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k Noja - in Dusseldorf Airport - face only - May 2008, 사진제공 : 박노자)
박노자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 도서팀에 근무하고 있는 금정연이라고 합니다. 인문, 사회 분야를 담당하고 있어요. 먼저 인터뷰 메일이 조금 늦은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인터뷰는 저희에게 일종의 가외 업무거든요. MD란 이름처럼 merchandising, 즉 책을 판매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업무가 바빠 메일을 미룬 것은 아니었어요. 물론 업무는 바빴지만 그와는 별개로, 도무지 질문거리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를 읽고, <후퇴하는 민주주의> 중 선생님의 강연 부분을 아무리 읽어도, 머릿속만 복잡해질 뿐 구체적으로 잡히는 질문은 없었어요. 너무 커다란 의문들, 도무지 답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의문들 밖에. 그런 질문을 드리는 것은 물론 예의가 아니겠죠.
실은, 이 인터뷰는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일련의 사회적인 사건들이 오늘 이 사회를 살고 있는 저를 너무 괴롭게 했고 그와 동시에 생활인으로서의 하루하루가 저를 너무 지치게 했어요. 물론 많은 이들이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고, 따라서 이런 말은 그저 유치한 투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투정을 부리기 싫었던 거예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업무(물론 가외업무지만)를 가장한 이메일을 통해서.
그래서 실은, 직접 만나 뵙고 인터뷰를 하고 싶었습니다. 얼굴을 맞대면, 더 이상 생면부지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요. 더듬더듬, 거대한 의문들의 꼬리라도 잡아 내어놓으면 무언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테고, 그렇다면 가외업무에 미숙한 MD라도,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아리아드네의 실을 더듬는 테세우스도 아니면서.
그럼에도 이 설익은 질문들은 보내지겠지요. 속에서 끓고 있는 생각들, 의문들을 좀 덜어내야겠다는 생존본능과, 밥값은 해야겠다는 의무감과, 선생님이라면 어떤 말씀을 해주실 거라는 기대감이 공존하는 질문지가. 그래도 언짢아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조금 이상한 인터뷰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잘못 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는 따끔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쩐지 정말 선생님께 숙제를 제출하는 기분이네요)
고맙습니다.
알라딘 : 사회구조에 관한 담론들은 모두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각자의 관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박노자 : 저는 인간에게 그 어떤 정해진 “본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일개의 동물이지만 여타 동물들과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좀 다릅니다. 예컨대 보통 동물들은 동종을 죽이지 않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살인”이란 거의 그 역사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은 여타 동물들과 달리 그 존재의 유한성을 절감할 수도, 자기 자신을 상대화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악의 능력도 자기 지양의 능력도 여타 동물에 비해 월등합니다. 결국 선 내지 악으로 인간을 유도하는 것은 복합적 의미의 “상황”이라고 봅니다.
알라딘 : 성악설, 성선설, 성무선악설 같은 고전적인 인간관 외에도, 뇌과학과 인지신경과학 등의 발달로 과격하게는 자유의지란 없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합니다. (인문, 사회과학과 함께 자연과학 분야까지 담당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해당 분야에선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인간의 이성은 믿음직한 도구가 아니’라는 관점이 팽배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런 주장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과학은 물론 절대진리가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 정말로 이런 주장들이 사실로 인정된다면,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할까요?
박노자 : 인간의 이성의 한계란 몇 가지 엄연히 있습니다. 첫째, 감정, 특히 집단적 공포 내지 혐오 등이 개입되면 인간은 맹수 이상의 맹수가 됩니다. 둘째, 정보 보유량의 제한과 고정관념에 의해서 이성을 십분 활용하지 못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보통 시장경제 이외의 그 어떤 경제 시스템도 잘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우리의 모든 “이성적” 판단을 그 틀 안에서 하지만, 사실 이것도 하나의 고정관념입니다. 시장 경제에 대한 대안 관련의 정보 및 인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알라딘 : 책이 출간되고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찔할 정도로 커다란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쌍용차, 미디어법 등) 그럼에도 분노한 ‘개인’들만이 존재하는 것은, 블로그에서 언급하신 그대로 ‘파편화된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수전 손택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모든 매체들이 ‘클릭수’만을 위해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기사들을 뽑아내는 사회에서 어쩌면 고통은 그저 소비되고 마는 게 당연할지 모르겠습니다.
‘대듦’의 정신이 사라진 대학생들의 예처럼,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 세상을 사고할 새도 없이 경쟁의 장에 던져진 채 자본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교육과 미디어는 시간이 갈수록 그런 경향에 불을 지피겠지요. 그렇다면 다음 세대의 삶은 어떨까요? 자본을 매개하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고, 자본 이외에는 욕망할 수 없는 사회에 희망이 있을까요?
