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출간 연기 끝에 드디어 책상 위에 놓인 <하늘에서 본 한국>을 보고 있자니 여러 기분이 든다. 반가움과 (예약일정 변경에 수반되었던 각종 처리들이 다 끝났다는) 안도감을 빼면, 가장 큰 느낌은 압도적이라는 것. 물론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작 <하늘에서 본 지구>가 놀랍고 즐거웠던 이유는 사진들이 담아내고 있는 이국의 풍광 때문이었다. 일종의 대리체험. 비록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은 "지구는 나의 조국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게 그 사진들은 끊임없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상기시켰으니까. 잡기엔 너무 멀고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즐거운 그것은, 이를테면 꿈과 같았다.
반면 <하늘에서 본 한국>이 담아내고 있는 것은 우리가 발 붙이고 또 부대끼며 살아가는 '지금-여기'의 모습이다. 때론 살갑지만 대개 지루하고 그래서 도망치고 싶은 바로 이 곳.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너무나 새로운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결국 얀의 사진이 비추는 것은 우리들의 모습이며 또한 우리도 몰랐던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진집이되 사진집이 아니다. 대개 지루한 것은 '한국'이 아니라 '우리'고, 우리가 도망치고 싶은 것 역시 '여기'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물론 누구도 그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너무나 명료하지만 말로 하자면 이렇게 구차한 진실을 얀의 사진은 그저 보여준다. 얀의 사진 앞에서 우리는 순간 작아지지만, 그것은 '스스로 작게 살아온' 지난 날에 대한 반성에 다름 아니다. 일단 그것을 깨닫고 나면, 우리도 조금쯤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비로소 서문의 말미에 쓰인 얀의 말은 진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사진집 이상의 것입니다. 희망이 바로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찬바람 불어 마음까지 시린 이 계절에 어울리는 두 권의 책이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달인'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인 고미숙의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와 <천만번 괜찮아>의 박미라의 <치유하는 글쓰기>가 그것.
종횡무진,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는 '고전 평론가' 고미숙은 제대로 사랑할 것을, 그러기 위해서 공부할 것을 촉구한다. 자본주의가 재단한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쳇바퀴 같은 연애 속에서 감정과 자본과 몸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요즘'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
반면 박미라의 책이 필요한 건 과거의 상처에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공부고 뭐고, 일단 자기 자신과의 화해가 필요한 사람.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이 두 권의 책은 서로 '같은 시기에 앞에 놓인 좋은 책'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긴밀함도 없지만, 일단 이렇게 놓인 것도 인연일 터. 하여 의미를 부여하자면, 사랑하고 공부하고 또 쓰면서 살아간다면 이것저것 말 많은 인생이지만 즐겁다! 란 뜻일까, 하고 잠깐 생각해 본다. (하하하)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편집장의 선택'에 다 해버려서 이 자리에선 그것을 옮기는 걸로 소개를 마치기로 한다.
"사랑에도 공부가 필요하다니, 그것 참 곤란한 이야기다. 학점 관리에 토익에, 제2외국어에, 입사&승진 공부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물론 고미숙이 말하는 공부가 그런 공부는 아니다. 의심없이 주어진 것들을 다시 바라볼 것, 모르는 게 있다면 알려고 노력할 것,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것. 어째, 그냥 외우는 것보다 더 힘들 것 같긴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사람들은 종종 "(그토록 많은) 연애를 했는데, 왜 연애는 항상 똑같은 걸까" 고민하기 마련이다. 고미숙의 대답은 간단하다. 언제나 '나'란 존재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망하고 때로 냉소한다. 하지만 고미숙은 말한다. '나'를 바꾸면 어떨까? 그러니까 사랑이, 우리 안의 에로스가 폭발해 나와 내 몸, 그리고 인생을 바꾸게 한다면?
어차피 소통불가능한 타인끼리 만나 자신들의 욕망만을 소비하는 '쿨한' 사랑도, 내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하는 '순애보적' 사랑도, 반쪽이가 반쪽이를 찾아 영원히 행복한 하나가 되기를 꿈꾸는 '낭만적' 사랑도 아닌, 다르고 더 '단단한' 사랑을 찾는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
"우리는 모두 아프다. 직장에 학업에 가정에 경제에 미래에 연애에- 무엇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살이에 치이며 골병이 든다. 때론 '괜찮다'라는 말 한 마디가 절실하지만 누구하나 우리를 위로하진 않는다. 그래서일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는 <기획회의> 최신호를 통해 2008년의 출판 대표 키워드를 '자기치유'로 꼽았다. 결국 자신의 상처는 자신이 보듬어야 한다는 뜻?
<천만번 괜찮아>의 박미라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자기치유'의 길은 바로 글쓰기다. 실제로 '치유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얻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례를 들려주는 그녀는, 우리가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또 용서하며 더 큰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단지 글쓰기일 뿐인데…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녀의 말은 그 자체로 따뜻하고 또 솔깃하다.
문득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속 한 문장이 떠오른다. "당신은 이제 아팠지만 다 나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할 일이 많지만 여전히 아픈 당신, 글쓰기를 시작할 때다. 단지 노트 첫장에 '괜찮아'라는 말을 적는 일이라도, 일단 시작하고 보는 게 좋겠다."
