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살아 있는 지구

 북극의 곰을 좋아하세요? 언젠가 근엄하기로 소문난 독일 국민들이 아기곰 '크누트'가 커버리자 (더이상 귀엽지 않다는 이유로) 비통에 잠겼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새하얀 아기 북극곰은 분명 사랑스운 존재이긴 해요.

하지만 그것은, (동물을 대상화하는) 다분히 인간중심적인 관점이 아닐까요?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엄마 곰 아기 곰> 같은 촉감 그림책을 만나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하얀 털을 쓰다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지만… 

저 역시 마냥 귀엽게만 보던 북극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다큐멘터리 [살아 있는 지구]의 '혹독하고 고독한 극지방' 에피소드 때문이었습니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먹이를 찾아 떠나는 북극곰 일가를 보게 된 것이지요.

과연 북극의 삶이란 혹독하고도 고독해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북극곰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자연 그대로의 북극곰의 모습. 바다표범을 공격하고, 하얀 털에 빨간 피를 뒤집어쓰고, 다시금 먹이를 찾아 찬바다를 헤엄치는 북극곰의 모습은 그저 놀라울 따름.

오직 살아남기 위해 빙산에서 빙산으로 헤엄치던 북극곰은 때때로 다음 목적지에 채 닫기도 전에 힘이 빠지곤 합니다. 지구 온난화로 북극의 빙산들이 점점 녹아내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북극곰의 죽음에 우리 모두 일말의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책임이 있는 것이 비단 그 뿐만은 아니겠지만요). 이렇듯 [살아있는 지구]는 제게,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같은 집을 공유하며 살고 있음을 새삼 새기게 했어요.

하여 이 다큐멘터리를 설명하는데 "BBC 제작-제작비 300억-제작기간 4년-에미상 4개 부분 수상" 등의 수식이 얼마나 필요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꿈틀대는 지구에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우리의 빈약한 상상을 뛰어 넘는 동물들의 치열한 삶에 그런 수식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여 이 동명의 책에도 별다른 수식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영상매체에서 인쇄매체로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그 감동을 오롯이 담아냈다는 것, 오히려 책이라는 매체의 장점을 십분 살려 더욱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는 것, 그 정도로만. 시원한 판형에 아름다운 사진만으로 보는 이를 뿌듯하게 하는 그런 책입니다.

* 이런 분께! - 다큐멘터리의 감동을 잊지 못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위대한 아름다움이 궁금하다면
* 이 책도 함께! - <자연의 빈자리>, <인간 없는 세상>


2. 지젝이 만난 레닌

물론 인간 역시 지구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의 동물이고, 비록 혹독하고 고독한 극지방은 아니더라도, 그 삶이 평탄할리만은 없죠. 실은 고민 투성이에요. 자, 그러면 문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많은 대답이 있어왔고, 또 있겠지만 여기 한 번쯤 생각해 볼 대답이 있습니다.

"레닌을 재현실화한다는 생각에 대한 공중의 첫 번째 반응은 물론 빈정거리는 폭소다. 마르크스는 좋다. - 오늘날에는, 심지어 월 스트리트에도, 여전히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본주의의 힘을 완벽하게 묘사한 상품의 시인 마르크스, 우리 일상 생활의 소외와 물화를 보여준 '문화 연구'의 마르크스. 그러나 레닌은 - 안 되지, 농담이겠지!" 라고 스스로 책을 시작하는 지젝.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레닌일까요?

지젝이 주목하는 부분은 "오늘날의 좌파가 진보 운동의 시대 전체의 종말이라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1914년 레닌의 시대에 "진보에 대한 목가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믿음만이 아니라, 그것과 동행했던 사회주의 운동도 사라졌"던 "세계 전체가 사라진 재앙"과의 역사적 유사성입니다.

그리하여 지젝은 이렇게 말합니다.

"'레닌'은 낡은 교조적 확실성을 가리키는, 노스탤지어에 젖은 이름이 아니다. 정반대다. 우리가 건져내야 할 레닌은 낡은 좌표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 상황, 재앙에 가까운 그런 새로운 상황에 내던져지는 근본적인 경험을 했던 레닌이며,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마르크스 주의를 다시 만들어내야 했던 레닌이다. (중략)

핵심은 레닌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키르케고르적인 의미에서 레닌을 반복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똑같은 충동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레닌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노스탤지어에 젖어 '좋았던 옛 혁명기'를 재상연하자는 것도 아니고, 낡은 강령을 '새로운 조건'에 맞게 기회주의적-실용주의적으로 조정하자는 것도 아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조건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914년의 재앙으로 오랜 진보주의 시대가 정치·이데올로기적으로 붕괴한 뒤에 혁명적 기획을 다시 만들어낸 레닌의 행동을 현재의 세계적인 조건에서 반복하자는 것이다."

어때요? 우리 시대의 가장 논쟁적인 (스타) 철학자 지젝의 제안이. 1부는 1917년 2월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10월혁명이 성공하기까지 쓴 레닌의 핵심 텍스트 중 지젝이 직접 편집한 텍스트가, 2부는 이러한 레닌의 사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바로 여기의 문제로 되살려내는 지젝 자신의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이렇듯 현실과 맞닿은 주제와, 정영목 씨의 유려한 번역으로 지금까지 번역된 지젝의 어느 책 보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미덕입니다.

* 이런 분께! - 지젝이 좋다(싫다/궁금하다)면, 21세기에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궁금하다면
* 이 책도 함께! -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혁명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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