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읽을 것인가 - '모든 읽기'에 최고의 지침서
고영성 지음 / 스마트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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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영성 작가의 책들은 대부분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와 근거들을 분석해 나열한다. 그러한 예시들로부터 우리들은 충분히 납득이 가능해지며 공부에 대한 자신감을 근거할 수 있게 된다. 어찌 보면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고 그에 해당하는 책을 내놓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작가의 공부법에 관한 꾸준한 출판이 의구심을 갖게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 작가가 정말 공부라는 개념에 대한 명확한 방법론들을 쉽게 아려주어 그것으로부터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열혈 작가라고도 생각한다. 이 책도 그의 다른 책들처럼 좋은 공부방식에 대한 책이다. 어디서도 접근하지 않았던 책을 읽는 방식의 하나부터 열까지의 모든 방식들을 연구하여 소개했다. 그것만으로도 가르치고자하는, 연구자, 작가로서의 열의가 아주 강해보이고 또한 그걸 설명하는 방식도 무척 친절하단 것을 느꼈다. 감명 깊고 크게 와닿은 책은 아니였지만 나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읽기 방식에 대해 고민을 해보면서 나와 적합한 단계를 찾으려 할 것이다.

p 94
남독은 특정 주제나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게 책을 읽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남독은 우리에게 세 가지 변화를 준다. 남독을 하게 되면 당신은 까칠해지고(비판적 사고), 엉뚱해지며(창의적 인간), 겸손해질(세계의 확장) 것이다.

p 101
결국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말콤 글래드웰이, 그리고 천재 경제학자 레빗이 설득력 있는 근거로 비판받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어느 누구라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인물의 주장이라 해도 의심해 봐야 하며,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인물이라 할지라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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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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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 합리적인 상황 판단과 계산들만이 존재하고 정확한 답에 의해 지배되는 경제의 논리.

작가는 그러한 현실을 줄곧 서술하면서 그것에 가려진 숨은 인간의 이타성에 대해 페미니즘을 빗대어 설명한다.

애덤 스미스가 경제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 있던 또 다른 누군가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회에서는 여성이 비주류적인 존재로서 취급당하며 그들의 노동은 노동이 아니고 당연시되었다.

그런 경제성의 원칙에 해당하지 않던 노동들은 결코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가치들이다.

경제학과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들이 절묘하게 오가면서 충분한 생각이 피어오르게 되었다.



-권위에 의한 안도감일까. 

높은 지위의 고전이 나의 행위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보며 위안을 받는다.

편향된 정보만을 취하려는 나의 모습인가? 칭찬을 받았기에, 인정을 받았기에 느껴지는 안도감일까?

과연 그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것일까? 결국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갈망했던 것이 아닐까?

나와의 낯선 생각들, 반하는 생각들을 어디까지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p 22
경제학은 돈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경제학은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살피는 학문이었다. 본질적으로, 경제학은 주어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익을 보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기술하는 역사였다. 모든 상황에서, 결과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p 30
애덤 스미스는 식탁에 앉았을 때 푸줏간 주인과 빵집 주인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교환을 통해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애덤 스미스의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른 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 때문이었다.

p 48
시장이라는 기계는 사람들의 평범하고 기본적인 감정 같이 단순한 것을 가지고 세계 평화와 모든 이의 행복을 창조해 내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따라서 모두가 이 이야기에 매혹된 것도 놀랍지 않다. 착취를 개인적 악감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급 7000원을 받으며 등골이 휘게 일하는 여성도 사악한 누군가가 강요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책임져야 할 사람도 없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그리고 경제학은 피할 길이 없어. 우리의 본성에 있으니까. 사실 그게 우리이ㅡ 본질이야.

우리는 모두 경제적 인간이니까.

p 60
인간이라면 지성이 육체를 장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성은 이러한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여성은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사회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남성이 ‘정신‘이, 여성은 ‘육체‘가 되었다. 남성이 육체적으로 해방되기 위해 여성은 점점 더 육체적 현실에 얽매여 갔다.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생물학적 이유를 대며 가볍게 넘어갔다. 수백 년 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은 변화할 수도, 변화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것‘과 ‘가능한 것‘ 사이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도록 배웠다. 남성과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곧 정치적 위계를 정당화 했으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곧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p 74
당신이 할머니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고 초콜릿 푸딩을 먹는 것도 좋아한다고 가정해 보자. 주류 경제학 모델은 당신이 할머니를 영영 보지 못하는 것을 상쇄할 만한 푸딩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 모델은 인생에 있어 대부분의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 80
경제학을 조금도 공부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해가 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경제학적 논리‘라는 것은 그냥 아무 논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거대한 담론‘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근본적인 동기가 경제적이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을 어떻게 조직해야 우리의 가장 내적인 본성에 이로운가를 알려 줄 수 있다. 우리의 가장 내적인 본성은 물론 ‘이익을 거두는 것‘이다.

