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민주화항쟁계승사업회로부터 이 작품의 작업을 제안받았을 때 거절을 할 심산이었다. 첫 이유는 내가 그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1987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고 주변의 어른들 또한 직접적 기억이 없었다. (중략) 이후에도 따로 현대사를 공부한 적이 없으니 남 앞에 이야기를 풀어낼 자격도 실력도 없었다. 세금을 들여 하는 일이라면 당시의 공기를 기억하고 잘 아는 작가가 맡는 것이 세금을 허투루 쓰지 않는 길이라 생각했다.

작가의 말에서 최규석이 밝힌 것과 비슷한 이유로, 나는 <100도씨>를 소개하는 일이 어렵다. 물론 할 말은 있다. 좋은 책이고,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건 구매자 40자 평이 아니잖는가. 조금 보태 죽을만큼 어렵다, 라고 해도 큰 거짓말은 아니다. 이 페이퍼의 마감 데드라인을 두 번이나 어겼고, 데드라인은 '못지키면 죽는 최후의 선'이 아니던가. 그러니, 이미 두 번을 죽은 셈이다.

다른 이유는 배알이 꼬여서였다. 87년 이전 공고를 졸업한 동네 형님들은 20대 후반이면 혼자 벌어서 제 소유의 자그마한 주공아파트에서 엑셀을 굴리며 아이들을 낳고 키웠었지만, 지금 내 또래의 친구 중에 부모 잘 만난 경우를 빼면 누구도 그런 사치를 부리지 못한다.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격리된 사람들에게 밥을 해 먹였던 철거민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맞고 쫓겨나고 있고, 노동자들은 제 처지를 알리기 위해 전태일 이후로 수십년째 줄기차게 목숨을 버리고 있지만 전태일만큼 유명해지기는 커녕 성형 기사에조차 묻히는 실정이다. 선생님이 멋있어 보여 선생님을 꿈꾸던 아이들이 지금은 안정된 수입 때문에 선생님을 꿈꾸고 아파트 평수로 친구를 나눈다.  

나역시 조금쯤 배알이 꼬이기도 했다. 좋은 책이고,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지만 무턱대고 들이밀며 '사세요, 사세요!' 하는 일은 너무 '장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일종의 부끄러움이지만, 내가 '장사꾼'이어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아니다. 그건 이런 것이다. 



 

 

 

 

 

 

 "책상을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쓰러졌다"는 경찰의 발표에 양복을 입고 소주를 마시던 직장인들이 분노를 터트린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어디서 그런 구라를 치냐고. "종철이 가는 길에 술이나 한잔 올리자"며 잔을 드는데 옆 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학생이 다가와 시비를 건다.  



 

 

 

 

 

 

 

 

 

 

 

 


그런 술은 치우라고, 자본의 단물이나 빨고 있으며 종철이 죽으니까 눈물 한방울 흘려주시냐고.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이 바로 이런 것이다. 누군가 내게 "자본의 단물을 빨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알다시피 설탕과 올리고당과 꿀을 같은 '단물'이라고 하기 민망하다…) 문제는, 언젠가의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나는 종종 그런 어법을 구사한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에 최규석은 이렇게 말한다.  



 

 

 

 

 

 

 

 

 

 

 

 

 

'도덕적 우월감'의 빈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이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은 미묘하다. 마냥 숨을 수만은, 숨길 수만은 없는 부끄러움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 부끄러움은 정말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되고 말테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부끄러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면서.  

