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 말과 글을 단련하고 숫자, 언어, 미디어의 거짓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기술
노르망 바야르종 지음, 강주헌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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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정보들 사이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라면 어떻게 생각해야할까를 설명하기 위해 다량의 이론들과 세밀한 분석을 인용했지만 상당히 재미가 없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가득해서 비판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국 하려는 이야기는 얇은 5장에 들어있다. 객관적인 진실만을 꿰뚫기 위해 희고 검은 변두리의 주관들을 쳐내고 파악하자는 생각을 자연스레 추론하게 된다. 사실 이런 추론도 개인적으로 고찰하면 끌어올릴수 있는 결론이라 여겨져 책 자체가 효용성이 없다고 느껴졌다. 

물론 날조된 기사들을 가지고 노는 언론인들이나 그것들에 휩쓸리지 않기위해 공부해야하는 업계 사람들은 또 다르게 볼 수 있겠지만 흥미 없게 읽은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지루한 글.

p 43
전문용어와 곁말을 구분해서 곁말을 알아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충분한 지식과 정확한 논리력이 필요하고,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와 새로운 사상에 대한 열린 자세로 꾸준히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결실이다.

p 67
대인논증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냉정한 판단력을 발휘해야 한다. 일반적인 원칙에 따르면, 어떤 주장이나 논증도 그 자체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이나 논증이든 그렇게 주장한 사람을 공격하는 식으로 반박해서는 안된다. (피장파장의 오류)

p 178
그러나 개인의 경험만을 근거로 믿음을 정당화하는 건 위험이 없지 않다. 우리가 경험에서 얻는 지식이 제한적이기 때믄이다. 체계적인 지식, 특히 과학적 지식과 비교하면 경험에서 얻는 지식은 극히 제한적이다. 사실 개인의 경험만으로 우리의 믿음을 확신할 수는 없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감각이 우리에게 착각을 일으키고 기억이 실제로 있었던 일과 일치하지 않으며 판단이 잘못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경험으로 믿음을 정당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한다.

이상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우리가 어떤 딜레마에 부딪치면,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 전에(혹은 선택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그 딜레마가 진정한 딜레마인가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흑과 백 사이에 수많은 회색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거짓 딜레마의 덫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책은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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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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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앞이 보이지 않고, 신체 일부가 존재하지 않으며, 기관을 통한 의사소통의 영역에서 살아가는데 불리한 조건을 지녔지만 끝없는 노력과 훈련을 통해 결국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마는 이 시대의 위대한 사람들이다. 사회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닥친다하더라도 견디고 우뚝 일어설 수 있음을 증명하는 희망의 아이콘으로써 묘사한다. 또한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고위직 관료들이 4년에 한 번씩 방문해 불편한 부분을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태도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방문객들은 천사같다라는 수식어로 그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놓는다. 이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묘사되어지는 장애인들에 대한 이미지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의 태도를 보고, 그런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의 모습에 안주하며 희망찬 내일을 다짐한다. 그리고 안쓰러움과 존경이 반반씩 섞인 눈빛을 보내며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단지 한 발자국 너머에서. 그 단어가 묘사하는 물리적인 거리감은 분명 한 발자국에 불과할 테지만, 정서적으로 묘사되는 거리감에는 저 편 너머에서 그들을 바라보려는 관조적인 시선이 배어있다. 관조는 개인의 관계 속에서 내 삶과 구분 짓고 싶은 짙은 거리감이 포함된다. 이런 개인의 시각 속에서 그들은 현실적인 불편함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무심코 희망적인 눈빛을 건네고, 그들의 삶에 대한 응원과 존경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되었는지 파헤쳐본다면 자조적인 시선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 대항하여 그들은 최선을 다해 노련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외친다. 이 책은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이미지에 부합하지 못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가장 끝단에 위치해있는 실격당한 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장애인들에 대해 그들이 투쟁하고 있는 사회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이 받고 있는 유리된 시선들에 대해 변론하기 위한 책이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고귀하고 존엄하며 합리적인 평등 속에 차별받아야할 이유가 없음을 인지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나와 타인을 고민하고 성장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견지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의식으로 우리는 장애인에 대해서도 그들의 삶을 존중하며 숭고하게 여긴다. 그렇지만 그런 의식이 내 삶에 직접적으로 다가왔을 때도 우리는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만약 나의 아이가 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될 운명이라면 그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시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애에 대해서 축복으로 여기고 출산할 수 있을까? 그런 상황 속 장애를 제거하고 아이를 낳게 된다면 장애는 숭고하지만 결핍된 것이라는 자가당착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선택으로 인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애인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책은 끊임없이 그런 우리의 내면으로 다가와 가슴을 쿡쿡 찌르며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들은 미()와 좋은 것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결코 아름답지 못한 존재로 자라난다. 사랑과 희망,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통제되지 않는 신체를 움직이고, 장애인 전용 화장실이 없는 공간에서 소변을 애써 참아야하는 그들의 처절한 현실 앞에 예쁘게 포장된 허영에 불과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를 더 깊이 내리게 된다. 그것은 결국 한사람의 생을 통해, 스스로가 주체적인 작가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해나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존엄함이며 아름다움이지 않을까? 개별적인 서술자들 앞에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을 뿐, 획일적인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있다하여도 그 찬란함은 한시적일 뿐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존엄한 인간 앞에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지를 시사한다. 품격 있는 국가는 보기에 안 좋은 것들을 배제하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만을 갖추었을 때 탄생한다기보다, 다소 거칠고 울퉁불퉁한 것들, 그리고 무언가 부족하거나 다른 것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형태 속에서 비로소 탄생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장애인들이 살아가야할 현실적인 세상 앞에 이 책은 비장애인들의 시각을 확장시켜나가고 모든 인간의 저마다의 존엄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책은 결코 장애인에 대한 내용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주류가 되지 못한 소수자들, 약자들의 목소리까지 대변하며 주류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관용의 시야를 제공해주는 역할이 되어준다. 장애인이 아닌, 비주류가 아니었던 입장에서 바라보았던 사회는 너무나도 편리하고 아름다운 세계였지만, 또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고로 이 책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권장되었으면 하는 바이다.


