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0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성격 측면이 없다면 인간은 인생의 향방을 정하거나 자기 주위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것조차 하지 못하리라. 사실 인류가 공격성을 천성으로 부여받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지배적인 위치에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며, 하나의 종족으로 살아남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리라. - <인간의 공격성> 스토
p 10 온갖 악의와 그 표출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떠올리며 현실을 한탄할 것이 아닐,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은 악의와 싸우며 그것이 폭주하지 않도록 단단히 제어하는, 이러한 노력 속에서 생의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인간의 악의를 천편일률적으로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악의가 있기에 삶이 풍요롭다. 이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p 36 그들에게 전혀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도 엄연히 있다. 이 경우,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고 사회에서 배척되거나, 거짓말을 계속해서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대부분이 후자를 선택하리라. 원래부터 S에게 생리적으로 불쾌감을 느꼈더라도, 공교롭게도 S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불쾌감을 밝힐 수 없게 되고, 그 대신 전혀 불쾌하지 않은 듯이 행동할 것이다. 여기에는 기만적 태도에서 풍기는 악취가 진동한다. 이 악취를 없애는 것이 가능할까?
p 44 장애를 노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당사자를 노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노멀로 만들자는 주장이다. -- 장애가 있든 없든 똑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고 말할 때 이미 그 사회의 원리 자체가 변하기 시작한 셈이기에, 사회는 기존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어진다. -- 노멀라이제이션은 순응하거나 동화하라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습에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 노멀라이제이션, 생명윤리란 무엇인가 - 다테이와 신야
p 50 유대인 차별이나 피차별 부락 차별 등 역사적, 문화적인 배경이 있는 차별의 경우, 그들에게 혐오감을 느끼더라도 그 감정이 개인적인 감정과는 몹시 동더어진 경우가 많다. 그러한 차별 감정은 배워서 습득된 것들로, 우리는 그 배운 감정들을 점차 확고하게 구축한다. 이 경우 내가 G를 혐오할 만한 대상으로 규정하는 동기는 전혀 ‘내부적‘이지 않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받는 교육을 통해, 또래와의 지적 전파를 통해, 서적이나 영화 등 여러 미디어를 통해 ... 나는 G가 혐오할 만한 대상이라는 ‘외부적‘ 동기를 부여 받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G는 나에게 싫어할 만한 대상이 되었다. 혐오의 감정도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나의 생각마으로 생기지 않는다.
p 51 한편, 관념적인 차별 감정을 뒤집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차별 감정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사람은 사실을 들이밀어도 관념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피차별 부락 출신 사람들이 ‘보통‘사람이라는 실증적 근거를 들이밀어도 ‘피차별 부락‘이라는 말이 지닌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는다. 한편으로,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기에 교육을 통해 관념을 바꾼다면, 혹은 자연히 바뀐다면, 차별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된다.
p 58 이러한 재편성을 아카사카는 ‘공동성을 위배하는 공포가 공동성 자체를 성립시키는 구조‘라고 말한다. 집단은 적이 명확한 동안에는 그 집단 구성원들의 ‘공동성‘이 평온하게 유지된다. 그래서 집단의 안녕을 꾀하는 정치가들은 공산주의자나 유대인 같은 상징적인 적을 확보하려고 혈안이었다. 그런데 집단 밖에서 그 적을 찾기 힘들 경우, 각 구성원들은 집단 안에서 ‘제물‘을 찾아낸다.
p 61 위의 논의들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차별 감정으로서의 혐오가 강한 사람이 어떤 유형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에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몹시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중에서 ‘정상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강하고, ‘의례적 무관심‘을 가장해 자기 주위에 이상한 사람이 없는지 탐색해서 찾아내고 고발하는 사람이다.
