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레스트 검프 (2disc) - 할인행사
파라마운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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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때론 달기도 하고 때론 쓰기도 한 것이 어떤 맛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채 맛보는 초콜릿 상자만의 즐거움은 아닐까? 그런 것처럼 지금 당장 우리는 어떠한 맛의 초콜릿을 먹게 될지 모른다. 다만 그 맛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먹어나간다. 검프의 어머니가 말하듯 우리네 인생 또한 단맛일지 쓴맛일지 맛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 맛보는 즐거움을 멈출 수는 없다. 그것이 인생과 초콜릿 상자의 공통점이다.


20세기 미국사회는 다사다난한 사건들이 끊이질 않았다. 한 남자의 인생담을 통해 그러한 굴곡들이 보여지고 있다. 인생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 그렇기에 바람처럼 떠다니며 눈앞에 놓인 일들만을 즐긴다는 것. 자신이 하는 일을 앞만보고 달려간다면 죽이되든 밥이되든 무언가가 나타나지 않을까.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졌을 때 주변상황을 개의치 않고 앞으로 달려나가자고 한다. 그리고 끝도 없이 달려가는 와중에 비추어진 아름다운 풍경들. 인생 또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달려가지만 그렇게 달려가다보면 아름다운 풍경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사사로운 일에 얽매여 골몰하지 말고 아무 생각없이 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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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아웃케이스 없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오노 마치코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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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의 것도 아닌.



아이는 단지 아이일 뿐, 누구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대상에 소유격의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 대상은 주체성을 잃고 어딘가에 종속된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한 대상은 시간이 거듭될수록 수동적인 면모만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 발상일까. 가르침의 관계 또한 서로 간의 존중이 바탕이 되어져야 한다. 결코 자신의 뜻대로 거두어들이려 해서는 안된다. 비록 케이타가 6년간 아들로 지내오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형성되긴 했으나, 친자식이라도 자신의 이상을 주입하고 위계를 갖게 하는 것은 아이의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케이타를 우수한 인재로 키워내려는 료타의 마음은 아버지로써가 아닌 단순히 개인의 욕심이었다. 아버지라는 타이틀이 자식으로부터의 복종심과 개인의 권위성을 정당화 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영화 초반부에 던져졌던 두 아버지들의 골머리를 썩힌 문제(아이를 바꾸느냐 마느냐)는 아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키워야 한다는 우문현답으로 질문의 궤를 막아낸다. 


다행히 료타는 아이에게 선물하려던 카메라를 살피며 깨우치게 된다. 케이타에게 주려했던 카메라는 거진 케이타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케이타는 아버지와 함께 놀고싶어했던 마음을 저만치 달아나 그를 담아낸 사진으로 대신한다. 사진을 보며 복잡한 감정이 들었을 료타는 각자의 아이들을 존중하기로 결심하며, 멸시의 대상이라고 느껴졌던 류시이네에 돌아가 그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아이와 아버지는 두 갈래길로 나뉘어 걸어가다가 마지막 맞닿은 길에서 포옹한다. 케이타가 가는 길은 케이타의 길이었고 료타의 길은 료타의 길이었다. 그리고 료타는 맞닿은 길에서 케이타를 헤아린다. 이제 그러한 입장 속, 케이타의 길을 먼발치 뒤에서 묵묵히 따라가주는 아버지가 되지 않을까. 그는 아이를 속박하던 자신의 욕심으로부터 거두어내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려 할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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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 [할인행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야기라 유야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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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변명


아이들은 모르는 어른들의 사정이라고 말하듯이 어른들이 알 수 없던 아이들만의 사정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과연 알 수 없었던 것일까. 작품 속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깊게 관여하지 않는다. 거지 몰골을 하고 편의점에서 아폴로 2만원 어치를 사가는 아이들을 보며 점장은 소풍이라도 가나보구나 하며 눈 앞의 이익에만 시선을 두게 된다. 공원을 전전하며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으며 빨래를 널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 아무것도 모르고 싶을 것이다. 젊은 또래의 청년들은 그런 아이들을 걱정하며 심적으로라도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기도 하지만 이제 막 어른이 되어가는 그들에게 더해질 책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아이들을 방치하고 간 어머니는 무책임한 돈봉투와 함께 기약없는 약속과 믿음이라는 허상의 단어로 아키라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그녀는 자신도 행복해지고 싶다고 했다. 행복해지고 싶은 것은 아이들도 똑같을 것이다. 그녀가 그린 행복의 환상 속에는 아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의 행복은 아이들의 부재가 되지만 아이들의 행복은 어머니의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끝내 외면하고 그녀는 떠나갔다. 남겨진 아이들의 기억 속 어머니의 흔적은 바닥에 엎질러버린 매니큐어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흔적들을 가슴에 끌어 안은 채 묵묵히 각자의 역할을 해나간다. 부모로부터 결여된 책임의식은 고스란히 맏이들의 몫이 되어 어른스럽게 동생들을 돌본다. 게임하고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놀고 싶을 나이에 아키라는 그 욕심을 하나하나 포기한다. 그리곤 친구를 잃어가면서 지키려했던 내적 윤리의식마저 죽어가는 유키를 위해 놓아버리고 만다. 몇 년전쯤 일본에서 맨홀뚜껑이라던가 하수구 창살을 뜯어 판매했던 절도범들이 검거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아키라 식구들을 버리고 떠난 엄마나 그 절도범들도 책임감, 윤리의식의 결여를 물론 꼬집을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을 개인의 특성으로 치부한다고 문제가 매듭지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환경들이 그들을 그런 궁지로 내몰았을까. 

당시의 일본 사회는 버블 경제의 붕괴로 인해 참담한 난항들을 겪었을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자던 가정, 이웃들의 구성도 지독한 현실 앞에 씻겨나가는 비누 거품처럼 꺼져버렸다. 그리고 점차 핵가족의 형태를 취하는 사회현상에 따라 그들은 미래보다는 오늘을, 이웃보다는 자신을 챙기기에 분주하게 되었다. 그런 사회 속에서 책임의식 없는 부모로부터 자라난 아이들은 방기되고 주변으로부터 고립되고 만다. 

모두 힘든 사회에서 보란듯이 떠밀려온 아이들에게 세상은 아무런 손길도 내밀어주지 않는다. 그 속에서 모두 알 수는 있지만 알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모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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