p 39
우리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이고, 그 도움이 타인에게 일정한 이득이 될 수 있다면 때로 ‘공연‘에 동원될 수도 있다.

p 44
장애, 질병, 빈곤 등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수단으로 삼아 철저히 익명화하는 방식으로 연출하는 공연은 결국 이들을 실격당한 존재로 만든다.

p 45
그는 정신질환으로 의식이 혼미하거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명징하게 자신이 하는 일을 알았고, 그 일을 계획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는 ‘성찰적인‘ 인간이었다. ... 즉 ‘뇌의 생리적, 기질적 문제‘로만 돌리면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p 50
삶이 일종의 연극이라는 사실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더 큰 진실을 위해 거짓을 연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빛내는 데만 몰입하는 사람들은 작은 진실을 위해 큰 거짓을 연기한다. 나는 이를 ‘품격주의적 태도‘라고 부르고자 한다.

p 56
칸트는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이를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해야만 한다‘라고 전제한 후 ‘목적들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가격 도는 존엄성을 가지며, 가격은 ‘같은 가격을 갖는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있는 반면 존엄성은 그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고 말한다.

p 67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 모르는 척해주는 익명의 대학생이 고마워서 그를 존중하며, 자신을 존중하려 애쓰는 자폐아 부모의 노력을 아는 대학생은 더더욱 무심한 척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p 99
당신은 장애인을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에 대한 어떠한 차별에도 반대하며, 그들의 삶이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불행하거나 가치 없는 건 아니라고 믿는가? 그런 당신은 장애아가 태어나는 순간도 비장애아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축복과 기대,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한 경이로운 시간으로 기억할 자신이 있는가? ‘잘못된 삶‘도 존엄하고 매력적이고 풍성한 삶이라는 것을 ‘변론‘하려는 나는, 간단한 시술로 내 장애를 고칠 수 있고 나와 같은 장애아를 출산하지 않을 수 있는 경우에도 거리낌 없이 그 시술을 거부할 자신이 있는가?

