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의 기저에 깔려있는 뿌리 깊은 여성혐오의 모든 원인과 인습들을 들추어내며 우리에게 당연스레 여겨졌던 것을 환기시킴으로써 좀 더 평등한 사회로의 목소리를 지향한다.

나는 원래 여고 남고를 구분 짓는 것이 성적 차별을 더 심화시키는 현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사실은 남녀공학 속에 여자들은 조연처럼, 그리고 여성이라는 정해진 이미지에 갇혀진 채 더욱 억압이 되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남고에서 만연하게 행해지는 호모소셜의 형식에 대해서는 인식의 개선이 필요할 것이다.


호모 소셜이라는 개념. 호모소셜의 사전적 의미는 동성끼리만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는 단어인데 이 내용은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남성들이 같은 남성을 남성이라고 인식시킴으로써 그에 반하는 다른 이들을 배제하고 자기들만의 소셜(사회)을 만들어낸 현상이다. 여성은 당연히 그런 호모소셜 속에서 객체화가 되어지고 자신들이 정해놓은 남성이라는 틀에 어울리지 않는 남성들도 객체 취급을 하며 배제시킨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런 현상을 느껴왔다. 호모소셜이라는 구체적인 용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사회가 제시하는 평균적인 남자의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내 모습에 같은 동성들은 나를 특별하다고 여겼다. (다행히 그렇게 차별적인 친구들을 만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냥 저냥 지내왔다.) 나는 어릴 적 그런 내가 이상한 걸까?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잘못되었고 나는 이상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욱 사회가 만들어 놓는 이런 틀들을 깨기 위한 노력이 절실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통하여 내가 알고 있던 기존 성에 대한 개념의 폭이 매우 넓어지고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의 역할들을 심리학적, 기호학적 측면으로 풀어내니 더욱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내가 여성이 아니라고 해서 안도하는 행위는 온전치 못하다. 진정한 사회의 평등을 원한다면 낡은 사고를 걷어내고 불편을 감수하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해야 한다. 현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혐오의 시선과는 개별적으로 인습적이게 느껴지던 의식들에 대해 상기해볼 수 있었다. 욕망에 대한 문제에 대해 더욱 깊은 고민을 해보아야겠다.

p20 - 하지만 고상한 척하며 성을 탐구하는 소설 대부분이 깜짝 놀랄만큼 통속 포르노의 정석을 따라 전개된다. 포르노의 철칙은, 유혹하는 이는 여자이어야하며 마지막에 가서는 쾌락에 지배될 것이다. "유혹한 건 여자라고. 나는 나쁘지 않아"하며 남자의 욕망을 면책시켜주는 대단히 단순한 장치이다. 저항하는 여자를 억지로 눕혀 범하는 강간물에서조차 결국에는 여자의 쾌락으로 끝이 난다. "왜 그래, 너도 좋았잖아"하고 말하는 듯 말이다. 마치 여성기는 어떠한 고통이나 폭력도 쾌락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다. 포르노그래피의 도달점이 남자의 쾌락이 아니라 여자의 쾌락이라는 역설은 전혀 수수께끼가 되지 못한다.
여성의 쾌락은 남성의 섹슈얼리티 달성을 재는 측정가능한 지표이며 남성에 의한 여성의 성적 지배가 완성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p36 -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부인하는 몸짓은 이질적인 것을 배제하는 몸짓보다 더욱 격렬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쟤는 고추도 안 달렸나봐‘ 같은 표현은 남성 집단에 있어서 구성원 자격의 실추를 의미하는 최고의 욕설이 된다. 남자 자격이 없는 남자를 남성 집단으로부터 추방하는 표현이 ‘고추 떨어짐‘ ‘계집‘과 같은 여성화 레토릭을 수반한다는 점은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남성 집단에 매복해 있을지 모르는 계집에 대한 경계는 주체 위치로부터의 전락, 즉 ‘나도 언젠가 성적 객체화 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의미한다. 때문에 남성 집단 사이에서는 계집에 대한 마녀사냥이 격렬하게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을 ‘호모포비아‘라고 한다. 성적 주체로서 남성 집단이 가진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호모포비아는 필수불가결하다.