박노자 : 모택동의 유명한 말 대로 “억압이 있는 곳에는 늘 저항이 있다”는 건 역사의 철칙입니다. 단, 억압의 강도와 종류에 따라서 저항의 방법도 천차만별이 됩니다. 예컨대 시위 등이 불가능한 북한에서는 유망, 국외 탈주, 불법 복제된 한국 내지 중국 비디오 시청 등은 주된 저항 방법으로 이해됩니다. 남한의 경우에도 자본의 질서에서 배제되거나 하위배치된 인간들은 분명히 가만히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앞으로 예컨대 지방대 학생들은 새로운 저항의 선봉에 설 듯합니다. 이 시스템에서 그들로서 비정규직조차 되기 힘들고, 이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노비 문서” (지방대 학력)에 의해서 어차피 평생이 망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컨대 실업자 박사나 시강 강사 등 자본주의적 앎의 질서에서 소외를 당한 이들은 앞으로 수유연구실과 같은 대안적 앎의 공간을 더 만들 가능성도 큽니다. 발버둥쳐서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는 건 인간 생명의 기본 원칙인데 말씀입니다.
알라딘 : 죽음은 이제 가장 좋은 상품이 되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요. 문제는, 애도조차 소비의 형태로 소비되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엔 도대체 소비되지 않는 게 무엇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인문사회과학서적이라는 ‘상품’을 다루는 merchandiser로서 인문사회 분야의 침체는 당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수많은 ‘상품’ 중에, 같은 돈을 주고 고민을 사들이려는 사람은 적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같은 돈이면 즉각적인 감동과 재미, 위로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나아가, 인문사회과학서적의 어떤 독자층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의문을 인문사회서적을 구입하는 행위로서 소비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그런 책을 읽는 고행(?)을 통해, ‘나는 의식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위안을 얻고 동시에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데 아무래도 불편할 생각들을 해소하는 것이지요.
조금 바꿔 말하자면, 정체성을 소비를 통해 구현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예술 영화를 보고 고급스러운 전시회를 찾아다니듯, 흔히 어렵다고 여겨지는 인문사회과학서적을 구입하는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려는 목적이 더 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너무 비관적인 생각일까요?
박노자 : 분명히 그런 부분은 있습니다. 노르웨이 사회만 해도 청소년 사이에서 촘스키를 읽고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팔레스타인 지지 데모에 다니는 것을 괴장히 “쿨한” 행위로 통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문제의 내용에 대한 충분한 파악 등도 없이 “집단 정체성에 자기를 맞추어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지요. 미국에서 흔히 쓰는 표현대로, “반대의 상품화” (commercialization of protest)입니다.
여기에서는 예컨대 진보정당 등은 “진정한 반대의 조직자” 역할을 해야 하는 부분은 있습니다. 진보적인 인문교양서를 읽어 감동 받은 독자가 단순히 “나는 진보다”라는 의식을 단순히 자기 위안 내지 자기 차별화 전략으로만 삼지 않으려면 그 후에 진보정당이라든가 진보 단체 등에 가입하여 구체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실, “활동”/”실천”이야말로 진보의 진정성의 시금석일 것입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 프랑스 등과 달리 – 아직도 진보 정치 등을 쉽게 일상 속에서 접근하기가 힘들어서 문제입니다.
알라딘 : 스스로에게 위 질문을 던졌을 때 단숨에 ‘아니’라는 대답을 할 없었습니다. 아마도, 분야 및 직업의 특성상 너무 오래 그런 책들을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일을 하기에는 사실 시간도 없고 피곤하다… 는 그저 변명일 뿐인 변명을 하면서.
그렇다면, 이 사회에 의문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하지만 생활을 위해 지금 갖고 있는 직업에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야 되는 생활인으로서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박노자 :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관심”이란 여러 가지 방면으로 “실천”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지요. 진보적 NGO를 위해 약간의 금전적 기여를 한다든가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을 일삼는 언론이나 그 언론에 광고를 내는 기업에 항의 전화 하나 건다든가… 작은 일 같지만 수천 명, 수만 명이 같이 하는 작은 일은 바로 큰 일이 됩니다. 그 “공동의 관심”의 영역이란 사라지면, 우리가 사회가 곧 무너지고 맙니다. 그리고 “관심”을 갖는 것은 바쁜 삶 속에서도 가능하지요.
알라딘 : 저작권법이 강화 되었습니다. 아직 정확한 실체 없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소문들은(확인하고 싶었지만 다들 하는 말이 달라서) 개인의 블로그에 영화 스틸이나 노래 가사를 올리는 것도 위법이라고 하는데요.