p 115
유전자진단기술을 통해 장애아를 ‘걸러낼‘ 수 있는 사회는 해당 장애에 대한 의료, 사회복지 지출에 둔감해지기 쉽다. 그냥 ‘걸러내면‘ 될 것을 굳이 낳아서 치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기술을 사용하지 않은 개인은 사회에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죄책감은 타당할까? 위 프로그램의 의미를 소개하면서 연구자 황지성은 첨단기술을 활용할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은 사회적 차별과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유전자 진단이나 임신중절은 일정 범위 안에서는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다만 그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장애아가 태어나면, 그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결국 모든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p 129
잘못된 삶을 정체성의 일부로 ‘수용‘하는 일과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정신승리‘가 구별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타인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규정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이런 ‘정신승리‘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p 144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장애가 있는 몸,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신체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혐오나 피해의식에 기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이 구축해놓은 외모의 위계질서에 종속되지 않으며, 앞으로의 삶을 외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혹은 피억압자로서의 의식과 트라우마에 짓눌리지 않은 채 살아가겠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수용한 것이다.

p 147
정체성이란 객관적인 대상처럼 존재하는 어떤 산물이 아니다. 정체성이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인간적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적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수행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예술품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 "위대한 예술품에 가치를 두는 궁극적인 이유는 예술품이 우리의 삶을 증진시켜서가 아니라 예술적 도전에 맞선 수행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p 149
그러나 장애라는 정체성이 어떤 산물이라기보다는 장애라는 경험에 맞서 한 개인이 작성해나가는 ‘이야기‘ 그 자체라면, 우리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의 국면이 아니라 긴 삶의 시간 동안 그것을 ‘써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의 수용이란 결국 우리가 철저히 자발적으로 장애라는 정체성을 작성해나가는 일을 의미하게 된다.

p 204
사회에서 소외된 채 돌봄 노동을 전담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공유되지 않는 이상 장애인은 그저 사회와 가족의 짐으로만 여겨지고, 그 가족들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사람들로만 인식될 것이다. 이들이 경험한 공생을 위한 갈등가 협력, 때때로 찾아오는 경이로운 순간들, 장애인을 한 사람의 자녀로, 또래로 온전히 받아들인 시간은 그 자체로 고유할 뿐 아니라,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개별자로서의 이야기를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드러내줄 것이다.

p 227
마찬가지로 장애인이 버스와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하는 이유가 단지 복지 정책이 미흡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장애인의 탑승을 고려해 버스를 설계하고 도입하는 일이 경제적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도시의 속도를 지체시키기 때문이라면, 이는 사실상 장애인의 신체 또는 일반적인 행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 같지않은가? 이동권은 꼭 사회권의 맥락에서만 고려될 문제인가? 이동권이 자유권의 성격을 갖는다고 상상할 수 있다면, 국가의 최우선적 ‘배려‘ 안에 반드시 포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 233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더는 가진 자들의 은혜적 배려가 아닌 전 국민이 함께 고민하며 풀어가야 할 사회적 책무로서 막연히 예산상의 이유만을 들어 그러한 의무를 계속적으로 회피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방법으로 일상생활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일상생활에 있어 아무런 제약이 없어 비장애인에게는 그 존재의 가치조차 논의하지 아니하는 이동권이 단순히 예산상의 이유만으로 제약을 받는 것은 이 시대의 모순일 수밖에 없는 바, 이러한 모순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해결할 문제로서 조그마한 노력과 비용의 부담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므로 더는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판단하여 그 시기를 늦출 수는 없다고 할 것이고,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초적인 이동권마저 비장애인과의 형평성 및 예산상의 문제 등을 거론하며 그 시기를 늦추려고 하는 것은 비장애인들의 편의적인 발상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p 240
우리 개인이 가진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 몸의 특성, 복잡다단한 고유성을 주류 집단이 간단히 무시해버리지 않아야 하며, 만약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왜 그러한지 그들이 직접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원칙이 곧 합리적/정당한 편의 제공의 전제다. 장애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저 장애인을 배려하라는 말이 아니라, 장애인이 그 신체적, 정신적 특성을 가지고 오랜 기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존중하라는 요구와도 같다.

