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아 있는 나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찬란한 햇살의 볕을 지나 저물어가는 황혼녘에 서있는 노집사의 이야기. 황혼은 다가올 어둠을 맞이하기 전에 펼쳐져 있던 세상을 강렬한 색으로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회고의 순간.
구조적으로 온유하며 수수한 형태의 이 이야기의 골조는 무척이나 섬세하고 단단한 고치처럼 높은 밀도를 자랑한다. 1920~30년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최고의 품위를 자랑하던 가문의 집사가 주인이 바뀌고 난 뒤, 휴가를 떠나면서 격동기였던 그 시대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화자는 집사가 갖추어야 할 품위에 대하여 언급을 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집사로서의 신념을 내비친다. 그는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으나 자신이 위치해야 할, 그리고 지켜야 할 품위라는 형식에 온전히 동화되어 있음을 에둘러 묘사한다. 그는 매 순간 번쩍거리는 은식기, 아버지의 임종마저도 지키지 못할 만큼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집사가 지녀야 하는 전문적인 위치에 스스로 합리성을 지닌다. 그 자신에 대한 합리화는 인간성 위에 집사로서의 직무 의식이 깃들어있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에 상응하지 않는 사사로운 감정들을 일제히 배제시킨다. 그런 고로 자신이 무조건적으로 신봉하는 주인의 명령에 개인의 의견을 내비치지 않으며 품으려 하지도 않는다. 가히 기계와도 같은 정신력의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런 섬세한 태도는 작중 자신이 계획하고 진행되는 모든 순차적인 일들의 프로세스들을 통괄하는 모습이나 타인의 행동으로부터 도출되어지는 다방의 추론들이 그를 더 절대적인 기계의 모습처럼 다가오게 한다.
그런 무정한 직무 의식은 나치스와 얽혀있는 달링턴 경의 상황에도 티끌의 의구심 없이 냉정한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이 행동은 집사의 이름으로 바라본다면 품위라고 할 수 있겠으나, 현대 정치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사회적 파급을 무시한 채 맹목적인 신뢰만을 기치로 고위 관료들을 섬기는 이른바 '문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내면적으로는 스티븐스도 분명 이해하고 있으리라. 그렇지만 자신의 신념에 묵묵히 전념을 하였기에 그는 마음 어딘가로부터 은밀한 승리감에 도취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일급 집사의 틀로부터 벗어난 켄턴 양이 존재한다. 켄턴 양은 합리적인 면모와 인간성을 보여주며 스티븐스의 의식과 대비되어진다. 일류는 될 수 없더라도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기로 택한 켄턴.
마지막에 그는 하루 중 가장 좋은 저녁을 만끽하며 자신에게 부족한 능력인 농담을 발전시키기로 한다.
무척 인상적인 책이었다.
p 57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집사로 산다는 것은 무슨 판토마임을 연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p 139 "켄턴 양, 부친께서 방금 작고하셨는데도 올라가 뵙지 않는다고 막돼먹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시오.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아버님도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처신하기를 바라셨을 거요."
p 189 "스티븐스 씨, 당신이 그런 생각을 작년에 털어놓았다면 저한테 얼마나 힘이 되었을지 알기나 하세요? 제 수하 처녀들이 해고되었을 때 제가 얼마나 심란했는지 뻔히 알고 계셨잖아요. 당신이 한마디만 해 주었어도 큰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말해 보세요, 스티븐스 씨. 당신은 왜, 왜, 왜 항상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 살아야 하죠?"
p 236 저는 지지를 받든 못 받든, 사실 이 방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도 제 말을 ‘모조리‘ 지지하는 사람은 없는 줄로 압니다만, 최소한 사람들에게 생각하게끔 만들 겁니다. 각자의 의무가 무엇인지 일깨워 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싸웠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p 282 아주 깊은 승리감이 내 마음속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이 감정을 어디까지 분석해 보았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오늘날 그 순간을 돌이켜보면 그다지 설명하기 힘든 것 같지는 않다. 그때 나는 극도로 힘든 시간들을 거의 마무리한 직후였다. 그날 저녁 내내 ‘내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느라 애써야 했고, 게다가 내 부친도 자랑스러워하셨을 정도로 잘해 냈다.
p 293 "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저는 스티븐스 씨 당신과 함께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곤 한답니다. 제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화를 내며 집을 나와 버리는 것도 바로 그런 때인 것 같아요. 하지만 한 번씩 그럴 때마다 곧 깨닫게 되지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남편 곁이라는 사실을. 하긴, 이제 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방법도 없으니까요.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p 300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