p 62 그 사회의 가치관에 완벽하게 부합해서 차별에 분노하는 사람은, 어딜 가든 ‘옳다‘는 평가를 받기에, 더욱 자기비판적이어야 한다. 그 분노가 ‘옳다‘고 간주되기에, 더욱 섬세한 정신으로 자신의 분노에 편안함과 안전함이 잠재되어 있음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p 71 차별 감정이 강한 사람이란, 일반적으로 남을 싫어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감정에 따라 남을 미워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또한 관념적으로 사람을 싫어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며, 어떤 사람을 향한 자신의 혐오감에 대한 자기비판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p 77 어째서 서구 열강은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이유의 중심에 도덕적 이유를 놓았을까?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것이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개한 민족이라 할지라도 미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에서 몰아내는 행동이 쉽게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죄책감이 남는다. 그런데 문명의 빛을 전한다는 명목이라면 죄책감이 옅어진다. 게다가 문명의 빛을 통해 도덕적으로 열악한 민족을 도덕적으로 높여준다는 이유라면 정당성이 확보된다.
p 82 장애인을 무시하는 정치인의 발언을 들으면 곧바로 분노하고, 사회적 약자를 조금이라도 경멸하는 낌새라도 풍기면 물고 늘어지고, 치한 행위에 격렬하게 항의하는... 사회 분위기와 똑같은 색으로 온몸을 물들인 ‘강경‘ 차별 반대 운동가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몸을 완전히 내맡긴 ‘선량한 시민‘이며, 그런 의미에서 같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p 90 여기에 이르러 알 수 있듯, 특히 비교적 균질적인 사람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현대 일본에서는, 고상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고상하지 않은 타자를 만들고, 그 사람들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정한 고상함을 확고히 하려고 한다.
p 105 발전을 바라는 한, 차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 모두가 동시에 차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는 한, 자신은 그저 ‘발전‘을 바랄 뿐 타인을 전혀 낮추어 보지 않는다는 기만적인 생각을 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p 109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한 인간이 자신을 정당하게 존중할 수 있는 최고점까지 자신을 존중하는 참된 ‘고매‘란, 한편으로 진정 자신이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잇는 것이라곤 자신의 여러 의지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밖에 없고, 칭찬을 받거나 질책을 받는 것도 자신이 의지를 잘 쓰는지 잘못 쓰는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를 잘 사용하려는 확고하고 불변한 결의를 자신 안에서 느끼는 것, 즉, 스스로 최선이라 판단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어떠한 경우에도 버리지 않겠다는, 다시 말해 완전히 덕을 따르고자 하는 확고하고 불변한 결의를 자신 안에서 느끼는 것이다. - 방법서설
p 125 근대사회에서는 출신, 신분, 성별, 인종 등에 따른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모두가 소리 높여 말한다. 그런데 지적능력에 바탕을 둔 차별만은 거침없이 통용되고 있다. 대학과 기업도 지식이나 판단력 등을 기반으로 하는 지적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원한다. ... 학습능력을 중심으로 하는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자칫 ‘인간으로서 부족하다‘고까지 여겨진다. 이 격차에 대해서는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 아무런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지적장애인이라면 약자이자 피차별 후보자이기에 현대사회에서는 정중하게 보호 받는다. 그런데 단순히 학습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는 수밖에는 없다.
p 128 A군의 자각 안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우월감이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자신이 사회적 우위에 있다는 점에 부채 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다. 자신의 사회적 우위는 그대로 둔 채, 하위 사람들을 편견 없이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며, 이는 지극히 쉬운 일인데, 그 쉬운 일로 ‘겸허‘하다는 찬사를 들으면서도 그 점에 대해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극히 교활한 사람이다.
p 137 그렇기에 정체성을 확립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사랑‘한다. 집단이 모욕을 당하면 분노하고, 침해를 당하면 방어한다. 그 행동에는 비난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신이 소속된 집안에 대한 사랑이 지나치면 -아무리 악의가 없더라도- 차별감정을 키우는 온상이 된다.
p 143 가족 절대주의로부터 ‘안식‘을 얻은 사람은 이토록 평온하기에, 두뇌가 단순해지고 마비되어,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비혼자와 가족관계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심지어 그 사실에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다.