p 261
닉 부이치치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아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마치 위인전을 읽히듯 전하는 사람들도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에는 반대한다. 교회에서 단체로 봉사활동을 가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후원금을 내는 사람들도 자기 윗집에 장애인이 이사 오는 것은 반대한다. 이들이 장애인의 신체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런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대상이 전적으로 ‘타자‘일 때에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p 266
사람들은 자주 ‘장애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장애가 현실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의 몸이 현실이다. 장애를 둘러싼 현실이라는 ‘관념‘은 너무나 많은 입장, 태도, 관행, 오래된 습속, 누적된 혐오, 부족한 상호작용의 경험, 변화 가능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몰이해, 의료적으로 재단되고 분류된 병명들로 가득 차 있다.

p 308
그것들은 분명 얼마간은 객관적으로도 산물적인 가치를 갖지만, 설령 이러한 질병과 장애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정적인 경험에 불과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수용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애쓰는 모습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나의 부모에게, 이 사회에게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이는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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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 1 - 남자의 눈으로 본 남성문화
수요자 포럼 지음,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기획, 허주영 엮음 / 호랑이출판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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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구축해놓은 집단적인 남성문화 속에서 그런 문화에 대해 반성하고 내부고발식으로 이루어지는 글들을 엮은 책이다. 은밀하게 진행되던 그들의 문화는 성매매와 성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켜 놓았으며 사회 초년생들의 욕망을 사로잡아 동지로 만든다.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동업자로서 네트워크를 더욱 견고하게 다져나간다.


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과도한 욕망을 불러온 것일까. 대한민국은 성매매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자연스러운 성매매 공화국이 되어 있었다. 원인을 뜯어보려면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하겠지만, 이제는 사회의 인식이 변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뿌리깊게 박혀있던 근본적인 인습과 우리들의 의식을 조금씩 걷어내야할 것이다. 또한 남성이라는 틀에 갇힌 이미지를 이제는 깨야할 순간이 되었다. 사회는 미약하게나마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도 이런 의심과 대화를 통해서 더욱 성숙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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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감정의 철학 -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나카지마 요시미치 지음, 김희은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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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철학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스스로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 힘들다. 왜냐하면 이 순간의 내 생각이 온전한 생각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이 '순간'에 대한 시간성의 개념에서는 완벽하게 나의 생각이겠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타자적으로도 누구에게도 온전한 생각으로 다가갈 수는 없다.) 어쩌면 정(正)으로 치부되는 온전한 생각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의 주장은 늘 분명하지 않다는 유연한 의식을 동반한채 개진되어야 하지만 과연 그 주장을 주장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일까. 물렁한 사고는 물렁한 신념을 만들며 물렁한 신념은 연약한 주관을 만든다. 이 앞에서 나는 책을 읽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허무해졌다.


우리는 스스로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는다 라고 떳떳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이 누군가를 무의식적으로 차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근원적인 사고가 나의 우와열을 가르는 무의식적인 감정상태에서 온다는 이야기에 부끄러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다른 책이었다면 우리는 차별적인 의식을 감추고 세상을 살아가는 법에 대해 결말을 제시하고 다소 찝찝한채, 위선적인 감정을 내재한 채 주제를 마무리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감정의 근원에 대한, 인간의 의식에 기어코 발을 들여놓는다. 그래서 무척 부끄러우면서도 통쾌했다.


차별적인 언어들. 우리 인간의 무의식에 공통으로 자리한 이 의식들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책이 제시한 마무리가 어떠한 맹목적인 방향과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동적인 태도와 의식에 맞물려 열어두었기에 무척 깔끔하고 많은 생각이 든 채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기에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생각해야한다.


p 10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성격 측면이 없다면 인간은 인생의 향방을 정하거나 자기 주위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것조차 하지 못하리라. 사실 인류가 공격성을 천성으로 부여받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지배적인 위치에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며, 하나의 종족으로 살아남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리라. - <인간의 공격성> 스토

p 10
온갖 악의와 그 표출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떠올리며 현실을 한탄할 것이 아닐,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은 악의와 싸우며 그것이 폭주하지 않도록 단단히 제어하는, 이러한 노력 속에서 생의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인간의 악의를 천편일률적으로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악의가 있기에 삶이 풍요롭다. 이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p 36
그들에게 전혀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도 엄연히 있다. 이 경우,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고 사회에서 배척되거나, 거짓말을 계속해서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대부분이 후자를 선택하리라. 원래부터 S에게 생리적으로 불쾌감을 느꼈더라도, 공교롭게도 S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불쾌감을 밝힐 수 없게 되고, 그 대신 전혀 불쾌하지 않은 듯이 행동할 것이다. 여기에는 기만적 태도에서 풍기는 악취가 진동한다. 이 악취를 없애는 것이 가능할까?

