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8월 6일 새벽. 원고마감은 2시간을 넘겼고, 한 줄도 쓰지 않은 또 다른 원고들이 줄지어있으며, 온도계는 32도를 가리키고, 선풍기는 더운 숨을 뱉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주저 없이 “해도 너무 한다”는 말을 내뱉었을 상황. 그렇지만 나는 입을 다문다. 그것이 언어의 오남용임을 깨달은 것이다. ‘해도 너무함’의 정수를 몸소 보여주시는 높은 분들 덕분이다. 이제 알았으니까 제발 그만하셨으면, 바랄 뿐. 이대로라면 언젠간 이 지면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무한 반복) 너무 한다”로 채워야 할 것만 같아 두렵다. 어휘가 부족한 탓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글은 무력하다고. 김훈 선생은 한 인터뷰에서 <근사록>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공자의 논어를 읽어서, 읽기 전과 읽은 후나 그 인간이 똑같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아마, 나는 구태여 할 필요 없는 독서를 해온 모양이다. 읽어 온 것과 현실을, 아니 나 자신을 도무지 조화시킬 수 없으니. 그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마치 자일리톨을 소화시킬 수 없는 충치균이 계속해서 자일리톨을 먹듯. 그리하여 충치균은 굶어 죽고, 아직 살아있는 서점 직원은 여전히 무력한 독서를 한다. 

  <괴짜사회학>의 저자 수디르 벤카테시 역시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그는, 설문조사를 위해 무턱대고 찾아간 흑인빈민가에서 갱단 보스 제이티를 만난다. 우연한 만남. 박사 논문 주제를 찾고 있던 수디르와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줄 외부인을 찾던 제이티는 학생과 갱이라는 신분차를 넘어 의기투합한다. 경찰도, 구급차도 오지 않는 빈곤의 섬. 어떤 이론도, 어떤 논문과 통계도 설명할 수 없는 땅에 제이티의 도움으로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빈민가의 경제는 마약과 섹스를 기초로 돌아간다. 갱단은 마약을 파는 동시에 일종의 경찰 노릇, 보호자 행세를 한다. 투표로 선출된 주민대표는 부패한 주택공사와 결탁해 중간에서 이익을 챙기지만, 그들 역시 국회의원 노릇을 한다. 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주택공사의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여자들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섹스와 식료품, 공산품을 교환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지만, 정작 주민들은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그런 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 국가의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한 구석, 마치 경계선처럼 커다란 공터 가운데 세워진 흉물스러운 고층 공영주택단지에 빈민들을 몰아넣은 것은 바로 정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갱단과 주민대표마저 사라진다면 그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철저한 혼란뿐임을, 그들은 아는 것이다. 일종의 차악次惡인 셈이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주민대표 베일리 부인과의 대화다. 수디르는 최근 통계자료를 들먹이며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다면 빈곤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25퍼센트라는 것. 그러자 부인이 말한다. “만약 자네 가족이 굶주리고 있고 내가 자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어쩌겠나?” 당연히 가족들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때까지 학업을 미루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대답하는 그에게 부인은 되묻는다. “하지만 자넨 학교에 다녀야 하잖아, 안 그런가? 그게 자네를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테니 말이야.” 이토록 책은, 막연한 일반론과 비정한 현실 사이에 낀 수디르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것은 물론 그만의 딜레마는 아닐 것이다.

  외부의 시선으로 들어간 수디르는 10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마침내 내부의 시선을 이해하게 되지만 마지막까지 그 둘을 조화시키지는 못한다. 물론 빈민가에 대한 그의 논문은 호평을 받는다. 그리하여 수디르는 촉망받는 연구자가 되고, 빈민가는 고급주택단지를 조성하려는 주정부에 의해 철거되며 막을 내리는 것이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근본적인 문제들과 약간의 희망, 커다란 부채의식만을 남긴 채.

  그리하여 책장을 덮은 나는 불평한다. 아, 대체 어쩌란 말이지. 뉴스에선 끊임없이 말도 안 되는 소식들이 들리고, 나는 촉망받는 연구자가 될 일도 없는데, 답도 없이 책이 끝나버리다니. 하지만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만병통치약은 없고, 정답으로 보이는 것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하는 수디르의 고민은 정직하고, 약점을 숨기지 않는 이 책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김훈 선생의 말처럼, 책에서 기대해야 할 것은 답이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엇임을. 그래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다. 나는 훌륭한 독서가는 아닐지 모르지만, 훌륭한 독서가들에게 좋은 책을 권할 수는 있을 거라고. 이것이 얼마만큼의 ‘타협’인지는 아마 결코 알 수 없겠지만. 세상에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도 솔직히 모르겠지만.

  목구멍은 포도청이고, 어느덧 해가 밝아 온다. 가자, 출근 시간이다.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 9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12월 21일 오전, 마감 시간이 임박한 원고를 겨우 넘겼고, 한 줄도 쓰지 않은 다른 원고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수은주는 영하를 가리키고 있고, 설상가상 온풍기는 서늘한 바람을 뱉어내고 있다…. 워낙 많은 일들이 끊임 없이 일어나는 사회인지라 글을 쓸 당시 무엇 때문에 '해도 너무함'의 정수라는 표현을 썼는지는 잊었지만(나랏님들 얘기다). 여전히 해도 너무한 일들은 차고 넘치시니 상관은 없겠다.

한 때는 모든 일에 답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답이 중요할 뿐 과정은 별 소용 없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잘 모른다. 답이 있는지, 과정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기에 말 할 수 없고, 말 할 수 없기에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김훈이 말하는 끔찍한 동어반복이다)

<괴짜사회학>은 재미있는 책이지만, 아무래도 사회학이라고 하기엔 좀 억지스럽다. 사회학자가 쓴 논픽션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리라. 미국식 서지사항을 따르자면 실제로 그렇다. 원제는 "Gang Leader For A Day" 하루만 갱단 두목이 되어 보기. 실제로 수디르는 일일 갱두목 체험을 한다. ㅋㅋ

나는 여전히 저 책의 마지막이 속상하다. 어린 시절 무라카미 류의 <69>의 에필로그를 보고 불편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작가가 된 류는, <69>의 공동 주인공인 친구가 찾아오자 차갑게 식은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별 말 없이 앉아 있다가 돌려 보낸 후 그 커피를 한 모금 마셔보고 후회한다) 물론 그 시절 <괴짜 사회학>을 읽었다면 그다지 불편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처음 <69>를 읽었다면 불편해하지 않았으리라.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문장은 장기하의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고작해야 한탄할 것이 '밥벌이의 지겨움' 뿐이라는 사실은 조금 민망하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조건. 그런 면에서 밥벌이의 지겨움과 그 도리 없음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김훈은 위대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차피 세상 다 산 어른의 것이 아닌지. 그런 의미에서 (나를 비롯한) 김훈에 감탄하는 젊은 세대는 너무 조로했다. 살아보지도 않고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그것을 이제야 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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