p 83
서머스가 제안한 모델은 이런 가능성을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다. 미스터 케이가 얼마나 배고픈지는 상관없다. 그는 여전히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개인으로, 자신이 하는 일을 완벽히 제어할 능력이 있다. 그가 미스터 지의 쓰레기 처리장 역할을 하는 데 동의하는 것은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이 흠잡을 데 없는 경제학적 논리에서는 오직 무인도에 고립된, 각각 필요한 것이 있는 두 명의 개인만을 본다. 맥락도, 미래에 대한 고려도, 연결 고리도 없다.

p 86
자유라는 단어는 단어에 불과하다. 정말로 단어에 불과하다.
경제학자들은 자기들이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모델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에 대한 비판은 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샅샅이 연구하면 진실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모든 것이 경제적 인간이라는 진실 말이다.

논리도 하나. 세상도 하나. 존재하는 방법도 하나. 백합은 무슨 백합?

p 90
그러나 직장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집안일을 풀타임으로 돌봐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여성들은 직장에서 일하지만, 그 시간 동안 집안일을 돌볼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 만큼의 재력이 있는 소수에 불과하다. 청소하는 사람의 집은 누가 청소해 주는가? 보모의 딸은 누가 돌보는가? 이는 결코 수사적인 질문이 아니다. 세계경제를 감싸고 있는 복잡다단한 돌봄 체계를 들여다보지 않고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p 158
정신병을 앓는 환자들 중 많은 수가 자신 외에 모든 사람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나의 강박적 행동과 규칙들은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정신병동의 불을 끄면 환자들은 괴로워하고 비명을 지르고, 이 공허한 비명 또한 수요의 한 형태로 해석된다. 세상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궤도를 다라 계속 돈다. 가히 지옥의 회전목마라 할 수 있다. 처음에 투입한 자원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 내야 한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함께 행진하는 군부대에 소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혼자다. 하나의 논리, 하나의 세상, 그리고 우리는 결국 혼자만의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고집해 마지않는 세상의 모습이다.

p 174
우리가 경제적 동기 부여 체계를 도입하는 것은 경제적 힘이 우리의 추동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보상이 다른 모든 추동력을 밀어내고 만다. 경제적 인간이 상황에 뛰어들어 도덕적, 정서적, 문화적 고려대상들을 모두 쓰러뜨린 셈이다. 그 고려 대상들이야말로 돌아보면 경제가 기능하고 발전하는 데 엄청나게 중요한 것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규정된 시장 원리는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을 파괴할 위험성까지 커진다.

p 179
경제학은 ‘사랑을 아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사랑은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다. 그리하여 배려, 공감, 돌봄 등의 덕목들은 경제적 분석에서 밀려났다. 어떤 행동은 돈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어떤 행동은 배려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절대 만나선 안 되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똑같은 현상이 대칭처럼 반대편에서도 일어났다는 점이다. 사려 깊음, 공감, 돌봄 등에 관한 논의에서 돈과 부에 관한 이야기가 빠진 것이다. 어쩌면 이야말로 현재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남성에 비해 훨씬 열등한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p 185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돈이나 선의 중 한 가지 요인만이 동기가 된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다. 게다가 이 개념은 성별에 관해 우리가 가진 이미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남성은 자기 이익 추구라는 본능에 의해 나아가고 여성은 전체적인 그림을 조화롭게 만드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본능이 성별에 관계없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사실 그것이 진실에 더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p 207
경제적 인간은 이러한 세상의 주인공이다. 그는 이 세상에 영감을 주고, 이 세상을 합리화 하는 존재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은 자신을 설명하고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즉 부자들을 더 큰 부자로 만들면 우리 모두에게 이득이라는 논리 말이다. 신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경제적 인간은 우리에게 다른 가능성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경제적 인간처럼 행동하는 한 다른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p 220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자본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노동과 자본 사이의 갈등을 간단히 해결한다. 즉, 인간의 삶을 시장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일련의 투자 행위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빵 한 쪽과 생선 한 마리로 신도들을 먹이는 것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구나 먹고살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당신의 능력을 믿는다. 험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 그리고 우주가 우리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관점은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었다. 실업자 센터를 찾는 여성이나 다카 공항에서 위조 서류를 기다리는 남성 모두 자신의 기업을 경영하는 기업가들이다. 시차가 여덟 시간 나는 곳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에서 발을 뻗고 몇 시간 눈을 붙이려 누운 CEO와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단지 자신이라는 자본에 투자를 잘했는지 못했는지의 차이, 그리고 태어날 때 주어진 첫 자본금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성장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어떤 여성 연예인은 가슴 확대 수술이 ‘투자‘였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한겹 한겹 걷어 내고 나면 결국 모든 것이 경제학이다. 우리의 삶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일련의 투자에 지나지 않는다.