p 44
장애를 노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당사자를 노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노멀로 만들자는 주장이다. -- 장애가 있든 없든 똑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고 말할 때 이미 그 사회의 원리 자체가 변하기 시작한 셈이기에, 사회는 기존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어진다. -- 노멀라이제이션은 순응하거나 동화하라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습에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 노멀라이제이션, 생명윤리란 무엇인가 - 다테이와 신야

p 50
유대인 차별이나 피차별 부락 차별 등 역사적, 문화적인 배경이 있는 차별의 경우, 그들에게 혐오감을 느끼더라도 그 감정이 개인적인 감정과는 몹시 동더어진 경우가 많다. 그러한 차별 감정은 배워서 습득된 것들로, 우리는 그 배운 감정들을 점차 확고하게 구축한다. 이 경우 내가 G를 혐오할 만한 대상으로 규정하는 동기는 전혀 ‘내부적‘이지 않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받는 교육을 통해, 또래와의 지적 전파를 통해, 서적이나 영화 등 여러 미디어를 통해 ... 나는 G가 혐오할 만한 대상이라는 ‘외부적‘ 동기를 부여 받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G는 나에게 싫어할 만한 대상이 되었다. 혐오의 감정도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나의 생각마으로 생기지 않는다.

p 51
한편, 관념적인 차별 감정을 뒤집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차별 감정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사람은 사실을 들이밀어도 관념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피차별 부락 출신 사람들이 ‘보통‘사람이라는 실증적 근거를 들이밀어도 ‘피차별 부락‘이라는 말이 지닌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는다. 한편으로,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기에 교육을 통해 관념을 바꾼다면, 혹은 자연히 바뀐다면, 차별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된다.

p 58
이러한 재편성을 아카사카는 ‘공동성을 위배하는 공포가 공동성 자체를 성립시키는 구조‘라고 말한다. 집단은 적이 명확한 동안에는 그 집단 구성원들의 ‘공동성‘이 평온하게 유지된다. 그래서 집단의 안녕을 꾀하는 정치가들은 공산주의자나 유대인 같은 상징적인 적을 확보하려고 혈안이었다. 그런데 집단 밖에서 그 적을 찾기 힘들 경우, 각 구성원들은 집단 안에서 ‘제물‘을 찾아낸다.

p 61
위의 논의들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차별 감정으로서의 혐오가 강한 사람이 어떤 유형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에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몹시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중에서 ‘정상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강하고, ‘의례적 무관심‘을 가장해 자기 주위에 이상한 사람이 없는지 탐색해서 찾아내고 고발하는 사람이다.

p 62
그 사회의 가치관에 완벽하게 부합해서 차별에 분노하는 사람은, 어딜 가든 ‘옳다‘는 평가를 받기에, 더욱 자기비판적이어야 한다. 그 분노가 ‘옳다‘고 간주되기에, 더욱 섬세한 정신으로 자신의 분노에 편안함과 안전함이 잠재되어 있음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p 71
차별 감정이 강한 사람이란, 일반적으로 남을 싫어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감정에 따라 남을 미워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또한 관념적으로 사람을 싫어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며, 어떤 사람을 향한 자신의 혐오감에 대한 자기비판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p 77
어째서 서구 열강은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이유의 중심에 도덕적 이유를 놓았을까?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것이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개한 민족이라 할지라도 미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에서 몰아내는 행동이 쉽게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죄책감이 남는다. 그런데 문명의 빛을 전한다는 명목이라면 죄책감이 옅어진다. 게다가 문명의 빛을 통해 도덕적으로 열악한 민족을 도덕적으로 높여준다는 이유라면 정당성이 확보된다.