그럼에도 작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이 작품이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얘기라 하더라도 그 대상이 청소년이라면 하나마나한 소리도 꼭해야 하는 소리가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걸 위해 수많은 사람들 -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처럼 터무니없이 약하고 겁 많고 평범한 사람들 - 이 피와 땀을 흘렸고 제 삶의 기회를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책에 대해서 "좋은 책이니 읽어들 보세요"라고 하는 것 외에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대신 함께 나온 두 권의 책과 한 장의 앨범을 통해 못다한 설명을 대신하려 한다. ('왼손은 그저 도울 뿐' 같은 느낌으로)  

차병직 변호사의 <상식의 힘>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꿈꾼다. 상식을 '보통 사람들의 정상적인 판단에 의해 정해진, 한 사회가 반드시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고귀한 가치'라고 정의하는 책은, 얄팍한 타협과 기회주의가 상식을 압도하는 현실을 꼬집는다. 상식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설 필요가 있지만, 그 이전에 최소한의 상식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끓는다'. 물론 무턱대고 끓지는 않을 것이다. 물이 100도씨가 되면 끓듯 사람들에게도 어떤 비등점이 있는 것이다. <100도씨>는 바로 그 과정을 보여준다. '온건한 시민'들이, 87년 6월이, 어떻게 끓어올랐는지를.  

<무엇이 시민을 불온하게 하는가>는 폭넓은 주제를 인문학적 교양을 통해 맛깔나게 다룬 <상식의 힘>에 비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오늘의 현실을 가리킨다. 인사파행 속에 막을 내린 KBS 1라디오 '라디오 정보센터 왕상한입니다'의 '최 변호사의 뉴스 해석'을 묶은 책이 다루는 것은 집시법 개정, 광고주 불매 운동, 용산 참사, 삼성 특검 등 여전히 뜨거운 이슈들. 오늘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몰상식의 풍경들이다.  

시민들이 '불온'해지는 것은 (아련한 '불온서적'의 추억…) '상식'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논리는 중요하다. 이 단순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식'을 지키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힘으로 짓누르려 할 때, 그리하여 또다른 '몰상식'이 동원될 때, 당연히 시민들은 더욱 더 불온해진다. 그것이 바로 <상식의 힘>과 <무엇이 시민을 불온하게 하는가>와 <100도씨>가 전해주는 교훈이다. 오컴의 면도날 처럼 너무나 심플한, 상식 그 자체.  

그리하여 이 글을 쓰는 내내 내가 떠올린 것은 영국산 펑크 밴드 클래쉬의 'I fought the law'였다. 그들 역시 이렇게, 웃음이 나올 정도로 단순한 논리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나는 돈이 필요했어 / 한 푼도 없으니까 / 나는 법과 싸웠고 / 법이 이겼어" 그렇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법과 싸우고 지는 일을 끝없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죽잖아. 근데도 살잖아?"

 

 

* 고맙습니다. 이번 주도 만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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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 시대 가장 hot한 만화가 최규석 그리고 "100도씨"
    from 창비 인문사회팀 블로그 2009-06-19 11:05 
    안녕하세요, 창비 인문팀입니다. 우선 『100℃』를 사랑해주시고, 최규석 작가님을 사랑해주시는 수많은 네티즌, 독자 여러분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조만간 최규석 작가님과 독자 여러분의 만남을 주선하는 이벤트로 찾아뵙겠습니다. 더욱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한가지 말씀드리면 한국만화 100주년 기념 작가싸인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최규석 작가 싸인회는 6월 20일(토) 오후 5시부터 반디앤루니스 코엑스점에서 있다고 하네요. 많은 성원 부탁드립...
 
 
콩콩 2009-06-19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참. 너무나도 진솔한 글입니다. 읽으면서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상식의 힘도 힘이지만, 정직하고 진실한 것의 힘에 당할 장사는 정말 없을 것 같아요. 진실한 님의 글이 저를 감동시킨 것처럼요. 그리고 클래쉬의 런던 콜링!!

활자유랑자 2009-06-23 16:22   좋아요 0 | URL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소영 2009-06-1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 만화 읽으면서 제일 마음에 남는 곳 중 하나가 저 부분이었는데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왼손은 거들 뿐! ㅋㅋ 최고예요)

활자유랑자 2009-06-23 16:23   좋아요 0 | URL
아! 왼손은 돕는 게 아니라 거드는 거였지요 ㅎㅎ

2009-06-19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활자유랑자 2009-06-23 16:2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푸른열정 2009-08-21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링크를 해놓아야 할 듯! ㅋㅋ

활자유랑자 2009-08-25 15:2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