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을 2009년 첫 '편집장의 선택' 네 권 중에 하나로 추천한 것은 일종의 농담이었다. "20세기의 쌍동이 악마"로 불리는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과 히틀러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는 <독재자들>과 2009년의 한국 사회를 겹쳐 놓는 것은, 그러나 이제 더이상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꼭 '미네르바'라 불리던 남자가 잡혀갔기 때문은 아니다. 간결하게 책의 가치를 설명하고 있는 추천사의 마지막 문장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오버리가 심히 소름  끼치는 두 체제의 구조를 사실에 근거하여 간명하게 해명한 덕에 독자들은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악에 관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진리의 공식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정권들, 외견상 통합된 사회를 창조하여 외부인을 악마로 만들거나 살해한 정권들은 거듭하여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하려는 모든 역사가는 그런 일이 발생한 원인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넓혀준다. 결국은 바로 이것이 나치와 소련을 비교하는 진정한 이유이며, 이 책의 진정한 가치이다. 이 책은 과거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만큼 미래를 내다본다." - 앤 애플봄(Anne Applebaum), The New Republic
 

조금 늦게 찾아온 조반니 아리기의 대표작 <장기 20세기>가 지금, 여기에서 의미하고 있는 바는 분명하다.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를 바로 지금, 우리가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세기, 즉 '장기 20세기' 이후의 세계의 모습은 어떨 것인가. 이에 대해 조반니 아리기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는데, 동의 여부를 떠나서 한 번쯤 숙고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서구의 자멸>은 조반니 아리기와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서구의 몰락을 말한다. 원제인 'Suicide of The West'에서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나듯,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라 서구인들이 하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 때문에 거대한 문명이 우발적으로 종말을 맞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에서 지목하는 서구 문명의 핵심 키워드는 크리스트교, 낙관주의, 과학, 성장, 자연주의와 개인주의의 6가지 가치관. 책은 각 가치관의 의미와 변천의 역사, 인류의 삶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며 자멸이 아닌 지속의 길을 모색한다. 결국 이 책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서구의 몰락을 바라지 않는 서구인이 서구에 하는 쓴소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의 몰락을 바라지 않는 한국인이 한국에 하는 쓴소리'도 들어야 공평하겠다. 아무리 새침하게 "국가요?"라고 되묻는다고 해도 결국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정치경제사회적인 조건을 무시할 순 없을테니.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 경제>가 바로 그 책이다. 제목과 표지에 빨갛게 써있는 카피- "글로벌 금융위기와 MB노믹스를 넘어", "위기로 치닫는 카지노 자본주의와 추락하는 한국경제, 경제구조의 근본적 전환 없이 한국경제의 미래는 없다!!"가 그렇게 말하고 있듯.  

미네르바의 예측과 전망이 모두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우려하고 있지만 현재 전 세계는 디플레이션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네르바의 예측에 다소 빗나간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늘날 세계 경제변동의 향방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이 지점에서 사실관계의 해명을 넘어 본격적으로 가치관의 문제가 제기된다. 보수나 진보와 같은 가치의 기준으로 구조적 대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미네르바의 몫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 [결론 : 한국경제, 신자유주의 이후를 준비하며] 중에서 (나는 그냥 인용할 뿐이고… 그럼에도 잡혀갈까 무섭고, 나 엄마 보고 싶고…)  
 

 

 

 

 

 

 

새해 첫 브리핑부터 암울한 이야기를 늘어 놓고 있자니 몸까지 퍼지는 듯. 분야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할 터인데, 그렇다면 이건 또한 '직업병'이므로 빨리 좋은 세상이 와서 유급휴가를 받고 병원에 입원하기를 꿈꾸며, 조금 희망찬 책들로 시선을 돌리기로 한다.  

마네의 '놀란 님프' 일부를 표지로 하고 있는 고종석의 <어루만지다>는 한국어에 천착해 온 그의 이력을 다시 한 번 잘 보여주는 책이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이란 부제에서도 보여지듯 그가 이번에 탐구하는 것은 바로 '우리말의 에로스'. 입술, 감추다, 메아리, 가냘프다 등 그가 짚어내는 낱말은 결코 일상어의 범위를 넘지 않지만, 마치 표지의 그림이 일종의 '부분확대'를 통해 꽤나 새로운 느낌을 주듯, 우리가 미처 몰랐던 "모국어의 속살"을 은밀하게 드러내 준다.  

