화심리학이 진화생물학과 영장류학, 인류학, 인지과학, 뇌과학 등 여러 학문 분야들이 한데 모여 인간 본성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범학문적, 통섭형 과학이다 보니 진화심리학적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학문들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은 것이죠. 사실은 진화심리학자들도 이를 어떻게 교육 과정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여전히 인간과 관련해서 생물학적 설명이 조금만 들어가도 유전자 결정론을 떠올리며 그것을 즉각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생물학 공포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게 최대 과제가 아닌가 합니다.
‣ 이현우(로쟈): 유전자 결정론을 말씀하셨는데, 진화심리학과 관련해 가장 흔히 등장하는 비판이 바로 “진화심리학도 환경보다는 본성 내지는 유전자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는 유전자 결정론의 일종이 아닌가.”일 듯한데요, 이는 먼저 사회생물학에 대해 제기된 비판이었지요. 다윈주의 우파에 악용되기도 한 것인데, 말하자면 강간이나 폭력 같은 것도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것이니까 그런 식의 본성을 강조함으로써 현재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데 일조한 것이 아닌가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장 흔한 오해니까 이에 대해 해명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 전중환(저자): 예를 들어, 남자들이 예쁜 여자랑 바람피우게 하는 형질이 있다라면 진화심리학이나 사회생물학은 그 형질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모든 오해가 비롯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생물학자나 진화심리학자들도 바람피우는 일과 같은 복잡한 행동을 하나의 유전자가 결정한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어떤 A라는 형질이 있다면 A라는 형질을 결정하는 A라는 유전자가 있다, 자, 설명 끝!”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유전자 결정론이지요. 그러나 바람을 피우는 것과 같이 복잡 정교한 형질이라면 그것이 과거의 진화적 환경에서 어떻게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진화심리학입니다. 개체 발달의 차원에서도 개인의 일생을 통해 개인의 행동적인, 심리적인 측면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너무나 당연히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의 영향을 받습니다. 유전자 중심의 관점을 중시하는 이유는, 종이나 생태계 차원이 아니라 유전자 수준에서 수백만 년, 수억만 년이라는 거대한 스케일 아래 자연선택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강간이나 폭력을 자연적인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과학은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지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진을 연구함으로써 지진이 일어나기에 앞서 대피하거나 방제하려고 하는 것처럼, 진화심리학자들도 강간이나 폭력 같은 사회악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진화적 근거를 갖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연구하는 것입니다.
진화심리학과 관련해서 가장 흔히 제기되는 비판이 유전자 결정론이다 보니, 이에 대해 사뭇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들이 오고갔습니다. 그리고는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레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로 옮아갔습니다.
‣ 이현우(로쟈): 이 책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윌리엄 제임스의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본능이 더 적어서가 아니라 더 많아서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공감을 표하신 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본능은 복잡한 적응의 산물이다, 즉 인간 본성의 특정 측면이 어떤 적응적인 이득을 갖고 있고 그래서 진화되어 왔다라고 설명하셨거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적응의 산물도 있고, 일종의 부산물, 내지는 부작용도 있다고 책에 쓰셨습니다.
예를 들어 스티븐 핑커는 음악이 부산물이라고 했다지요. 책을 읽거나 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부산물이라고요. 즉 인간은 책을 읽거나 쓰기 위해 진화되어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연 음악이나 책이 없는 인간을 우리가 오늘날 상상할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습니다. 적응의 산물과 부산물을 식별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가령 책에서 종교도 부산물, 부작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인간의 본성이 바뀌지 않는 한 종교도 영원할 것이라고 언급하셨지요. 제거될 수 없는 부산물이라면 인간의 본질적인 특징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 전중환(저자): 본능이라는 말이 워낙에 고정적이고 변화 불가능하고, 진화가 덜 된, 덜 떨어진 것의 의미로 기존에 쓰여지고 있어서 저는 최근에는 잘 안 쓰려고 하는 편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기존의 사람들이 생각하던 의미가 아니라, 말하자면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과 같은 의미로 본능을 생각했습니다. 진화의 결과에 의해서 우리 종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갖게 된 신경 회로가 본능이라는 것이지요. 즉, 진화심리학자들이 본능이라는 단어를 쓸 때에는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을 뜻합니다. 스티븐 핑커가 ‘언어 본능’이라고 이야기했을 때에는 언어가 자연선택에 의한 생물학적 적응이라는 의미인 것이지요.
적응과 부산물을 구별하는 기준은, 적응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자연선택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니까 책에서도 썼듯이 설계상의 특질을 보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종교가 적응이라면, 그래서 만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숭배하기 위한 기작에 의해 형성된 본능이라면, 전 세계 모든 종교들에서 자기들이 숭배하는 신을 윗사람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현상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산물은 반면에 그 자체로는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진 않지만 우연히 결부된 것을 말합니다. 탯줄은 엄마가 자식에게 영양분을 주기 위한 기능이니까 즉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던 적응입니다. 그러나 탯줄이 있었던 자리인 배꼽은 어떠한 설계상의 특질도 보이지 않는 부산물인 것이지요.
