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간의 동원훈련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한 지난 금요일. 어김 없이 쌓여있는 책더미 사이에서 빛나던 단 한권의 책은 돌아온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었다. 도무지 교양이라곤 없는 인문MD가 "도대체 폴라니가 뭐라니?"라고 묻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적 기획의 파국과 글로벌 경제 위기 때문. 만사에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모양이다.  

("폴라니가 뭐라니?"라는 질문의 답은 사실 간단하다. "쟤 이름")

2000년에서 2008년 상반기까지 그를 언급한 중앙일간지의 칼럼은 두세 건에 불과하지만, 2008년 하반기부터 좌우를 가리지 않고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는 그 이름, 폴라니가 아직은 낯선 사람들에게 아래의 (가상) 문답은 그의 사상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애널리스트 : 우리 사무실은 고3 교실 같아요. 몇 주 뒤면 주요 경제 일간지에 '랭킹'이 발표되거든요. 업종별 애널리스트 순위가 매겨져요. 펀드매니저들이 애널리스트들을 평가해요. 인간이라는 상품에 공개적으로 등급을 매기는 거죠. 6개월에 한 번씩 있어요. 피가 말라요.

순위에 따라 연봉이 조정돼요. 공개되는 랭킹은 분야별로 5명 또는 10명인데, 요즘은 주식시장이 좋지 않으니까 10등 안에 못 들면 쫓겨날 각오 해야 돼요.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어요. 흔적이 없어요. 달팽이들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져요. 여의도를 아예 떠나는 것 같아요. 점심 때 밥 먹으면 병신이래요. (중략)

폴라니: 마르크스는 당신의 계급을 저주했겠지. 케인스는 당신 같은 금융분석가를 휘하에 부리려 했을 테고. 하이에크는 당신의 역할을 찬양했지만, 실제로는 그리 행복하지 않지? 당신의 노동이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 않다는 느낌, 이 경쟁에서 언제 밀려날지 두렵다는 느낌…. 인간의 그런 불안과 공포까지도 위로해주는 것이 진짜 경제학이야.

"시장을 사회에 착근시켜라." 내 이론의 핵심이야. 어떤 경우에도 ‘상품화’시키면 안 될 것이 세 가지 있어. 노동·자연·화폐야. 재화를 교환하는 시장은 필요해. 그렇다 해도 노동·자연·화폐를 시장에서 ‘자유방임’으로 거래하면 곧바로 재앙이 시작되는 거야.

- 한겨레21 753호 '시장을 의심하는 당신 떠나라, 폴라니의 세계로' 중에서 (강조는 인용자)

마르크스와 하이에크를 비판하고 그렇다고 케인즈주의도 아닌 폴라니의 사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전환>이라는 제목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거대한 전환'은 세 번의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말한다. 산업혁명을 거치며 늘어난 생산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시장이 바로 첫 번째 전환이고, 대공황과 양차 대전을 거치며 국가가 다시 시장에 개입해 보호 무역 등을 펼치게 되는 상황이 바로 두 번째 전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기는 바로 국가의 통제 하에 놓였던 시장이 다시금 통제를 벗어난(신자유주의의 역습!), 두 번째 전환의 말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 전환은 무엇인가? 소비자운동, NGO, 사회적 기업, 정치유권자 운동 등을 통해 정부가 아닌 시민사회가 시장을 통제하게 되는 전환을 뜻한다. 결국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국가(마르크스)도 시장도(하이에크) 정부(케인즈)도 아닌 '사회'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또한 "지금, 왜 폴라니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국가도 시장도 정부도 실패했으니까. "당신의 노동이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 않다는 느낌, 이 경쟁에서 언제 밀려날지 두렵다는 느낌"이 드니까. 이렇게 쓰고 보니 폴라니의 사상을 '위로의 경제학'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하다!) 

이상이 '교양 없는 인문MD'(TM)이 지금까지 귀동냥 하고 눈앞에 놓인 <거대한 전환>을 뒤젂이며 섭취한 엉성한 폴라니 요약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선생도 발문을 통해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하면서도 난해한 책의 내용을 몇 줄에 요약하는 일은 힘들고 또 아마도 그릇된 것이리라"고 고백하고 있는 마당이니 오늘은 여기까지. 이 이상을 인문MD에게 요구하는 일은 힘들고 또 명백히 그릇된 것이다.
 