사랑이 미끈하다는 것은 그것이 치명적일 수도 있고 활명적活命的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 미끈함에 미끄러져서 일상을 걷어차고 색황의 나락으로 한없이, 덧없이 굴러 떨어질 때, 연애는 (어쩌면) 치명적이다. 그 미끈함을 일상의 끈끈한 생동으로 껴안을 때, 연애는 (어쩌면) 활명적이다. - '미끈하다' 중에서  

신년에 참으로 어울리는 <불굴의 용기>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생각과는 달리 두터운 역사서다. 미국 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이 루이스와 클라크를 선두로 한 원정대를 서북쪽으로 파견, 세인트루이스에서 로키산맥을 넘어 오리건까지 8천 마일에 이르는 장대한 탐사를 하게 한 역사적 사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험'은 물론 아니겠지만, 꽤나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펼쳐진다.

* 주의 :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책은, 그런 메세지를 담고 있는 책이 대개 그렇듯 깊게 파고 들면 정치적으로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행복한 인문학>은 <희망의 인문학>의 속편 '격'인 책으로(직접적인 속편은 아니란 말), 노숙인·자활근론자·교도소 수용자 등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코스의 강사진들이 소통으로서의 인문학, 그 가능성을 자신들의 경험에 빗대어 펼쳐내고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는 2008년을 밝게 비추었던 '촛불'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는 책이다.  

(희망적인 얘기를 하려고 하니 말이 짧아지는 이유는 무얼까?)
  

 

 

 

 

 

  


루이 알튀세르의 자서전을 소개하는 알라딘 책소개의 첫머리는 이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어느새 먼 과거의 전설처럼 잊힌 알튀세르의 삶과 철학, 독특한 정치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정신분석적 자서전이다." (원출처는 출판사 보도자료임을 밝힌다) 이 책을 마주하고 기억의 한 귀퉁이에서 '알튀세르'라는 이름을 다시금 찾아 낼 이들에게 이보다 더 긴 책소개가 필요할까.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다 1980년 정신착란 상태에서 아내를 교살하기도 했던 그의 삶은… 지독히도 아프다.

한 친구하고는 어느 날 오후 내내, 고대의 가장 오래된 고전적 방법들에서 시작해 수많은 다른 자살 방법을 찾은 다음 마침내 간곡하게 권총 한 자루를 갖다 달라고 요청했다. 게다가 그 친구에게 "그런데, 자네는, 자네는 존재하고 있는가?"라고 끈질기게 묻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고 특히, 나는 내가 놓여 있다고 느끼던 그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끊임없이 파괴해 나갔다. - 본문 355쪽 중에서  

<레프 톨스토이>는 항상 빚독촉에 시달리며, 빚을 갚기 위해 끊임없이 선불을 받고 원고를 고칠 새도 없이 써 팔아 넘기던 도스토예프스키가 '큰 재산과 천재적 재능을 함께 물려 받은 작가'로 진심으로 부러워했던 톨스토이의 평전이다. 세상 어떤 작가보다도 존경 받았던 톨스토이의 삶과 작품을 탁월하게 복원해 낸다. (좀 다른 말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원고를 충분히 다듬고 정련할 시간과 돈이 있었다면 과연 어떤 작품을 남겼을까?)

1권이 오랫동안 품절이었던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가 새롭게 출간 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야겠다. 기존의 양장본은 이제 절판, 이후로는 새로 출간된 페이퍼백으로만 만날 수 있다고 하니 기존의 양장본을 1권만 미리 사두신 분은 2권이 절판 되기 전에 (소량의 재고만 남았다고 한다!) 서둘러 사두는 것이 좋겠다. 물론 아직 읽지 못한 분은, 페이퍼백을 사면 된다. (노골적이다!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은 "중세에서 현재에 이르는 역사적 시기들에 나타난 일련의 근본적인 변화들을 밝혀내고자 하며, 특히 르네상스에서 혁명의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책이다." 기존의 책들이 그 시작과 부흥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과는 달리, 마지막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 알라딘에서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강유원 박사와 정지인이 함께 옮겼다. (재미있는 점은 이 책을 낸 출판사의 이름이 '르네상스'라는 거다. 난, 농담했을 뿐이고…)   
 

 

 

 

 

 

 

조금 이상한 짝짓기가 되어 버렸지만 앞의 두 권은 '재난재해', 뒤의 두 권은 '미학' 관련 서적이라고 보면 무리 없겠다.

