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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넘버 - 제2회 대한민국 전자출판대상 대상 수상작
임선경 지음 / 들녘 / 201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광고를 보고 흥미로운 설정에 끌려 단숨에 읽어버렸다.
간단한 줄거리를 말하자면 심부름 센터에서 일하는 주인공 원영은 과거에 큰 사고를 당한 이후로 주변 사람들의 남은 수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내용이다.
작가의 섬세한 묘사는 글에 생명력을 더해주어 내가 겪는 일들인 것처럼 단숨에 읽을 수 있게 했다.
책의 전반은 병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후반에서는 백넘버를 통해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책은 백넘버를 통해 우리 곁에 존재하는 당연하지만 낯선 죽음을 시각화하여 조금은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구성이 되어졌다. 그래서 백넘버에 관한 이야기만 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천천히 마주하게 되는 자연의 섭리에 대한 강조를 통해 죽음은 결코 우리와 멀리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각인시켜준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는 것이 죽음이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뒤바꿀 수 없고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곁으로 다가오게 된 죽음은 우리에게 또 한번 질문을 던진다. 나의 수명은 과연 어디까지 일까? 죽는 순간을 알 수 있게 된다면 매우 불쾌할 것 같지만 그만큼 알고자 하는 욕구도 클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 순간을 알게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100세 수명이 된 시대에서 우리는 모두 자신의 기나긴 앞날을 걱정하고 도모할 것이다. 시한부 삶이 아닌 이상 10년 이내, 5년 이내에 죽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살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을 것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불가능한 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내일을 걱정하기 보다 당장의 오늘을 살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이다.
책은 결코 직접적으로 지금을 살라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죽음을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그래서 의젓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생각하게 도와준다.
오늘 하루도 누군가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자신의 수명을 다할 것이다. 그것은 나와 전혀 관계없는 일처럼 보이겠지만, 운명이라는 굴레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두 우리의 이야기이다.
p 111 앞으로 석 달 남짓. 할머니는 내년 봄을 보지 못할 것이다. 쏟아져 내릴 듯한 개나리도 눈처럼 휘날리는 벚꽃도 지금 보는 것이 마지막이다. 팔십 몇 번을 반복한 할머니의 봄 구경은 이제 끝났다. 그런 거였군. 지금 보는 것이 마지막일지도 몰라서, 이 계절을 내년에도 후년에도 또 보리라는 확신이 없어서 노인들은 그렇게 색색으로 차려입고 고속도로를 꽉 채워 꽃구경, 단풍구경을 떠나는구나.
p 115 봄은 봄이었다. 햇살은 모두의 등허리에 공평하게 내렸다. 밖에서 우리가 빠져나온 병원을 쳐다보니 거인의 정원처럼 느껴졌다. 봄이 왔는데도 영원히 겨울이었던 거인의 정원. 봄이 온몸을 감쌌다. 나에게는 몇 번의 봄이 남아 있을까 생각했다. 이 봄이 마지막 봄인 것처럼 모자쓰고 새 옷 입고 꽃놀이를 가볼까. 이 봄이 마지막 봄인 것처럼. 이 햇살이 마지막 햇살인 것처럼. 이 바람이 마지막 바람인 것처럼. 자울자울 잠이 왔다.
p 189 아이가 길을 걷는다. 한눈팔지 않고 걷는다. 길섶에 핀 꽃들도 외면하고 나무 그늘에 앉아 쉬지도 않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도 느끼지 못하며 열심히 걷는다. 그러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길이 끝난다. 길이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나조차 말해주지 않는다.
p 236 내 백넘버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나의 구원이다. 나는 모르고 살 것이다. 그래서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불가항력적으로 죽을 것이다. 불가항력이 주는 자유를 맘것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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