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팩션 류를 중심으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던 역사'시장'이 주춤한 것도 벌써 꽤 오래 전의 일이다. 담당 MD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안타까운 마음에 인공호흡을 하고 손발을 주물러도 보았지만 이미 그런 시도도 접어가는 시기가 왔다는 이야기다. 그게 '시장'의 법칙 아닌가? 그 외에도 건사할 인문,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가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고.  

역사시장의 팽창과 수축을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분석이 있어왔고, 그 대부분은 "'흥미위주'의 몸집 불리기가 시장을 망쳤다"라는 문장으로 압축 되겠지만 그것 이상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를테면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 아무도 그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 때 역사는 '흥미거리'의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흥미는 질리게 마련이고 이 글은 일반론이다.

그치만 시간은 흐르고, 흐름과 유행은 돌고 또 돌아 우리 앞에는 또 다시 묵직한 역사책이 놓이게 되었다. 이른바, 역사서의 부활? 사실 내가 이 책들에 대해 해야 할 말은 "반갑다" 한 마디면 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반갑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므로, MD의 본분을 다해 소개해보자면-  

<콜디스트 윈터>는 '뉴저널리즘'의 창시자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마지막 유작으로(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의 원고 탈고 후 닷새 만에 다른 취재를 위해 이동하다가 자동차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108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실제 참전했던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녹아든 책은 마치 소설처럼 흥미롭다. ('한국전쟁'을 다룬 책을 단지 '흥미롭다'고 말하는 것은 윤리에 어긋나는 일일까?)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원제 : Stalingrad)>의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 역시 830쪽이라는 만만치 않은 분량을 자랑한다.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이라는 부제에서도 느껴지듯 수많은 이들의 자발적인 참전을 이끌었던 '가장 열정적으로 수행된 이념 전쟁'을 명쾌하고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는 이 책에 대해서는 저명한 영국의 사학자이자 비버의 스승인 존 키건의 한 마디면 충분할 듯하다. "스페인 내전에 관해 더 덧붙일 것이 없는 책"!

<암흑의 대륙>은 아직 우리에겐 낯선 마크 마조워의 저작으로 20세기 유럽 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비교적 젊은 나이지만 유럽 현대사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주장을 담은 연구를 통해 해외에서는 에릭 홉스봄(!), 닐 퍼거슨(영국을 다룬 <제국>이 번역되어 있다)과 함께 현대 유럽사 연구를 대표하는 학자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20세기 유럽의 역사가 민주주의, 진보, 자유의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기존의 견해와 달리 그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폭력과 증오, 잔혹함을 주목하며 새롭게 역사를 해석한다.  

<정조어찰첩>은 참 뜻깊은 책으로, 위에 나열된 4권의 책 중에서 유일하게 알라딘 '웰컴 페이지'에 프로모션 된 책이기도 하다. 내용은 이렇다. 2009년 2월, 정조의 비밀편지 297통이 새롭게 발견된다. 여기서 핵심은 '비밀'에 있는데, 그 모든 편지는 다름아닌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였던 것. 심환지가 누구던가? 노론의 거목으로 정조와 정치적 적대 관계에 있었다고 평가되는 인물이 아니던가?  따라서 이 편지들은 기존의 역사해석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    

물론 연구자 아닌 '일반독자'인 우리들은 "그래서 뭐?"라고 되물을 권리가 있다. 그래서, 책을 먼저 접한 일반독자의 대표로서 말씀드리자면, 이 편지들은 재미있다. 많은 비밀 얘기가 그러하듯. 꾸밈 없는 정조의 소탈한 문체와, 가감 없는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심환지의 부인과 조카의 건강을 묻고, 속상한 일들을 털어 놓으며 소소한 국정을 챙기는 임금의 모습은, 고금을 막론하고, 노소를 불구하고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간밤에 잘 지냈는가? 나는 밤에 더워서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새벽이 되자마자 빗질하고 세수한 뒤 지금까지 수응하고 있으니 얼마나 피곤한지 알 것이다. 껄껄 웃을 일이다.  