p 276
경제적 인간의 모든 특성이 우리가 남성성이라고 규정한 모든 특징과 일치하는 데서 문제가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특성들이 우리가 여성성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우월하고 그 위에 군림할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 더 큰 문제다.

영혼을 신체보다 더 정제된 것으로 여기면 우리는 영혼을 남성과 연결 짓는다. 이성을 감정보다 더 정제된 것으로 여기면 우리는 이성을 남성과 연결 짓는다. 특정적인 것보다 보편적인 것이 더 낫다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보편적인 것을 남성과 연결 짓는다.

p 286
우리의 관계는 경쟁으로만 한정할 필요가 없다. 자연을 적대적인 상대로 간주할 필요도 없다. 모든 부분을 합친 것보다 전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은 기계 혹은 정교한 기계적 움직임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경제적 인간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헛되다 느낄 수 있는 상황은 많지만 이 문제 만큼은 헛되다 외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정의 목표는 바뀔 수 있다. 세상을 소유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애쓰는 여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소유는 집착이다. 죽은 물건을 손으로 감싸고 "이건 내 거야"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반면, 세상을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은 무엇이 자기 것이라고 선언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바로 그대 우리는 신발을 벗는다.

한동안 그곳에 머무를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p 298
주류 경제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페미니스트적 관점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시켜야 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의 임무다. 페미니즘의 관점은 불평등부터 인구 증가, 복지 혜택, 환경, 그리고 노령화 사회가 곧 직면하게 될 돌봄 인력의 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깊은 관련이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권리‘ 이상의 훨씬 큰 문제에 관한 것이다. 현재까지는 페미니즘 혁명의 절반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성들을 더해서 젓는 것까지는 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 깨닫고, 그 새로운 세상에 걸맞도록 사회, 경제, 정치에 변화를 가져오는 일을 해내는 것이다. 경제적 인간을 단상에서 내려오게 해서 작별을 고하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더 폭넓게 포용할 수 있는 경제와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그것을 혁명이라 부를 필요는 없다. 그저 향상이라고 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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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수업 -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질문
박웅현 외 지음, 마이크임팩트 기획 / 알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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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에 관한 인간 내면에 대해 탐구할 수 있게 생각의 여지를 주는 책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타인에게, 문화와 사회를 위해 탐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각자의 방편을 마련해 주는데,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이 각기 다른 주제로써 하나로 수렴이 되는 의의에 대해 강의를 한다. 가장 본질적인 질문.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해주는 책.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기 때문에 없던 지적 호기심도 생겨나며 빠져들게 된다. 강의의 궁극적인 메세지는 결국 나은 세상으로의 변혁을 제시하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나의 삶의 태도를 갖추어 험한 세상을 살아나고자 하는 것. 무척 유익하고 가슴뛰는 책이었다.


p 17
성 베네딕투스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면서 공부를 그만둡니다. 공부를 하면 계속 의심하고 물어야 하는데, 신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의문을 갖는 자신을 보며 이를 신성모독이라 여기고 그냥 예전처럼 신앙생활에 집중하기로 한 거죠. 신의 권위만 믿기로 한 겁니다.