얼마 전에, 한 게시판에서 불법음원에 대한 포스팅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어느 분이 “이제 노래도 듣지 말라는 거냐”고 툴툴 거리자, 다른 분이 “노래는 안 들어도 안 죽는 거 아니냐. 돈 없으면 듣지 마라”고 댓글을 달았지요. 얼핏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인데, 가만히 생각하니 혼란스러웠습니다.
문화는 하나의 공공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러니까, 누구나 밥을 굶지 않는 사회가 옳은 사회 듯 누구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사회가 옳은 사회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작권자의 권리 또한 보호해주는 것이 맞는 것 같고.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책의 저자라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박노자 : 제 생각 같으면 공공 재정으로 이루어진 연구의 결과물 등은 당연히 공공재임으로 저작권을 주장할 일은 없습니다. 예컨대 노르웨이 납세자 돈으로 운영되는 제 대학에서 제가 혈세로 이루어지는 노르웨이 학진의 연구비를 받아 논문을 썼으면 그 논문을 당연히 그냥 누구나 접속이 가능한 제 학교 사이트에 게재합니다. 학술저널에도 게재하지만, 그 저작권과 무관하게 공공재로 활용하자, 이것입니다. 그런데 공공 재정이 아닌 “시장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소설작가나 음악가 등은, 아무래도 저작권법을 뛰어넘기가 힘들 수도 있어요. 만약 어느 정도 살 만한 수입이 일단 확보되면 이 분들도 자신의 저작물을 공공재로 활용할 것을 권고할 수 있지만, 요구하기가 좀 힘듭니다. 시장 경제로서의 제약이지요.
알라딘 :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해야 한다는 것에는 크게 공감합니다. 하지만 자본에 의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에서 생계를 꾸려가는 직장인으로서 상충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같은 상품을 공급하는 A, B, C 라는 업체가 있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A와 B는 원가 절감을 단행하여 가격을 인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방식은 하청업체나 비정규직에게 부담을 돌리는 방식이죠. 그래도 신조가 있던 C 회사는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으나, 점점 더 채산성이 악화됩니다. 같은 방식으로 가격을 내리거나, 혁신적인 무언가를 찾아내지 않으면 회사는 문을 닫을 것입니다. 물론 혁신적인 방법은 찾을 수 없지요. 그런 상황에서 C 회사는 직원들이 모여 회의를 합니다. 이때, C 회사에 다니는 직원은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요?
박노자 : 이러한 상황이라면 “일체 직원의 동등한 자진적 임금 삭감 및 같은 비율로서의 기업주의 이윤 포기” 정도면 가장 정당할 듯합니다. 희생을 당하자면 기업주와 노동자들은 같은 비율로 희생을 치르고 (예컨대 15% 감봉 및 15% 이윤 포기), 다들 그대로 “정규직”으로 남는 것은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원칙상 과도한 출혈 경쟁, 부당한 단가 내리기 압력 등을 공정거래위원회 등 공공 기관에서 단속을 해서 행정지도를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그러한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게 해야지요.
알라딘 : 여전히 작은 회사에서 노조는 유명무실한 존재입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직장인들에게 노조의 필요성을 말씀해 주세요.
박노자 : 노동력의 공급이 수요보다 늘 많은 통상적 노동시장에서는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와 노동력을 사는 기업주는 원천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노동자는 약자일 수밖에 없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표방할 만한 힘은 보통 없습니다.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수십만 명의 “예비노동군”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노조라는 연대 형식이 아니라면 노동자의 인생은 늘 “울면서 겨자먹기”입니다. 당하지 않으려면 노조를 필수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알라딘 : 좋은 세상이 오기 위해선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믿음과 개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믿음이 오래도록 대치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박노자 : 구조를 바꾸기 위한 투쟁 속에서 개인들도 바뀝니다. 예컨대 월남 전쟁 반대를 외치거나 흑인 시민 운동 투쟁을 전개했던 사람들을 지금 봐도 보통 알아볼 수 있지요. 투쟁 시절로부터 남은 “열정”, “관심” 남에 대한 “배려” 같은 걸 엿볼 수 있지요. 그런데 반동적인 보수화의 시대에 개인들도 잘 바뀌지 않아요.
알라딘 : “역사의 ‘진보’는 늘 인간의 ‘선’인가”라는 꼭지에 이안 감독의 영화 ‘색계’에 대한 단평이 있습니다. “왕치아즈와의 섹스에 탐닉하게 된 반민족분자 리가 결국 선물 공세 등의 방법으로 왕치아즈로부터 자백을 끌어내”라는 부분에서 조금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는데요.