 

 

 

 

 

 

폴라니가 궁금하지만 <거대한 전환>의 두께와 가격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 분들에게는 책세상 문고 고전의 세계로 출간된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를 권한다. 폴라니의 사상 가운데 핵심적인 글 다섯 편을 추려 엮은 책은 작고, 가볍고, 무엇보다 저렴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고, 행복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재미 없는 글은 읽기 싫어! 라고 소리치는 분들을 위해서는 <어린왕자의 귀환>이 있다. <십자군 이야기>,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김태권이 만화를 그리고, 우석훈이 해제를 달았다. '무급 인턴 왕자'가 된 주인공이 신자유주의의 우주를 돌아 다니며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의 우리 사회를 풍자한다. 무척 쉽고 재미있지만, 현실을 그대로 가리키는 풍자의 디테일이 때론 섬뜩하게 한다.   

그래, 분명히 잘못 된 것 같아. 그런데 대안이 없잖아. 우린 안될거야 아마… 라고 하실 분들을 위해서는 <촛불세대를 위한 반자본주의 교실>을 준비했다. 제목 그대로 세계 곳곳의 저항운동 사례들을 만날 수 있다. '반자본주의 저항운동'이라니, 세상에!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꼭 따라할 필요가 없음은 물론이고. 단지, 다른 사회도 가능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마지막은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우파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라는 부제처럼, 자본주의도 미심쩍지만 비판 세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이다. 엉터리 논리로 무장하고 자본과 시장을 예찬하는 우파와 논리적인 오류는 짚어내지 못하고 무작정 반대하는 좌파에게 모두 뼈아픈 일침을 가하는 저자는 바로 <혁명을 팝니다>의 조지프 히스. 흥미롭고 통쾌한 뼈아프며, 또한 논쟁적이다.   

 

07년 <금각사>
08년 <인 콜드 블러드>에 이어
09년 동원훈련 선정 도서는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 
걸걸한 입담으로 유명하신 조르바 선생의 어록 중에서 몇 개를 옮기는 것으로 마무리.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을 자르지 않으면...." 

"내가 인생과 맺은 계약에 시한조건이 없다는 걸 확인하려고 나는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어 봅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지요. 잘난 놈들은 모두 자기 브레이크를 씁니다. 그러나(두목, 이따금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가를 당신에게 보여주는 대목이겠는데)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기계가 선로를 이탈하는 걸 조심한다면 천만의 말씀이지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전속력으로 내달으며 신명 꼴리는 대로 합니다. 부딪쳐 작살이 난다면 그뿐이죠. 그래 봐야 손해 갈 게 있을까요? 없어요. 천천히 가면 거기 안 가나요? 물론 가죠. 기왕 갈 바에는 화끈하게 가자 이겁니다."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그러니까,  

"악마나 물어가라지!" 

* 땔감은 쌓였지만 여름은 덥고, 빙하기는 너무 머네요. 인간이 되기는 요원한 이번 주도 만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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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르크스vs케인스vs폴라니 - 경제학 거인들의 부활
    from 고장난 자본주의 대안을 말하다 2009-07-10 18:16 
    이 맑시즘을 소개했다. 칼 폴라니를 만나 보라는 권유와 함께. 덕분에 맑시즘2009는 졸지에 한겨레21이 권유하는 토론회가 됐다. “이 추천한 토론회, 맑시즘2009에 와 보시지요?!” ^^! 추천사(?)는 이렇다. 올해로 10번째 행사를 맞는 ‘맑시즘 2009’의 수용 능력은 조금 더 넉넉하다. ‘고장난 자본주의, 대안을 말하다’를 큰 주제로 잡았는데, 주요 세션 가운데 하나로 ‘맑스 vs 케인스 v...
 
 
뚜벅이 2009-07-1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교양 MD님이 생각하시기에 조지프 스티글리츠라는 분이 왜 난해하다고 했을까요? 님의 서평을 보면 별로 난해할 것 같지 않고 책 소개 기사를 보아도 자연발생적이고 현존하는 "자유주의 시장"이란 없다는 증거를 귀납식으로 (서양 역사 속에서 여러가지 증거를 대면서) 서술한 책 같은데... 오히려 책의 가격이나 두께를 봤을 때 난해하기 보다는 지겨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독서 토론회를 만들어서 같이 읽어볼 책으로 해볼까 하는데 좀 걱정되네요, 첫 책으로 너무 두껍고 비싸니...

활자유랑자 2009-07-20 13:17   좋아요 0 | URL
음, 글쎄요. 너무 어려운 질문이네요; 다루고 있는 내용 자체가 광범위하며 또한 읽는 이의 많은 배경지식을 요하기 때문이겠지요. 기사나 책소개는 그 중의 일부분만을 단순 요약한 것에 그치기 때문에 실제로 읽는 것하고는 꽤나 다른 것이 사실이지요. (이 이상을 저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힘들고 또 아마도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책으로 <거대한 전환>을 고려 중이시라니, 참 멋진 독서토론회인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