지난 주에 이 배를 탔던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이 약간 뜬금포 같은 출간이었다면, 미셸 푸코의 <나, 피에르 리비에르> 또한 그렇다. 왜 하필 지금, 푸코의 책 중에서도 이 책인가? 묻는다면 사실 할 말은 없겠다. 물론 이 책이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곳에 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 그냥 즐기며 읽으면 좋겠다.
1835년, 어머니와 누이, 남동생을 끔찍하게 살해한 피에르 리비에르 사건을 둘러싼 각종 담론들 그리고 그 스스로 작성한 수기를 그대로 제시한 1부와,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약 2년여에 걸쳐 진행된 콜레주 드 프랑스의 비공개 세미나에 참여한 연구자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사건을 분석한 논평이 실린 2부로 구성된 책은 '자극적인' 소재만큼 그 자체로도 흥미진진하다.
"국내에 처음 번역되어 소개되는 <나, 피에르 리비에르>는 미셸 푸코의 지적 여정의 지극히 중요한 한 단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리비에르 사건에 대한 푸코의 문제의식을 살펴보면, 이 책이 <광기의 역사>와 <감시와 처벌>의 중간에서 필연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역자 해제' 중에서. (그러니까, 이런 의미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단 말이다)
<세계의 모든 신화>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류의 책이다. 이 책은 신화에 관심이 있지만 그리스 로마 외에 어떤 신화를 읽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입문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태평양 섬, 켈트족, 북유럽, 인도, 중국, 일본 신화에 이르기까지… 국내에도 적지 않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Answer Man' 케네스 C. 데이비스가 모아놓은 신화들은 그 자체로 화려한 종합세트라 할 만하다.
<근대의 책 읽기>, <끝나지 않은 신드롬>의 천정환 교수가 이번에 주목하는 것은 '앎의 역사'다. 촛불집회 등을 통해 우리에게도 널리 익숙해진 '대중지성'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 대중지성의 문화론을 개괄적으로 다루는 1부와, 우리 근대에서 나타난 '아래로부터의 지성사'를 추적하는 2부로 구성된 책은 더 많은 연대와 소통을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이젠 '설득'을 넘어 '조종'을 말하는 책이 출간 되었다. 제목부터 <인간 조종법>이라니! 물론 책은 빠져나갈 구멍을 둔다. 부제의 '정직한 사람들을 위한'이 그것. 결국 이 책은 남을 조종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남에게 조종을 받고 싶지 않은 인간을 위한 책이라는 말이겠다. (푸훗) 어쨌거나 책은 재미있다. 심리학에 관심이 있거나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읽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종이라는 부분은… 뭐 그렇게 많은 책이 팔렸다고 사람들이 다 '설득가'가 된 것 같지는 않으니 걱정할 건 없겠다.
두툼한 역사책들을 이렇게 놓고 보면 어딘가 묘한 기분이 든다. 훗날 사람들은 우리의 시대를 어떤 식으로 이름 붙일까, 생각이 절로 들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이야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또한 이미 지나간 역사를 수없이 새로 쓰고 있으니.
<르몽드 세계사>는 잘 와닿지 않는 제목이다. 조금 더 직관적으로 와닿는 키워드는 사실 '아틀라스'다. <변화하는 세계의 아틀라스>, <아틀라스 세계사>처럼 지도들을 통해 세계사를 풀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굳이 '아틀라스'라고 붙이지 않은 출판사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지도엔 아무 관심도 없는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전혀 부족함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정교한 지도와 도표에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은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 되었던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과 쌍을 이루는 책이다. 20세기 인류사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2차 세계대전을 950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으로 기록한 책은, 그 분량답게 그동안 소흘히 다루어졌던 동부전선과 태평양 전선까지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고 한다).
<로마 제국 최후의 100년>은 로마 시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이다. 출판사 분의 말을 빌자면 "로마 하면, <로마인 이야기>, <로마제국 쇠망사> 그리고 <로마 제국 최후의 100년> 이렇게 세 개죠"라고. 그 정도의 자부심이라면 믿어 볼만 하지 않을까? 제목에서 나타나듯 이 책에서 집중 조명하고 있는 것은 '서로마제국의 이상한 죽음'이다. 서로마제국 종말의 파노라마가 "드라마, 번뜩이는 지성, 날카로운 분석"('선데이 타임스')과 함께 펼쳐진다. 흥미진진.
<대한민국史 1945~2008>는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집필을 주로 해온 저자가 낸, 일종의 한국근현대사 완결편! 이다. 1945년 해방에서부터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까지를 다루고 있는 책은 2008년 11월 현재까지 출간된 한국현대사 책 중에 가장 최근까지를 다루고 있다. 제목으로 인해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史>와 혼동이 있을 법도 하지만…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책이다. 물론 관심 있으신 분은 함께 읽으면 가장 좋겠지만.
오늘 마지막으로 소개할 책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2008 우수출판기획안 공모전" 당선작 4종이다. 1차 당선작으로 총 8종이 선택되었고, 이번에 네 권이 함께 나온 것. 나머지 4종은 이미 8월에 출간되었던 책세상의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와 곧 출간될 <17세기 대기근>(푸른역사), <과학 비평>(사계절), <전방위 글쓰기>(바다출판사).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공모전에서 선정된 책들이니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 좋을 것 같다.
** 이번 주에는 정말 커다란 책들이 꽉꽉 차있네요. 뿌듯하기도, 조금 걱정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배는 출발합니다.
** 고맙습니다. 이번 주도 만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