- 포르노 규제가 연령 제한 표시나 액세스 제한 같은 수법으로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을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잔혹한 상상력이라 할지라도 표상의 생산 그 자체를 단속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단속하지 않는 것이 좋다. 표상과 현실의 관계는 반영이나 투사와 같이 단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꿈과 같이 보상이나 보완과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우리들은 상상력 속에서 줄기차게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현실 속에서 누구도 죽이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158 - 사람은 여성이 될 때 여성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혐오의 모든 것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 범주가 부여하는 지정석에 안주하면 ‘여성‘은 탄생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란 그 지정석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 여성 혐오에 적응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 때문에 여성 혐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는 없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이 여성 혐오와의 갈등을 의미한다. 여성 혐오를 가지고 있지 않은 여성에게는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때때로 "나는 내가 여자라고 하는 사실에 얽매여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며 고집하는 여자들이 있는데 그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나는 여성 혐오와의 대결을 줄곧 피해왔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 ‘도쿄전력OL‘은 자주적으로 개인 매춘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성적 객체‘ 가 됨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고 승리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중독시킨 황홀감의 정체였다.
‘주체적으로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통해 여자는 무엇을 달성하려 하는 것일까? 물론 남성을 단순한 성욕으로, 단순한 성기로 환원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하고 있는 바로 그것과 같은 일을 함으로써 그녀는 남자들에게 필사적인 복수를 한다.

-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두 가치 모두 남성에게 인정받고 승인되는 가치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A씨는 회사에서 출세하여 능력있는 여자로 칭찬받고 싶다는 ‘아버지의 딸‘로서의 남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남성 성욕의 대상으로서 선택받고 싶다는 여성적 욕망도 가지고 있었다. 두 경우 모두 남성은 승인을 부여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 그리고 승인을 부여하는 자의 모순은, 그가 승인을 구하는 자에게 깊이 의존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여성 혐오란 그 모순을 간파한 남자들이 느끼는 여성에 대한 증오의 대명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그래 맞아. 진짜 여자는 너무 감정적인 것 같아. 나도 그게 싫어" a양이 말한다.
"근데 너는 좀 특별하잖아." 남자가 인정한다.
"응. 나는 평범한 여자는 아니지" 그녀는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그러나 이 ‘예외‘를 통해 평범한 여성에 대한 멸시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다. 그녀는 호모소셜한 남성 공동체에 명예남성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나 그것은 표면적인 인정에 불과하며 같은 동지로 여겨지는 일은 결코 없다. 마치 백인 중산층 사회에 들어간 흑인과도 같다.
"검둥이 노예는 틈만 있으면 속이려 들고 사기를 치려고 하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안 돼. 자네? 자네는 특별해. 우리랑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까."
중산층 집단 속에서 이런 말을 들은 흑인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동조하여 차별을 조장하는 쪽에 설 것인가, 아니면 화를 내고 그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것인가.

​p288 - 남자는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남성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남자는 남자들의 집단에 동일화하는 것을 통해 남성이 된다.
남자를 남성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남자들이며 남자가 남성이 되었음을 승인하는 것도 다른 남자들이다. 여자는 기껏해야 남자가 남성이 되기 위한 수단, 혹은 남성됨의 증명으로 부여되거나 쫓아오는 보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여자를 여성으로 만드는 것은 남자이며 여성됨을 증명하는 것도 남자들이다.

​p289 - 남성에게 이성애 질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이 성적 주체임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성애 장치 아래에서 남자와 여자는 대등한 짝이 될 수 없다. 남성은 성적 욕망의 주체, 여성은 성적 욕망의 객체 위치를 차지하며 이 관계는 남녀 사이에 비대칭적이다. 이성애 질서란, 남성은 동성 남자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되며 남성이 아닌 자만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하라는 명령을 가리킨다. 뒤집어 말하면 남성에 의해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된 자는 남성 아님=여성이 된다. 그것이 남성일 때 그자는 여성화, 즉 여자 같은 남자가 된다. 여기서 여성이란 그 정의상 남성의 성적 욕망의 객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의 성적 욕망을 환기시키지 않는 여자는 정의상 ‘여자가 아니게‘ 된다.
호모소셜한 집단이란 이처럼 성적 주체임을 서로 승인한 남자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여성이란 이 집단으로부터 배제된 자들, 오로지 남자들에게 욕망되고 귀속되고 종속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들에게 부여된 명칭이다. 따라서 호모소셜한 집단의 멤버가 여성을 열등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 욕망의 삼각형에서 욕망의 주체는 남성으로 제한된다. 삼각형 속에서 여성은 의사가 존재하지 않는 욕망의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객체에 대한 욕망을 통해 남자들은 자신들이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욕망의 주체라는 사실을 확인한. 남성이 욕망하는 여성의 가치가 여성이 욕망하는 남성의 가치보다도 척도가 일원적이며 단순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은 자신이 획득한 가치를 다른 남성에게 과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p305 - 불쾌함을 느끼며 책을 쓰고 불쾌함을 느끼며 독서해야 하는 책을 쓴 것은 어째서일까? 아무리 불쾌하다 하더라도 눈을 돌리면 안되는 현실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앎으로써, 설사 쉽게 달성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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