이처럼 그리스 로마시대와 중세시대의ㅡ 결정적인 차이는 ‘질문‘이었습니다. 질문이 사라진 중세는 그야말로 암흑시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요.

p 29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배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니다. -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p 32
"그래, 나만의 일, 그것을 위해 내 삶을 위험에 몰아넣었고 그것 때문에 내 이성의 절반은 암흑 속에 묻혀버렸다. 그런데 너는 장사꾼에 속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너는 아직도 진정한 인간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 진정한 너 자신의 것을 선택할 수가 있다. 진정 네가 원하는 것이 무얼까?" - 파스칼 보나푸의 <반 고흐 : 태양의 화가> 중에서

p 33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 좋죠. 좋지만, 그것들이 모든 사람에게 권장할 만한 책일까요?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이 나만의 권장도서를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타인에게 묻지 마시고요. 그러려면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럴 만큼 내가 훌륭하지 않다는 거예요. 너무 내가 ‘찌질‘하게 느껴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찌질‘하지 않은, 사람 없습니다.

p 34
그는 오직 첼로 연주를 할 때만 천재인 겁니다.... 어떤 연주는 그다지 훌륭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사람에게는 기복이란 게 있습니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는 없어요. 이렇게 볼 때 천재란 순간적인 현상일 뿐, 지속적인 상태라고 볼 수 없는 겁니다.
영웅담을 경계하세요. 그리고 지금 여기서 여러분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저를 경계하세요. .... 어쩌다 훌륭한 업적을 수행했다거나 하는 대상을 찾은 순간부터 사회는 편집을 시작합니다. .... 사실 저도 빈틈이 엄청 많아요. ‘찌질‘하고요. 그걸 아시는 게 좋습니다.

"나도 찌질하지만, 쟤도 찌질해. 내가 좋아하는 게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보다 중요해."

p 61
사람들의 가치관은 다 다릅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서로 소통하려면, 그것들 사이에 공통분모가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공통분모는 강요를 통해 얻어져서는 안 되겠지요. 다만 사회의 성원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차이를 좁혀 합의점을 넓혀갈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대다수의 성원이 공동의 것으로 하기로 합의한 것이 이른바 ‘상식‘입니다.

이렇게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사회 공통의 가치관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련된 가치관은 물론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열려 있어야 하고요. 그저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수준을 넘어 사회의 대다수가 합의하는 가치관을 만들어낼 때,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상식을 형성해가는 과정이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p 68
사회가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변한다 해도, 과도기에는 필연적으로 혼란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 혼란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극복되지만, 경제적으로 너무 여유가 없는 이들은 그 짧은 혼란도 참기가 어렵지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가장 잘 사는 사람들과 가장 못사는 사람들이 일치하여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도하는 정당을 지지하다 보니 중산층이 무너지게 되고, 그에 따라 사회는 이념적으로 극단화 되어버립니다.

p 69
저는 이런 현상이 우리의 정치적 결정에 따른 사회 변동의 결과라고 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다 보니, 유일하게 허용된 시간인 ‘과거‘로 눈이 향하게 되는 거죠.

p 73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다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게 애초에 내가 이길 수 있게 디자인된 게임인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정말 중요한 생각 수업입니다.

p 78
정치에 관심을 끊는 것은 우리 삶을 새로이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고, 그저 남이 내 운명을 결정하게 두는 행위와 같습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 안에서 끊임없이 헝거 게임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p 146
진보와 보수 모두 무언가를 지키려고 하긴 합니다. 과연 무엇일까요? 보수는 자신의 이권에 매몰된 나머지 기득권을 지킬 하고, 진보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념에 매몰된 나머지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을 지키려고 합니다.

p 153
즉, 경쟁에 따른 성과를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경쟁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배 없는 경쟁은 무의미합니다. 승자 독식의 경쟁은 스스로 소멸하기 때문에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본연의 의미를 잊고 한국에서는 분배 없는 경쟁이 불공정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p 158
정말 안타까운 것은 진보 진영이 좋은 뜻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대안을 내는 데 무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항상 불평합니다. 그러면서 지난 20여 년간 한국에서 벌어진 경제 문제든, 정치 문제든 모두 그 원인이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합니다.

....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무조건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만 한다고 해서 바뀌는 사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p 175
여전히 경제 성장률이 높은 한국. 그런데 그 성장의 성과는 누가 가져갔을까요? 우리는 왜 가져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잘못된 재분배에 있습니까? 정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요, 기업이 분배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요? 계속해서 이런 방식으로 미래 성장을 추구할 수 있습니까? 혹은 분배 구조를 바꿔야 합니까? 소비를 하려면 소득이 있어야 하고, 소득이 있으려면 분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통로를 막고 산업 구조만 가지고 성장한 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다음 질문입니다.