p 82
장애인을 무시하는 정치인의 발언을 들으면 곧바로 분노하고, 사회적 약자를 조금이라도 경멸하는 낌새라도 풍기면 물고 늘어지고, 치한 행위에 격렬하게 항의하는... 사회 분위기와 똑같은 색으로 온몸을 물들인 ‘강경‘ 차별 반대 운동가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몸을 완전히 내맡긴 ‘선량한 시민‘이며, 그런 의미에서 같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p 90
여기에 이르러 알 수 있듯, 특히 비교적 균질적인 사람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현대 일본에서는, 고상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고상하지 않은 타자를 만들고, 그 사람들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정한 고상함을 확고히 하려고 한다.

p 105
발전을 바라는 한, 차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 모두가 동시에 차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는 한, 자신은 그저 ‘발전‘을 바랄 뿐 타인을 전혀 낮추어 보지 않는다는 기만적인 생각을 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p 109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한 인간이 자신을 정당하게 존중할 수 있는 최고점까지 자신을 존중하는 참된 ‘고매‘란, 한편으로 진정 자신이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잇는 것이라곤 자신의 여러 의지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밖에 없고, 칭찬을 받거나 질책을 받는 것도 자신이 의지를 잘 쓰는지 잘못 쓰는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를 잘 사용하려는 확고하고 불변한 결의를 자신 안에서 느끼는 것, 즉, 스스로 최선이라 판단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어떠한 경우에도 버리지 않겠다는, 다시 말해 완전히 덕을 따르고자 하는 확고하고 불변한 결의를 자신 안에서 느끼는 것이다. - 방법서설

p 125
근대사회에서는 출신, 신분, 성별, 인종 등에 따른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모두가 소리 높여 말한다. 그런데 지적능력에 바탕을 둔 차별만은 거침없이 통용되고 있다. 대학과 기업도 지식이나 판단력 등을 기반으로 하는 지적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원한다. ... 학습능력을 중심으로 하는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자칫 ‘인간으로서 부족하다‘고까지 여겨진다. 이 격차에 대해서는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 아무런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지적장애인이라면 약자이자 피차별 후보자이기에 현대사회에서는 정중하게 보호 받는다. 그런데 단순히 학습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는 수밖에는 없다.

p 128
A군의 자각 안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우월감이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자신이 사회적 우위에 있다는 점에 부채 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다. 자신의 사회적 우위는 그대로 둔 채, 하위 사람들을 편견 없이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며, 이는 지극히 쉬운 일인데, 그 쉬운 일로 ‘겸허‘하다는 찬사를 들으면서도 그 점에 대해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극히 교활한 사람이다.

p 137
그렇기에 정체성을 확립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사랑‘한다. 집단이 모욕을 당하면 분노하고, 침해를 당하면 방어한다. 그 행동에는 비난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신이 소속된 집안에 대한 사랑이 지나치면 -아무리 악의가 없더라도- 차별감정을 키우는 온상이 된다.

p 143
가족 절대주의로부터 ‘안식‘을 얻은 사람은 이토록 평온하기에, 두뇌가 단순해지고 마비되어,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비혼자와 가족관계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심지어 그 사실에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다.

p 148
단순히 인간관계가 친밀한 사회를 바라는 것은 위험하다. 이는 ‘모두 함께‘하는 삶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행복과 맞바꿔, 친밀한 인간관계를 바라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묵사한다. 오히려 타인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 타인을 속박하지 않는 사회, 타인을 길들이지 않는 사회, 타인에게 가급적 기대하지 않는 사회를 실현해야 하지 않을까? 사회는 다양성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소 능률이 떨어지고 불아정 요소가 많아지더라도, 이질적인 존재들을 동화시킬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존재들끼리 ‘공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고독하고 싶은 사람에게 고독할 자유를 주고, 불행에 빠져 좌절했지만 타인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p 159
사회 부적격자는 공정하게 싸우면 질 것이 뻔한데도, 조금이라도 불공정한 행동을 하면 경멸당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도 여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간주된다. 이토록 가혹하고 기만적인 상황이 또 있을까?