‣ 이현우(로쟈): 더불어 적응의 부산물과 관련해서 오작동이라는 것도 있는 것 같던데요. 예를 들어, 질투라는 감정을 진화의 유력한 산물로, 즉 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워 유전적인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미리 예방해 주기 때문에 진화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방의 효과가 있는 반면, 의처증이나 의부증처럼 과도하게 오작동이 되어서 오히려 이혼과 같은 손실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작동적인 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전중환(저자): 오작동도 사실 중요합니다. 진화심리학이 강조하는 바가, 인간이 진화해 온 과거의 환경과 현대의 환경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포르노그라피나 마약이나 게임에 대해 중독 현상들이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여러 방향으로 오작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단 한 가지로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는 방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과거에 진화해 온 환경과 다른 새로운 낯선 환경에 처하게 되면서 오작동이 되는 경우입니다. 과거에는 단 것에 대한 선호가 필요한 열량을 섭취한다는 점에서 적응적일 수 있었으나 24시간 편의점과 카페 등에서 손쉽게 단 것을 구할 수 있는 현대 환경에서는 오히려 비만과 같은 질병을 유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의미에서의 오작동도 있는 듯합니다. 암컷 고릴라가 우리에 떨어진 인간의 아기를 잡어먹기는커녕 자기 아기로 오해해서 다정스럽게 보살피는 바람에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의 오작동인 것이지요. 원래는 고릴라의 아기를 잘 보살피게끔 진화된 고릴라 어미의 심리 메커니즘이 유사한 인간 아기에 대해서 오작동을 한 것입니다.
심리적인 적응이 모든 상황에서 완벽하게 적응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균적으로 적응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잘못 작동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작동과 문화를 관련지은 진화심리학적 논쟁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사회자인 이권우 선생님께서 문화, 문명이 인간 정신의 오작동인가라는 질문들을 던지셨고 이에 대해 전중환 박사는 오히려 문화의 많은 경우에서 적응이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멋있다고 생각하는 패션이나 말버릇 등을 따라하는 심리 메커니즘도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 이현우(로쟈): 오작동과 관련해서 보충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요즘 아이돌이나 연예인에 열성적인 팬덤 현상이 흔히 나타나고 있는데요, 이는 일반적으로 예쁜 여자나 잘생긴 남자에 대해 갖고 있는 선호가 오작동이 되는 경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내 주변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에 나와는 전혀 이해관계가 없지요. 진화심리학 책을 읽고 책 소개를 하는 강연에서 오작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는데요, 이게 맞게 설명을 한 것인지요?
‣ 전중환(저자): 네, 정말 잘 설명하셨습니다. 실제 우리 마음은 기껏해야 100명에서 200 정도의 혈연 중심의 소규모 수렵채집사회에서 잘 작동하게끔 설계되었습니다. 그 옛날에는 김태희처럼 정말로 비정상적으로 예쁜 사람은 100명 정도로 이루어진 집단 내에서, 그리고 가끔 이웃 집단 사람들을 만나는 상황에서는 정말 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처럼 텔레비전을 통해 너무나도 예쁘고 멋진 연예인들을 일상적으로 만나는 경우에 오작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연예인 가십 기사에 열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뒷담화를 즐기는 것 자체는 적응적입니다. 과거 소규모 사회에서는 같은 동네에 사는 오늘날의 김태희와 동급의 마을 최고의 미녀가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더라 등등은 매우 중요한 정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마찬가지로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나에게 전혀 도움도 안 되는 연예인의 가십에 열광하는 오작동을 낳은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흔히 부딪히는 각종 사회 문화 현상들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설명들로 대담은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진화는 아주 오래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진 티라노사우루스의 발톱을 설명하는 데에나 쓰일 구닥다리 개념이라는 통념을 뒤집고 우리와 아주 밀접한 일상사들까지 명쾌하게 설명하는 매우 유용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소장 인문학자이자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신 이현우(로쟈) 선생님의 깊이 있는 질문과 유머러스하고 패기 넘치는 젊은 진화심리학자 전중환 박사의 성의 있는 답변으로 <오래된 연장통>이라는 책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진화심리학 전반에 대해 개괄하는 무척 유익한 대담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젊은 인문학자와 진화심리학자의 만남이 앞으로 진화심리학과 인문학의 화해를 모색하는 데 주춧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이현우(로쟈): 저는 평소에 진화심리학이 빨리 더 많이 소개되고 진화심리학적 인식들이 더 많이 공유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현재의 인문학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문학자들이 인간에 대해 약간은 거품이나 편견 같은 것들을 갖고 있는데 그것들을 좀 걷어 내야지 인문학도 조금 더 진전된 앎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