여기 적어놓은 사람들은 이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다시 살펴보고 적어 보낸다. 경의 생각이라고 하면서 이조 판서와 상의하는 것이 어떠한가? 이것은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하는 일이니, 코가 붙은 곳이야 내가 어찌 알겠는가? 껄껄. 이만 줄이다.  

- 정사넌1797 7월 8일 저녁에 받은 편지 중에서 (* 심환지가 받은 날을 이른다)

 

 

 

 

 

 

 
조금 '무게'는 덜하지만 여전히 주목할 만한 역사책들도 함께 소개하자면-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는 <십자군 이야기>의 김태권 씨의 새 책이다. 단독 작업으로는 참으로 오랜만. 제목 그대로 르네상스 미술사를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서울대 미학과 출신이라는 이력답게) 재구성하고 있다. (참고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어린왕자'라는 컨셉의 책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교양만화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사실 해당 분야의 기반이 전무한 상황이라 절로 응원하게 된다. 힘내세요!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는 얼마 전 열렸던 서울국제도서전 당시 '여고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책이라고 한다. 30대의 남성들을 독자로 예상했던 출판사에서는 깜짝 놀라셨다고. 아마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과 마치 소설을 연상케 하는 표지 때문이 아닐까. 제목 그대로 황제의 무덤을 파헤치던 '간 큰 도둑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은, 전설의 고향을 보듯 흥미진진하니 일찍 찾아온 더위에 지치신 분들이 읽기에 안성맞춤.  

케네디와 닉슨의 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책은 제목부터 <라이벌의 역사>다. 세계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라이벌 23쌍을 들어 그들의 관계, 대결의 초점, 과점, 결과, 승자와 패자, 그들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분석이라고 하니 좀 딱딱하게 들리지만 '라이벌의 대결'이란 언제나 흥미진진한 주제가 아니던가? 트루먼 vs 맥아더, 장개석 vs 모택동, 스탈린 vs 트로츠키, 나폴레옹 vs 웰링턴, 엘리자베스 1세 vs 여왕 메리 등 흥미로운 라이벌들의 이야기가 가득.   

마지막으로 소개할 역사 신간은 바로 <조선왕조실록>. 한 권으로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 쉬운 일은 물론 아니지만, 역사에 약하다면 이 책으로 역사에 흥미를 붙여 보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한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제목의 많은 책들이 있지만, 가장 최근의 책 답게 연산군을 비롯한 인물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 특징.   

 

 

나는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개論'을 길게 풀어보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개 같은 인간들의 연대기, 犬人주의의 역사 같은 것… 고작 그런 것을 소망으로 품고 있다.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한국에서 '개' 같은 인물형을 말할 때 가장 으뜸은 김훈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 자리에서 논하는 '개'의 정의는 이렇다. 언젠가 썼던 페이퍼를 빌자면 "과거의 신화 속에 존재했던 영웅들, '맹수' 같은 인간들이 멸종된 자본주의 사회에는 대신 '개 같은' 인간들이 존재한다. '개'는 살아가나 화해할 수 없기에 불행하고 그것을 결코 잊지 않지만 또한 끈질기게 살아간다.")  

물론 나는 이 책을 읽기 전부터 김훈을 '개'로 지목했고, 나름의 '개'론을 펴왔지만 정작 이 책은 나의 고유한 '개'론에 적잖은 영향을 줄 것 같아 부러 피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결국 이 책을 폈고, 한숨에 읽었으며, 책을 덮고 이렇게 묻고 싶어졌다.  

"이 책은 자서전입니까?"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아 자꾸만 입술을 달싹거리지만 그에게 물을 수 없음을 알고, 설령 그에게 대답을 듣는다 해도 그것이 나의 대답이 아님을 이미 알기에, 그저 입을 다물고 살아보려 노력한다. 어린 개는 이렇게 자란다.  

* 고맙습니다. (참으로 오랜 만에) 이번 주도 기어이 만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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