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는 이렇게 시작한다. 인터넷서점 인문MD에게 폐허는 좀 더 구체적인 담론으로 다가온다. 문학의 종언, 인문학의 몰락, 영화의 위기, 출판의 불황…

  문학은 잊고, 인문학은 버리고, 영화는 끊고, 출판계를 떠난다고 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 촉발된 금융위기는 여전히, 모호하지만 강력하게 우리의 일상을 흔든다. 지구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삶은 황폐해지며, 문화는 빈곤해진다. 설상가상 마야인이 예언한 지구멸망은 2012년. 전세계가 폐허를 목전에 둔 셈이다.

  ‘모두 알다시피’ 철학계의 마돈나 슬라보예 지젝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파국과 함께 살아가기”라 표현한 바 있고, (‘모두 알다시피’ : 고대 그리스의 수사법에서 전승된 표현의 하나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갑시다”란 뜻) ‘두 말 할 필요 없이’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먼은 ‘유동하는 공포’라는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 “꼬치꼬치 캐물어봤자 더 이상 아는 게 없다”라는 의미의 시크한 제스쳐 혹은 지친 가장의 언어)

  물론 지젝과 바우먼의 ‘탁월한’ 분석 외에도 수많은 담론들이 존재한다. (‘탁월한’ :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럴듯해 보임”을 뜻하는 현대 저널리즘 용어)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에서부터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이야기 되는 담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온갖 고담준론으로 가득한 세계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담론도 오늘,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 단군 이래 최저학력이 나날이 갱신되는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너무 똑똑하다. 낯선 이론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평론가들과, 그들의 말에 코웃음 치는 대중 모두. 그렇기에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뿐. 그것은 물론 깊은 냉소주의의 언표다.

  그리고 여기, 김훈이 있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김훈이다.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일 수 있다고,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김훈은 굳이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김훈을 읽으며 아름답지 않은 자신에, 나은 세상에 손을 보태지 못함에 자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가르치지 않는다. 냉소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을 통해 몸으로 배운 것을, 비루함과 치사함과 던적스러움에 대해, 들려줄 뿐이다.

  펜으로 꾹꾹 눌러 뒷장에까지 자국이 남아있는 <공무도하> 사인본을 앞에 두고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강 이편의 폐허를 단지 외면하기만 한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러니 우리는, 공허한 말을 내뱉기를 그치고 먼저 김훈이 그려낸 풍경을 껴안아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김훈의 정치성’ 혹은 ‘김훈 소설의 성취’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나는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더러움, 비열함, 희망을 쓸 것이다”라던 그의 말은 그래서 내게, 자신이 써 올린 먹이와 슬픔과 더러움과 비열함 위에 누군가 희망을 써주기를 바라는 늙은 작가의 간절한 바람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또한, 아무 도리 없는 희망일 것이다.

- 무비위크 401호



무비위크에서 격주로 글을 쓰게된 건 사실, 좀 신나는 일이었다.
여기 이 서재나, 인물과사상과는 달리 '인문/사회'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문제도 있었다. 도무지 무엇을 써야할지 알 수 없었다는 것.
제가 알라딘에서나 인문MD죠...

그래서 생각난 게 김훈. 나도 모르게 100% 직설적인 제목을 쓰게 되었다.
(책 소개가 정말 아닌 걸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이 글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일단 인문MD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웃음), 김훈에 대한 팬심(?)도 넣고 싶었다. 
물론 제대로 맞아 돌아갈리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냉소주의의 언표다'와 다음 문단 '그리고 여기, 김훈이 있다' 사이의 비약이다.
사실 어느 정도는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뭐랄까, '목숨을 건 도약' 같은 느낌으로 (ㅋㅋ)

'뼈아픈 후회'로 시작해서 '도리 없는 희망'으로 끝나기 위해, 내겐 꼭 그만큼의 도약이 필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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