"한국 자본주의 버리겠습니까, 고쳐 쓰겠습니까?"

p 181
우연을 기대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작은 나비들처럼 다 함께 모여 날갯짓을 한다면, 여러분 스스로 태풍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나비 혁명을 일으키세요.

p 193
저는 창의력이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즉, 기존에 있는 것들 가운데 전혀 관계없는 것들을 서로 잘 연결시킬 줄 아는 능력. 이것이 바로 창의력이라는 것입니다.

p 199
어린 시절 우리는 누구나 호기심덩어리엿습니다. 어린이들은 누구나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있지요. 슬프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우리는 호기심을 잃어갑니다. 반짝이는 눈이 나이가 들어가며, 어른이 되어가며 사라집니다. 왜일까요? 바로 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호기심은 자꾸 새로운 것을 접할 때 생겨나게 마련인데, 그러려면 자꾸 놀아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의 뇌를 놀게 만들어주세요.

p 216
그것보다는 자기 나라와 문화에 자부심을 가진 현지인들을 만나 나와는 어떻게 세상을 다르게 보고 나와는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하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겁습니다. 이런 경험은 저의 가슴과 머리를 넓혀주고, 다르게 보는 방법,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또한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더 나은 나를 만들어주기도 하지요. 그래서 여행은 산교육입니다.

p 252
‘인간은 당연히 사회적 존재 아닌가‘라고 투덜대는 분도 있을 지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사회적인 것을 자신이 얼마나 갖고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내게 문제가 생기면 누구와 의논하는지, 의논할 수 있는 대상이 몇이나 있는지, 한두 명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을 넘어 회의를 소집하고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원을 공유해왔는지 한번 되돌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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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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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의 기저에 깔려있는 뿌리 깊은 여성혐오의 모든 원인과 인습들을 들추어내며 우리에게 당연스레 여겨졌던 것을 환기시킴으로써 좀 더 평등한 사회로의 목소리를 지향한다.

나는 원래 여고 남고를 구분 짓는 것이 성적 차별을 더 심화시키는 현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사실은 남녀공학 속에 여자들은 조연처럼, 그리고 여성이라는 정해진 이미지에 갇혀진 채 더욱 억압이 되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남고에서 만연하게 행해지는 호모소셜의 형식에 대해서는 인식의 개선이 필요할 것이다.


호모 소셜이라는 개념. 호모소셜의 사전적 의미는 동성끼리만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는 단어인데 이 내용은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남성들이 같은 남성을 남성이라고 인식시킴으로써 그에 반하는 다른 이들을 배제하고 자기들만의 소셜(사회)을 만들어낸 현상이다. 여성은 당연히 그런 호모소셜 속에서 객체화가 되어지고 자신들이 정해놓은 남성이라는 틀에 어울리지 않는 남성들도 객체 취급을 하며 배제시킨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런 현상을 느껴왔다. 호모소셜이라는 구체적인 용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사회가 제시하는 평균적인 남자의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내 모습에 같은 동성들은 나를 특별하다고 여겼다. (다행히 그렇게 차별적인 친구들을 만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냥 저냥 지내왔다.) 나는 어릴 적 그런 내가 이상한 걸까?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잘못되었고 나는 이상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욱 사회가 만들어 놓는 이런 틀들을 깨기 위한 노력이 절실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통하여 내가 알고 있던 기존 성에 대한 개념의 폭이 매우 넓어지고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의 역할들을 심리학적, 기호학적 측면으로 풀어내니 더욱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내가 여성이 아니라고 해서 안도하는 행위는 온전치 못하다. 진정한 사회의 평등을 원한다면 낡은 사고를 걷어내고 불편을 감수하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해야 한다. 현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혐오의 시선과는 개별적으로 인습적이게 느껴지던 의식들에 대해 상기해볼 수 있었다. 욕망에 대한 문제에 대해 더욱 깊은 고민을 해보아야겠다.

