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 그리고 13년 후…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길을 왔는데
이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누구도 말을 않네
- 조용필, '꿈'
1991년 발매된 조용필 13집 'The Dreams'에서 도시는 좌절된 유토피아로 그려진다. 교과서적 독해을 해보자면 도시라는 꿈을 꾸며 떠나왔지만 현실과의 낙차에 절망하는, 그러나 별 수 없이 고향의 꿈을 꿀 뿐인 화자의 절절한 마음이 녹아있는 가사라고 할까. 꽤나 고전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주제.
아침엔 우유한잔 / 점심엔 fast food
쫓기는 사람처럼 / 시계바늘 보면서
거리를 가득메운 / 자동차 경적소리
어깨를 늘어뜨린 학생들 / This is the city life
- 넥스트, '도시인'
그로부터 2년 후, 넥스트의 데뷔앨범에서 도시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도시는 더이상 '대상'이 아니다. 도시는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고, 그곳엔 희망이나 절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저 일상이 있을 뿐. 쫓기는 사람처럼 시계바늘을 보면서,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도시인이고, 꿈꿀 고향조차 없기에. 이것은 분명 (적어도 대중음악사에서는) 새로운 프레임이었다.
그렇다면 13년이 지난 오늘, '도시'란 단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는 차가운 도시남자. 하지만...?"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내가 생각한 것은 보들레르의 파리, 벤야민의 아케이드, 모더니스트들의 경성, 키리코의 '거리의 우수와 신비', '꿈꾸는 책들의 도시'와 '보이지 않는 도시'였다...라고 하면 물론 거짓말이고. 고작 웹툰 '마음의 소리'에 등장하는 대사가 떠오를 뿐이었다. "나는 워크홀릭에 빠진 차가운 도시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결국, '별 생각 없다'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이유는? 이제 '도시'란 말이 너무 당연해졌다는 것. 그리하여 어떤 감흥도 주지 않는다는 것. 워크홀릭에 빠진 차가운 도시남자처럼 말해보자면 'take-for-granted'라는 말이다. (아아...) 그것은 우리가 굳이 '사람'임을 되뇌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도시인으로 사는 일은 분명 피곤하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대충 감이 온다. 거시적인 담론(을 다시 멀리서 바라보는 방법)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일은 익숙하니까. "'세계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국제화', '88만원 세대' 등 다양한 용어와 이론으로" 보고 재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론이 당신의 폐부를 찌르지는 않는다. 책의 표현을 빌자면
"그런데 매일 신문을 장식하는 사건들의 큰 흐름과 원인들, 그것으로는 뭔가 미흡하지 않은가. '집단 속의 나'가 궁금하지 않은가. 결국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니 말이다.
북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가 삼각형의 대열을 유지하는 이유도 알고, 그것이 그들의 본성이라는 것도 우리는 이제 안다. 그러나 맨 앞에 날아가는 기러기의 고독, 중간에 쳐져서 허덕이는 기러기의 우울함,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젊은 기러기의 충동성은 망원경으로 파헤치기 어렵다. 그렇듯 하나하나의 마음 안을 돋보기로 샅샅이 뒤져봐야 도시에 살고 있는 나의 속내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렇다. 도시는 이론들이 분석하듯 그렇게 존재하고 있고, 당신은 그 속에서 살아간다. 고독하고, 우울해 하고, 전정긍긍하면서. 하지만 당신이 진정 궁금한 것은 도시의 존재방식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허덕이는' 이유가 아닌가? 그렇다면 먼저 도시인으로서의 당신을 찬찬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가치와 욕망에 맞추어 살고 있는지.
그런 의미에서 <도시 심리학>이란 제목과 기획은 꽤나 절묘하다. (반면 '심리학의 잣대로 분석한 도시인의 욕망과 갈등'이란 부제는 맞는 말이긴 하지만 조금 촌스럽다)
'머물기에는 갑갑하고 떠나기에는 아쉬운' 당신을 위해
책 표지의 표현대로 '머물기에는 갑갑하고 떠나기에는 아쉬운' 도시인의 심리는 이율배반적이다. 개인정보 유출은 극히 꺼리면서도 만취한 상태에서 아무 의심 없이 대리운전을 부르고, 과학과 이성을 부르짖으며 사주카페를 찾는 것처럼. 하지만 책은 함부로 재단하지도, 함부로 비판하지도 않는다.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는 난개발된 도시처럼 얽히고 섥힌 우리의 욕망을 찬찬히 분석해 우리 앞에 보여줄 뿐이다. 문자메시지로 '통보'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소통을 원하고, 커다란 '한방'을 바라지만 '한방'을 위한 별 노력은 하지 않고, 카드값에 끙끙대면서도 결국 지름신에 굴복해 필요도 없는 물건들을 사들이는. 더하고 뺄 것 없는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은, 놀랍게도 꽤나 많은 위안이 된다.
그 이유는 무얼까? 아마 우리는 단지 이해받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과도한 소비, 과도한 욕망, 줄어들지 않는 공허함에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해라/저렇게 해라'라는 말이 아니라, 단지 "그래, 네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라는 말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
<심리학이 서른 살에게 답하다>의 저자 김혜남은 이 책의 추천사를 이렇게 썼다.
이 책은 쾌락을 행복으로 오인한 현대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쾌락의 무분별한 추구는 욕망을 더 가속화시키고, 소통의 부재와 소용돌이치는 관계 안에서 점점 더 분열되어가는 현대인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두려움과 외로움에 지쳐가는 현대인에게 저자는 분석의 렌즈를 꺼내들고 한번 ‘우리를 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소소하게 지나치던 일상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데는 바로 이런 두려움과 갈등이 있다네. 자넨 어떻게 하겠는가?'라며,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당연히, 우리는 모두 친구가 필요하다.
책속에서
지름신은 21세기의 미륵불이 아닐까. 살면서 매일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가 내 생각보다 중요하고, 지나친 자기절제의 당위성에 머뭇거리는 보잘것없는 인생살이에 아직은 ‘내가 원해서 산 거야’라고 선언할 용기가 없는 우리에게 지름신은 현재의 답답함을 해결해 줄 처방을 내려주는 존재다.
불확실하고 어두워 보이는 미래에 대한 신뢰할 수 없는 약속보다 현재의 포만감과 행복감을 원하는 중생들은 지름신을 모시려 한다. 품안에서 신용카드를 꺼내들면 삶의 괴로움에 찰나적이나 짜릿한 엔돌핀이라는 연고를 바르며 행복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치고 힘든 자들이여, 당신 마음에 지름신을 모셔라. 베짱이 같은 삶을 살다가 겨울에 고생할 수 있다고 여름에 개미처럼 일만 할 이유도 없는 법. 오늘을 즐기자! - 15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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