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보위를 들으며 아이라이너를 그리던 남자. 멀대 같이 큰 키에, 어딘가 풀린 눈을 하고 있지만 실은 그리 위험하진 않은. 워즈워스의 시를 외우고, 뉴욕에 가고 싶어하고, 시와 소설과 노랫말을 쓰던 남자. 낮에는 고용센터에서 일을 하지만, 밤에는 발작적으로 춤을 추며 노래를 하던, 댄스 댄스 댄스 댄스 투 더 라디오, 라며 팔을 휘젓던 그 남자.

영화 '콘트롤'과 그 안에서 그려진 이안 커티스 얘기다. 안톤 코뷘의 이력에 비추었을 때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무난한 영화였지만 그렇기에 감동적이었다면. 밥 딜런을 그렸던 영화 '아임 낫 데어'와 비교하면 명확하게 갈리는 지점. 여기에서 불거지는 것은 역사와 그 재현의 문제다. 일어났던 사건으로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그 역사를 다시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 라는.

(물론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다. 영화를 보며 든 생각은- 아 정말 어떻게 저렇게 똑같은 배우들을 캐스팅 했을까, 노래는 누가 하는 거지?, 버나드 섬너는 (웃음), 피터 훅은 분쟁이 해결되지 않아 '후키'라고만 나온걸까, 그렇다면 New Order의 새 앨범은 당분간 요원한 걸까 같은…)

그래서 일단은, 역사와 그 재현에 관한 몇 권의 책들로 시작하는 이번 주의 만선.

 

 

 

 

 

 

 
지난 금요일이 10월 혁명의 91주년이었다고 한다. (10월 혁명은 당시의 구력 기준으로, 현재의 역법으로는 11월 7일이라고) 그에 맞춰 나온 책이 바로 <10월 혁명>이다. 부제는 볼셰비키 혁명의 기억과 형성. 기존의 연대기적 서술을 탈피, 새로운 역사 서술을 시도하는 책은 그러나 표지의 '요즘 취향'(?) 글자체와는 달리 그리 녹록한 책은 아니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어떻게 해서 '성공한 혁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지 그 형성적 측면을 '기억'과 '내러티브'라는 테마를 통해 살피는 책이다. 또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모더니즘적 역사 서술을 피하고 사건의 주체들이 그것을 기억하고 구술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혁명으로서의 사건'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여타의 러시아 혁명사 서술과 다른 차별점 및 신선함을 갖는다." - 알라딘 책소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혁명이지만 역시 '기억'의 문제로 혁명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책은 <문화 대혁명 - 또 다른 기억> 이다. '문혁'이야말로 엇갈리는 평가의 스펙트럼이 가장 넓은 혁명임이 분명할텐데, 그 '사이'를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문화대혁명 시기 저자가 노동자의 신분으로 조반조직을 전두지휘하면서 경험한 일을 서술한 회고록이다. 조반조직의 세력 확장으로 열여덟의 나이에 당시 회사 혁명위원회 부주임까지 올라가고, 후난성 치안 업무까지 담당하게 되지만, 결국 문혁이 끝나면서 그도 숙정당하는 처지가 된다. 그는 문혁 10년간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문혁이 단편적이라고 반박하며, 노동자들과 홍위병.중앙.당시 기층 민중들과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 알라딘 책소개

이번엔 <폴 포트 평전>이다. 킬링 필드의 기억. <체 게바라 평전>으로 유명한 역사인물찾기 시리즈의 26번째 책은 킬링 필드를 다시 한번 소환하면서, 그 중심에 섰던 폴 포트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한다.

"저자는 타인을 배려하던 젊은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끔찍한 정권의 지도자로 변해가는지 추적해나간다. 그리고 어떻게 캄보디아를 도탄에 빠뜨리는 최고기획자가 되었는지 냉정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일의 기획자는 폴 포트만이 아님을 분명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폴 포트를 캄보디아 현대사와 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조명함으로써 다각도로 해부한다." - 알라딘 책소개

<사회 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은 위의 세 책과는 조금 다르다. 속칭 <사사방>으로 불리던 책은 사실 우리 세대의 책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이진경'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렸던 책이 다시금 '개정증보'라는 형식으로 우리 곁으로 되돌아 온 것. 이진경은 물론 끊임없이 노력하는 학자이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함의는 무엇일까? 이 '사회과학서적'을 둘러싼 기억,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1980년대 사회구성체논쟁을 대표하는 저작이었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의 증보판. 초판 이후 20년간의 한국사회 변화를 보여 주는 새로운 글 4편을 더했다. 사회과학의 방법론으로서의 '사회구성체론'에 대한 논의를 직접적 주제로 삼았다." - 알라딘 책소개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은 제목 그대로 심리학을 통해 조선왕들의 내면을 분석하고 있다. 옛말처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면, 결국 왕 또한 사람일 터. 오히려 범부 보다 복잡하면 복잡했지 결코 편안하지만은 않았을 그 속을 심리학의 틀을 통해 들여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경성, 사진에 박히다>는 '사진'이라는 신문물을 통해 우리의 근대를 들여다 보는 책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박혀있는 '근대'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사진에 찍힌 근대'와, 그 자체로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채 바꾸었을 '사진'이라는 당대의 신문물과 그로 인해 바뀌어 가는 근대. 생각만큼 도판이 많지 않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럼에도 의미있는 작업임은 분명하다.