<전쟁의 탄생>은 '왜 국가는 전쟁에 뛰어 드는가?'라는 원제에서 보여지듯 '숙명적'이라고 말해지지만 실은 '인간적'인 전쟁의 이유들을 살피고 있는 책이다. 모든 전쟁은 결국 인간이 시작한 것이므로, 그 인간에 이유가 있다는 것. 저자는 독소전쟁에서 걸프전을 지나 다르푸르 사태에 이르기까지 총 10개의 현대전을 분석하는데, 그 중 한국전쟁이 포함되어 있어 딱히 '전쟁사'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흥미롭게 읽어볼만 하다.  

전쟁은 분명 압도적인 재난재해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재난재해가 존재한다. 특히 21세기의 우리는 어디에서, 누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불안사회'에 살고 있다(혹은 그렇다고 세뇌 당하고 있다). 타임스 기자가 쓴 <언씽커블>은, 실재로 존재하는 재난재해 상황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피며 이를 이용해 실질적으로 재난재해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제시한다.

<무감각은 범죄다>와 <이콘과 아방가르드>를 보며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아 도저히 지금 당장 읽을 수는 없겠지만, 꽂아 놓고 싶다. 그러면 언젠간 읽지 않을까?" '저항의 미학'으로서의 '성 미학'을 탐구하는 <무감각은 범죄다>는, 기존의 '예술미학'과 달리 성행위를 미학의 대상으로 읽고 있다. 도발적인 제목 못지 않게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주목할 만한 국내저작이라 하겠다.  

<이콘과 아방가르드>는 생각의나무 출판사에서 종종 나오곤 하는 군침이 흐르게 하는 고급 양장서 중 하나다. '초월적 성스러움의 문화적 표상'이라는 우아한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은, 일종의 '이콘 개론서'이다. 이콘과 이를 둘러싼 2천년 역사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사상.언어적 사건과 함의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긴 책 소개 보다, 예술이나 종교, 상징 등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실물로 보고 소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말로 설명을 대신하고 싶다.

 

 

 

 

오늘 마지막으로 카드점 치듯 다닥다닥 늘어 놓는 책은 바로 'HOW TO READ' 시리즈의 2차분 6권과, 2007년에 나왔던 1차 분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이라고 쓰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이라고 읽는다) <라캉>과 <비트겐슈타인>이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이제 그만 나오는 건가, 생각하던 차에 나와서 반갑고 그 중 <융>을 담고 있기에 더욱 반가운, 그런 책이다. 2차분 6권이 다루고 있는 사상가들은 다음과 같다. 사르트르,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드, 융 그리고 푸코. 어렵게만 생각되는 사상가들을 쉽고 재미있게 안내하는 좋은 입문서들이다.  

융은 이 심층적인 내면성이 신의 영역에 관여한다고 가정한다. 융에게 있어서 그것은 인습적인 의미에서 신을 믿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그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 또 다른 세계를 안다고 말한다. BBC의 인터뷰를 진행했던 프리맨(John Freeman, 1915 ~ )이 융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 유명한 대답을 했다.  

대답하기 어렵군요. 나는 압니다.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융은 신앙에 대해 자신이 지나고 있는 생각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믿는다'는 말은 나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믿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특정한 가설에 대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내가 어떤 것을 안다면 나는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 <HOW TO READ 융>, 48~49쪽 중에서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How To Read 융>은 전반적인 융에 대한 입문서라기 보단, 그의 자서전인 <기억 꿈 사상>과 함께 겹쳐 보면 좋을 책이다. 좋은 책이지만, 그저 입문서로 놓고 볼 때는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오늘의 마무리는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적는 것으로. (융의 <기억 꿈 사상>의 문체를 흉내냈다)  

먼저 머릿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다.
그것은 일종의 계시와도 같은 것으로 "다윈주의, 영어로는 '다위니즘darwinism'이라고 한다"는 문장이었다.
그 문장이 떠오른 이유는 올해가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탄생 150주년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자 갑자기 머리 속에서 썬글라스를 낀 비가 "레이니즘, 레이니즘, 난 네게 빠져 버렸어"라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그 장면은 하얀 수염을 기른 다윈이 "다위니즘, 다위니즘, 난 네게…"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대체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다음 주에는 다윈 특집을 해야 한다는 것…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다윈 이후>가 마침 재출간 되었다!)

* 2009년에도 가득한 헛소리와 함께 배는 출발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번 주도 만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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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TOR Credits 2011-12-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올해가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탄생 150주년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자 갑자기 머리 속에서 썬글라스를 낀 비가 "레이니즘, 레이니즘, 난 네게 빠져 버렸어"라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그 장면은 하얀 수염을 기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