p 161
인간을 인간들 사이에서 훌륭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모두 가면이다. - 로마서 강해, 칼 바르트

p 167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궁극적인 의문은 ‘자신의 신념에 대한 성실성을 지키면서 타인의 행복을 위할 수 있는가?‘이다.

p 169
첫 번째는 시선이다. 시선을 타자에게 향해서 자신과의 차이를 식별한다. 차이를 인식한 시선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타자에게 보냈던 시선은 순식간에, 그 순간의 자신과 타인의 정체성을 나눈다.
그런데 시선은 차이를 식별하는 데 멈추지 않고 더 앞으로 향한다. 시선은 그 차이에 역학관계를 적용한다. 상하, 우열, 귀천, 정상과 이상, 중심과 주변, 완전과 결여, 어느 쪽이든 시선은 한 쪽의 정체성에는 가치 부여적으로, 다른 쪽의 정체성에는 가치 박탈적으로 작용한다. 시선이 권력관계를 만들고, 관계의 양단에 있는 인간 총체를 경사적으로, 비대칭적으로 규정할 때 차별이 완성된다. - 차별과 시선, 구리하라 아키라

p 189
이 경우, 성실하고자 하는 나에게는 어떠한 선택지가 있을까? 내 감성에 충실하게, 혐오감과 불쾌감에 약간의 망설임을 담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성실한 것일까? 아니면 전혀 알아채지 못한 척을 하며 서둘러 그를 추월하는 것이 성실한 것일까?
직감적으로 어느 쪽도 ‘틀렸다!‘는 절규가 들려온다.

p 190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혐오에서 존경으로의 굴절‘이 얼마나 교활한지도 알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억혀있다. 그의 인생을 일괄적으로 ‘가혹한 인생‘이라고 결정지을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결정짓는 행위 자체가 차별 감정이니, 가혹한 인생을 ‘존경‘하는 감정도 사실은 차별 감정의 표현이라는 판단들이 머릿속에서 웅성거린다.

p 205
왜냐하면, 그떄 당신은 ‘고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 ‘고지‘에 이르지 못한 타인을, 한순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에 차별 감정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나는 차별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빠져 있는 한, 사람은 차별 감정과 진지하게 마주할 수 없다. 어떠한 ‘성역‘도 없다. 가혹하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 차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 역시 차별하는 감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그리고 차별과 전력을 다해 싸우는 사람, 차별이라는 잔호간 현상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속에, 생생하리만치 ‘고지에서 내려다보는‘ 경향이 잠재되어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떠한 차별 반대론자도 믿을 수 없다.
문제는, 이른바 ‘낮은 곳‘이 이미 ‘높은 곳‘이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낮은 곳에 있는 자의 복종이 악취를 풍기는 오만이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 로마서 강해, 칼 바르트

p 206
차별 감정과 진지하게 마주한다는 것은 ‘차별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에 계속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을 열어서 파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워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 차라리 모두 내던지고 죽고 싶다고 바랄 저도로, 즉 차별로 괴로워하는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 이를 때까지 자기 안에 숨은 나태함과 눈속임과 냉혹함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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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를 위한 헌법 토론 - 미래를 바꾸는 헌법 사용 설명서
서윤호.오혜진.최정호 지음 / 다른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려운 용어들을 10대들을 대상으로 쉽게 풀어썼기에 수월하게 읽히는 느낌이었다. 정작 10대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이정도면 나름 친절하고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하려는 느낌에 배려감이 느껴졌다. (사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는 중학생 수준으로써 상당히 수준높은 토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말이다..) 최근 사회 전반에 이슈가 되는 소재들로 여러 쟁점을 제시하고, 개진되는 의견들을 보며 읽는 이들의 자유로운 사고에 좋은 밑바탕이 되어주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p 91
민주 : 노동가능인구도 늘리고,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 뭐 이런 얘기니? 보건복지부 개정안에 여성들이 화가 난 게 바로 이런 이유잖아. 언제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하더니, 하나만 낳자고 하다가 저출산이 문제되니까 아이를 낳으면 돈을 주고 말이야. 여자가 애낳는 기계도 아니고. 지난번에는 전국의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더니 이제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하면 강하게 처벌하겠다고 협박하는 거잖아. 국가가 나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권리를 통제하는데 루마니아 상황이랑 다를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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