p20 - 하지만 고상한 척하며 성을 탐구하는 소설 대부분이 깜짝 놀랄만큼 통속 포르노의 정석을 따라 전개된다. 포르노의 철칙은, 유혹하는 이는 여자이어야하며 마지막에 가서는 쾌락에 지배될 것이다. "유혹한 건 여자라고. 나는 나쁘지 않아"하며 남자의 욕망을 면책시켜주는 대단히 단순한 장치이다. 저항하는 여자를 억지로 눕혀 범하는 강간물에서조차 결국에는 여자의 쾌락으로 끝이 난다. "왜 그래, 너도 좋았잖아"하고 말하는 듯 말이다. 마치 여성기는 어떠한 고통이나 폭력도 쾌락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다. 포르노그래피의 도달점이 남자의 쾌락이 아니라 여자의 쾌락이라는 역설은 전혀 수수께끼가 되지 못한다.
여성의 쾌락은 남성의 섹슈얼리티 달성을 재는 측정가능한 지표이며 남성에 의한 여성의 성적 지배가 완성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p36 -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부인하는 몸짓은 이질적인 것을 배제하는 몸짓보다 더욱 격렬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쟤는 고추도 안 달렸나봐‘ 같은 표현은 남성 집단에 있어서 구성원 자격의 실추를 의미하는 최고의 욕설이 된다. 남자 자격이 없는 남자를 남성 집단으로부터 추방하는 표현이 ‘고추 떨어짐‘ ‘계집‘과 같은 여성화 레토릭을 수반한다는 점은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남성 집단에 매복해 있을지 모르는 계집에 대한 경계는 주체 위치로부터의 전락, 즉 ‘나도 언젠가 성적 객체화 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의미한다. 때문에 남성 집단 사이에서는 계집에 대한 마녀사냥이 격렬하게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을 ‘호모포비아‘라고 한다. 성적 주체로서 남성 집단이 가진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호모포비아는 필수불가결하다.

- 포르노 규제가 연령 제한 표시나 액세스 제한 같은 수법으로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을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잔혹한 상상력이라 할지라도 표상의 생산 그 자체를 단속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단속하지 않는 것이 좋다. 표상과 현실의 관계는 반영이나 투사와 같이 단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꿈과 같이 보상이나 보완과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우리들은 상상력 속에서 줄기차게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현실 속에서 누구도 죽이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158 - 사람은 여성이 될 때 여성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혐오의 모든 것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 범주가 부여하는 지정석에 안주하면 ‘여성‘은 탄생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란 그 지정석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 여성 혐오에 적응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 때문에 여성 혐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는 없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이 여성 혐오와의 갈등을 의미한다. 여성 혐오를 가지고 있지 않은 여성에게는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때때로 "나는 내가 여자라고 하는 사실에 얽매여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고집하는 여자들이 있는데 그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나는 여성 혐오와의 대결을 줄곧 피해왔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 ‘도쿄전력OL‘은 자주적으로 개인 매춘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성적 객체‘ 가 됨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고 승리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중독시킨 황홀감의 정체였다.
‘주체적으로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통해 여자는 무엇을 달성하려 하는 것일까? 물론 남성을 단순한 성욕으로, 단순한 성기로 환원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하고 있는 바로 그것과 같은 일을 함으로써 그녀는 남자들에게 필사적인 복수를 한다.

-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두 가치 모두 남성에게 인정받고 승인되는 가치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A씨는 회사에서 출세하여 능력있는 여자로 칭찬받고 싶다는 ‘아버지의 딸‘로서의 남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남성 성욕의 대상으로서 선택받고 싶다는 여성적 욕망도 가지고 있었다. 두 경우 모두 남성은 승인을 부여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 그리고 승인을 부여하는 자의 모순은, 그가 승인을 구하는 자에게 깊이 의존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여성 혐오란 그 모순을 간파한 남자들이 느끼는 여성에 대한 증오의 대명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그래 맞아. 진짜 여자는 너무 감정적인 것 같아. 나도 그게 싫어" a양이 말한다.
"근데 너는 좀 특별하잖아." 남자가 인정한다.
"응. 나는 평범한 여자는 아니지" 그녀는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그러나 이 ‘예외‘를 통해 평범한 여성에 대한 멸시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다. 그녀는 호모소셜한 남성 공동체에 명예남성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나 그것은 표면적인 인정에 불과하며 같은 동지로 여겨지는 일은 결코 없다. 마치 백인 중산층 사회에 들어간 흑인과도 같다.
"검둥이 노예는 틈만 있으면 속이려 들고 사기를 치려고 하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안 돼. 자네? 자네는 특별해. 우리랑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까."
중산층 집단 속에서 이런 말을 들은 흑인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동조하여 차별을 조장하는 쪽에 설 것인가, 아니면 화를 내고 그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것인가.