p 148 단순히 인간관계가 친밀한 사회를 바라는 것은 위험하다. 이는 ‘모두 함께‘하는 삶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행복과 맞바꿔, 친밀한 인간관계를 바라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묵사한다. 오히려 타인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 타인을 속박하지 않는 사회, 타인을 길들이지 않는 사회, 타인에게 가급적 기대하지 않는 사회를 실현해야 하지 않을까? 사회는 다양성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소 능률이 떨어지고 불아정 요소가 많아지더라도, 이질적인 존재들을 동화시킬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존재들끼리 ‘공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고독하고 싶은 사람에게 고독할 자유를 주고, 불행에 빠져 좌절했지만 타인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p 159 사회 부적격자는 공정하게 싸우면 질 것이 뻔한데도, 조금이라도 불공정한 행동을 하면 경멸당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도 여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간주된다. 이토록 가혹하고 기만적인 상황이 또 있을까?
p 161 인간을 인간들 사이에서 훌륭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모두 가면이다. - 로마서 강해, 칼 바르트
p 167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궁극적인 의문은 ‘자신의 신념에 대한 성실성을 지키면서 타인의 행복을 위할 수 있는가?‘이다.
p 169 첫 번째는 시선이다. 시선을 타자에게 향해서 자신과의 차이를 식별한다. 차이를 인식한 시선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타자에게 보냈던 시선은 순식간에, 그 순간의 자신과 타인의 정체성을 나눈다. 그런데 시선은 차이를 식별하는 데 멈추지 않고 더 앞으로 향한다. 시선은 그 차이에 역학관계를 적용한다. 상하, 우열, 귀천, 정상과 이상, 중심과 주변, 완전과 결여, 어느 쪽이든 시선은 한 쪽의 정체성에는 가치 부여적으로, 다른 쪽의 정체성에는 가치 박탈적으로 작용한다. 시선이 권력관계를 만들고, 관계의 양단에 있는 인간 총체를 경사적으로, 비대칭적으로 규정할 때 차별이 완성된다. - 차별과 시선, 구리하라 아키라
p 189 이 경우, 성실하고자 하는 나에게는 어떠한 선택지가 있을까? 내 감성에 충실하게, 혐오감과 불쾌감에 약간의 망설임을 담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성실한 것일까? 아니면 전혀 알아채지 못한 척을 하며 서둘러 그를 추월하는 것이 성실한 것일까? 직감적으로 어느 쪽도 ‘틀렸다!‘는 절규가 들려온다.
p 190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혐오에서 존경으로의 굴절‘이 얼마나 교활한지도 알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억혀있다. 그의 인생을 일괄적으로 ‘가혹한 인생‘이라고 결정지을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결정짓는 행위 자체가 차별 감정이니, 가혹한 인생을 ‘존경‘하는 감정도 사실은 차별 감정의 표현이라는 판단들이 머릿속에서 웅성거린다.
p 205 왜냐하면, 그떄 당신은 ‘고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 ‘고지‘에 이르지 못한 타인을, 한순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에 차별 감정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나는 차별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빠져 있는 한, 사람은 차별 감정과 진지하게 마주할 수 없다. 어떠한 ‘성역‘도 없다. 가혹하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 차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 역시 차별하는 감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그리고 차별과 전력을 다해 싸우는 사람, 차별이라는 잔호간 현상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속에, 생생하리만치 ‘고지에서 내려다보는‘ 경향이 잠재되어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떠한 차별 반대론자도 믿을 수 없다. 문제는, 이른바 ‘낮은 곳‘이 이미 ‘높은 곳‘이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낮은 곳에 있는 자의 복종이 악취를 풍기는 오만이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 로마서 강해, 칼 바르트
p 206 차별 감정과 진지하게 마주한다는 것은 ‘차별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에 계속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을 열어서 파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워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 차라리 모두 내던지고 죽고 싶다고 바랄 저도로, 즉 차별로 괴로워하는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 이를 때까지 자기 안에 숨은 나태함과 눈속임과 냉혹함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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