<율곡, 사람의 길을 말하다>, <선비의 탄생>은 위의 두 책과 비교하면 그리 멀리 나가지는 못한 책이다. 별로 새로울 것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새로운 것만이 의미있는 것은 아닐 터. '사람다움'이 점점 사라지는, '선비 정신'이 도대체 뭥믜? 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는 요즘, 옛 선비들의 사람됨과 그들이 제시한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살피는 것도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 바퀴 탈 것>은 제목과 표지에서 드러나듯 자전거에 관한 책이다. 제목과 표지에서 잘 느껴지지 않지만 자전거에 대한 '거의 모든 역사'를 담고 있다. 자전거라는 탈 것이 어떻게 발전했는 가에 관한 과학사 일뿐만 아니라, 자전거의 발달과 보급에 따라 우리의 사회가 어떻게 바뀌었나를 동시에 다루고 있는 고급스런 교양서라는 것. 실물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하드웨어 적으로 '그럴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내용도 좋다) 자전거로 출퇴근 하시는 분들은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왜 자전거냐?"라고 물을 때, 단지 "건강에 좋아서"라고 하는 것보단 훨씬 폼나지 않겠는가.

<추의 역사>는 <미의 역사>에 이은 움베르토 에코의 책이다. 시각 문화와 예술 작품 속의 '추'의 개념이 변화하는 과정을 탐구하며, 역사 비평을 통해 '추'의 기호학을 구축하고 있다. 품질 좋은 도판에 에코의 글. <미의 역사>를 읽었거나 읽지 않았거나, 군침 도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오늘 마지막으로 소개할 책은 앨피 출판사의 Critical Thinkers 시리즈 16번째 책, 바로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다. 이 시리즈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의 하나다. 더할 나위 없이 세련된 표지에 내용 또한 훌룡하다. (시공 로고스 총서 또한 균형잡힌 입문서로 손색이 없는 시리즈이지만, Critical Thinkers 쪽이 훨씬 더 압축되고 일관된 주제 선택을 보여주며 무엇보다 로고스 총서는 전부 절판 상태이다)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푸코의 삶과 사상에 대한 최적의 입문서라는 말이 과하지 않다.


 * 주말에 읽은 모리스 나도와 바르트의 대담 중 인상 깊은 구절이 있어 옮겨 놓는다. 일테면 '겨우 존재하는 인간' 으로서의 '나'와 그 '조건'을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제시해주는 말.

모리스 나도 : "모리스 블랑쇼가 비평가란 비非 독자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잡지나 신문의 편집장은 이런 면에서 제곱의 비독자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독서'하지 않으면서 '독서'합니다. 실제로 진정한 독서란 전자의 독서를 말하죠. 그런데 이 전자의 독서, 현재 내가 종사하고 있는 직업 속에서는 나는 그걸 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나는 독서할 의무가 없는 순간에만 진정한 독자가 됩니다."

롤랑 바르트 : "통상 사람들은 극히 잘 다듬어진 완곡어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책을 보았다고 말하죠. 그들은 그것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현재 내가 종사하고 있는 직업 속에서' 나는 아마 세제곱 정도는 되는 비독자일 것이다. 결국 이것은 내가 '본' 책들의 목록이고, 그것을 옮기기에도 실은 벅차다. 쌓여있는 책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꽤나 가혹한 일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지만, 그것은 '제곱'의 '목숨을 건 도약'이 된다!

"공통 규칙을 갖지 않은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교환)은 반드시 '가르치다 - 배우다' 또는 '팔다 - 사다' 관계가 될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탐구 1> 중)

'가르치다 - 배우다'는 고진의 논리에서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즉 그것은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나와 '타자'의 비대칭성을 전제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언어와 비극!) 물론 그것은 마르크스를 빌자면 '목숨을 건 도약'이다. 그렇다면 내가 쓰고 있는 이런 글은 (고진 적인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고 있는 동시에 '팔기'를 시도하고 있으니 분명 '목숨을 건 도약' x 2 이 아닌가?

(계속 이런 헛소리를 하다간 정말로 목숨이 남아나지 않겠네요… )

* 헛소리는 그만두고 배는 떠납니다; 추운 월요일 아침이네요. 고맙습니다. 이번 주도 만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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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rberry sport 2011-12-28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제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언어와 비극!) 물론 그것은 마르크스를 빌자면 `목숨을 건 도약`이다. 그렇다면 내가 쓰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