​p288 - 남자는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남성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남자는 남자들의 집단에 동일화하는 것을 통해 남성이 된다.
남자를 남성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남자들이며 남자가 남성이 되었음을 승인하는 것도 다른 남자들이다. 여자는 기껏해야 남자가 남성이 되기 위한 수단, 혹은 남성됨의 증명으로 부여되거나 쫓아오는 보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여자를 여성으로 만드는 것은 남자이며 여성됨을 증명하는 것도 남자들이다.

​p289 - 남성에게 이성애 질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이 성적 주체임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성애 장치 아래에서 남자와 여자는 대등한 짝이 될 수 없다. 남성은 성적 욕망의 주체, 여성은 성적 욕망의 객체 위치를 차지하며 이 관계는 남녀 사이에 비대칭적이다. 이성애 질서란, 남성은 동성 남자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되며 남성이 아닌 자만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하라는 명령을 가리킨다. 뒤집어 말하면 남성에 의해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된 자는 남성 아님=여성이 된다. 그것이 남성일 때 그자는 여성화, 즉 여자 같은 남자가 된다. 여기서 여성이란 그 정의상 남성의 성적 욕망의 객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의 성적 욕망을 환기시키지 않는 여자는 정의상 ‘여자가 아니게‘ 된다.
호모소셜한 집단이란 이처럼 성적 주체임을 서로 승인한 남자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여성이란 이 집단으로부터 배제된 자들, 오로지 남자들에게 욕망되고 귀속되고 종속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들에게 부여된 명칭이다. 따라서 호모소셜한 집단의 멤버가 여성을 열등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 욕망의 삼각형에서 욕망의 주체는 남성으로 제한된다. 삼각형 속에서 여성은 의사가 존재하지 않는 욕망의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객체에 대한 욕망을 통해 남자들은 자신들이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욕망의 주체라는 사실을 확인한. 남성이 욕망하는 여성의 가치가 여성이 욕망하는 남성의 가치보다도 척도가 일원적이며 단순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은 자신이 획득한 가치를 다른 남성에게 과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p305 - 불쾌함을 느끼며 책을 쓰고 불쾌함을 느끼며 독서해야 하는 책을 쓴 것은 어째서일까? 아무리 불쾌하다 하더라도 눈을 돌리면 안되는 현실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앎으로써, 설사 쉽게 달성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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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시간만 일한다 - 디지털 노마드 시대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
팀 페리스 지음, 최원형.윤동준 옮김 / 다른상상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삶을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 일의 능률을 극대화 시키는 책. 그러한 내용에 아주 걸맞는 제목을 하고 있다.
이 책은 마인드의 정립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소개하는데 사실 그런 방식들은 줄곧 봐오던 여느 자기계발 서적과 결을 크게 달리하지 않는다.
직장 생활을 하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일들을 억지로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적합할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그렇지만 결국은 일을 확실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자본가가 되라고 소개하는 것만 같았다.
미국 내 베스트셀러라고 하니까 이 책으로 더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리 신박한 책은 아니었다.
그나마 눈길을 끌었던 것은 불필요한 일들을 줄여내고 내가 할 일만 해야 한다는 80 : 20 의 법칙과 파킨슨의 법칙.


- 만약 모든 사람이 무엇이 문제인지 밝히고 해결하는데 한 가지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그 결과가 표준 이하로 나온다면 이때가 바로 `만약 내가 반대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질문할 순간이다. 결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모델은 따라서는 안 된다.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요리사 인지와는 상관없이 조리법이 후지면 좋은 요리가 나오지 않는다.


- 행복의 반대는 반박의 여지없이 지루함이다.
흥분은 만병통치약이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열정이나 행복을 추구하라고 권할 때, 사실 그들은 똑같은 하나의 개념에 주목한다. 그건 바로 `흥분`이다.
다시 우리 이야기로 되돌아오자. `당신이 물어야 할 것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나 `나의 목표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흥분시키는가?`이다.

p89 - 파킨슨의 법칙에 따르면, 어떤 일을 완수하도록 주어진 시간에 비례하여 그 업무의 중요성과 복잡성은 점점 더 크게 인식된다. 마감시한이 임박했을 때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1. 근무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중요한 일로만 업무를 제한하라. (80대 20법칙)
2. 중요한 일로만 업무를 제한하기 위해서 근무 시간을 줄여라. (파킨슨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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