반민족분자 리가 왕치아즈와의 섹스에 탐닉하게 되는 것은, 어떤 사랑의 절망적인 한 행태가 아니었을까요? 또한 선물 공세는, 자백을 끌어내기 위함이 아닌 반민족분자이지만 또한 장기판의 한 졸(말 정도 될까요?)일 뿐인 한 망가진 자신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모든 이들이 가련하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알량한 신념을 위해 사랑하는 여인을 미끼로 이용한 무능한 남자 쾅유민, 반민족분자로 악마적 명성을 얻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에는 무력한 남자 리, 격동의 시대 속에서 인간답게 살고자 하지만 이념과 사랑 모두에게 배신당한 왕치아즈. 이 세 명의 인물을 통해서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듯이.
박노자 : 네, 그 영화에서는 제가 바로 이 부분을 배웠어요. 순전한 피해자도 순전한 가해자도 없다는 사실, 폭력의 역사는 결국 가해자도 피해자로 만들고 선인에게도 악인되기를 강요한다는 사실… 반민족 분자도 결국 그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주인들에게 언제가 “팽”을 당하게 돼 있고, 중국 국민당도 “항일 저항”과 “독재”/”광적 민족주의”과 같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결국 역사의 “복합성”을 배우게 하는 영화입니다. 흑백 역사관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되지요.
알라딘 : 직장 동료의 질문을 그대로 옮깁니다. “냉전과 사회주의 국가의 폐악을 목격한 당신은 자본주의 지배하의 북유럽식 사민주의가 현재로선 가장 인류에 적확한 차악으로서의 체제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이 북유럽식 사민주의의 도입이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점거한 국내의 정치 현안을 고려해봤을 때 얼마만큼 적용이 가능하다고 여기는가?”
박노자 : 네, 노동자들이 진보 (사회주의적/사민주의적) 정당을 만들어서 사민주의 제도를 쟁취할 만한 힘을 갖기만 한다면 차라리 그러한 제도는 지금의 세계로서는 차악입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를 보면 아시겠지만 주변부 국가에서는 사민주의적 변혁 (무상 의료 등)을 쟁취하기 위해 거의 “혁명”에 버금가는 대중적 동원은 필요합니다. 준핵심부인 한국은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어쨌든 사민주의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아요. 아주 힘든 투쟁의 결과죠.
알라딘 : 이번에는 다른 동료의 질문입니다. “백낙청씨가 이번에 책을 내면서 '한국에는 좌파의 구심점이 없다'는 점이 문제라고 했는데, 탈중심주의나 아나키 계열의 진보계열이라면 오히려 이 특징을 흥미롭게 받아들일 것 같다. 좌파의 구심점은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어디서 출발해야 할까.”
박노자 : 사상적으로야 당연히 좌파가 다원적일수록 좋지만 정치적으로는 구심점은 좀 필요합니다. 정치판에서는 “대중적 좌파 정당”이란 있으면 그래도 사민주의적 변혁을 향해서 한 발짝씩 나아가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그런 게 없다면 “북구식 사회 꿈”을 꿀 수도 없지요. 그래서 다양한 변혁 지향적 개인 및 단체들은 그 차이를 계속 간직하는 채 “통일전선”쯤을 만드는 쪽으로 가야 할 듯합니다.
알라딘 : 분위기를 바꿔서, 좋아하는 밴드(음악)는?
박노자 : 저는 거의 고전 (클래식) 음악만 듣습니다. 와그너와 스크랴빈, 사티를 제일 좋아합니다.
알라딘 : 러시아어로 읽는 도스토예프스키(혹은 고골, 체호프, 톨스토이, 푸시킨, 투르게네프)는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는 것과 어떻게 다른 가요?
박노자 : 어감이라는 건 다르지요. 상당부분의 “러시아적 표현”들을 한국어로 그대로 번역하기가 힘듭니다. 함의가 좀 달라서요. 물론 “한국적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의기 투합”, “비분강개”와 같은 표현들의 함의를 온전하게 담을 영어 내지 러어 번역어를 찾기가 힘들죠. 마찬가지로, 러시아어 “poshlost’” 같은 단어를 사전적으로 “속된”, “속물성”, “통속성” 등으로 옮길 수 있지만 “진짜 문화”와 “가짜 문화”를 구별케 하는 이 단어의 심층적 함의를 옮기기가 좀 힘듭니다. 사실, 자본주의 세계 소위 대중 문화의 99%는 이 “poshlost’”이라는 단어로밖에 성격 규정할 수 없습니다.
알라딘 : 마지막으로, 어쨌든, 그럼에도 이 시대를 살아내야만 하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박노자 : 세상의 역사에 좋은 시절이란 없습니다. 1980년대말까지의 독재 억압도 만만치 않았듯이, 오늘날의 자본의 억압도 사람을 거의 질식사시키는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민주화 운동이 결국 독재의 족쇄를 벗길 수 있었듯이 자본도 결코 불가항한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잘 싸워봅시다!
알라딘 :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 편집된 인터뷰는 9월 중 알라딘 저자 파일 란에 올라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