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년 전의 나는 글쓰기는 물론 독서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 잡다한 생각이 요동치고 있던 철부지 어린아이였을 뿐이다. 그 철부지 소년은 군에 입대하면서 학식있는 또래들의 생각의 깊이를 경험하며 의아해했다. 모니터를 통해 지켜본 그들의 토론은 분명한 주관과 사유가 담겨있는 수준 높은 논쟁이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고 같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어떻게 폭넓은 사고와 철학들을 지니고 있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하게 느껴졌던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없이 작아졌다. 그리고 결론은 책이라는 것을 깨우치고 나는 평생 가까이 해본 적 없던 책을 군생활 내내 곁에 두고 살았다. 그 당시는 구체적인 방식도 없이 무작정 끌리는 대로 읽어나가던 시절이었지만, 이어지는 독서들을 통해 점차 나만의 방식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스스로가 제시한 기준점에 부합하는 지성인이 되기 위해서 몰랐던 것들을 배워나갔다. 과거의 내모습을 자성하자면 나는 고교교육과정까지 전부 주입식암기를 통해 외웠기 때문에 생각하는 활동은 전혀 없었고 머릿속에 남는 것 또한 없었다. 그렇기에 상식적인 것들은 내게 새로운 개념들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잦았다. 전체적인 기초가 잡혀있지 않아 띄엄띄엄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이 책은 나에게 비어있던 '논리'라는 개념을 일깨워 준 책이다. 다른 이들에겐 당연한 개념이었을테지만 논리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무척 충격적이었다. (책이 충격적이라기보단 나의 무지가 충격적이라는 뜻이다.)


나는 독서를 통해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 글쓰기를 통해 그 안에 더 다가가려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써내려간 글들은 의식의 공간을 떠다니는 구름들처럼 무분별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단순히 생각나는 대로 적은 메모의 개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이 책과의 만남은 부족한 내 글을 인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유시민 작가는 줄곧 독자들에게 쉽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써야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글이 읽기가 무척 간편했다. 자신만의 내공에서 빚어진 노하우가 그를 수년동안 꾸준히 베스트셀러 작가로 거듭나게 해주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인문 교양서보다는 작법, 기술서의 책이었기 때문에 주관적인 글쓰기가 되었지만 유용하고 핵심적인 방법을 배웠다. 개념들을 체화시켜 어제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지, 어떤 글을 써야하는 지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p 24
무언가를 주장하려면 그 주장의 타당성을 논증할 책임이 생긴다는 것

p 36
민주주의 원리를 깊이 인식하고 존중하려는 사람이라야 논증의 미학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논증을 위한 토론 그 자체를 없애버리려 하고 논증하려 애쓰는 사람을 배척한다.

p 91
글은 지식과 철학을 자랑하려고 쓰는게 아니다. 내면을 표현하고 타인과 교감하려고 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 사람의 마음에 다가서야 훌륭한 글이다.

p 263
사람은 무엇인가 표현할 것이 있으면 글을 쓰고 싶어진다. 내면에 어떤 가치 있는 것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글로 표현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학교의 수영장에서 발생된 사고. 그 사고의 내용은 어린아이의 추락사였지만 그 알려진 사실 뒤에는 누군가의 검은 속내가 깃들어 있었다. 이야기는 그 사고를 통해 아이를 잃은 부모인 어느 교사의 독백형태로 진행이 되어진다. 나긋나긋한 어조로 사고에 관한 진실을 파헤치고 결국엔 자신의 학급내에 있는 두명의 학생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그리고 청소년 보호법에 의한 약소한 처벌을 원치 않는 선생이 그들에게 HIV 혈액을 주사한 우유를 마시게 하는 복수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죽는 순간까지 반성하라고 복수한다.


이 하나의 사건과 연관되어진 5명의 인물들이 각각의 모놀로그 방식으로 묘사되어지는데 그들의 심리와 감정이 밀도있게 드러난다. 그리고 각자는 스스로를 어쩔수 없는 상황에 처했단 식으로 합리화하며 서술되어진다. 그들은 타인이 만들어놓았다는 자신의 난처한 상황에서 당위성을 찾고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한 태도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묘사하고 읽는 이들로 하여금 동정심까지도 유발하게 만든다.


유코는 학생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하여 윤리적인 절차를 따른 체벌이 아니라, 개인의 복수심을 끌어내 감정적인 형태, 다른 말로는 인간적인 형태로 진행시킨다. 그것은 사회의 틀을 벗어난 제재이지만 범죄를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하나 느끼지 못하며 더 큰 악덕을 탐하는 학생이란 탈을 쓴 악마에게는 충분히 어울리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작 중에서도 피해자의 유족에게는 범인을 벌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최근에도 이슈가 되는 청소년 범죄행각들을 살핀다면 그들의 수준은 이미 청소년을 넘어서 극악무도한 수준에 이른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무책임한 가정과 수위높고 자극적인 미디어에 짙게 노출되어 있는 학생들은 청소년이란 이유만으로 합당한 체벌로부터 벗어나고 벼슬인 마냥 그 직위를 과시하며 방어태세를 취한다. 누구나 동의하지 못하는 불만 많은 이런 조치에 대해 픽션으로나마 복수극을 묘사하니 통쾌한 감정까지 들기도 한다. 비록 윤리적인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이렇게나마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복수를 펼침으로써 사회의 엉성한 법적 시스템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읽는 내내 미나토 가나에의 문장에 이리저리 휘둘려다니며 그 필력으로부터 헤어나올 수 없었다. 특히 작품의 입체적인 구조와 연출은 이 하나의 사건과 인물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영화로도 나왔다는데 어떻게 연출이 이루어졌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눈여겨 봐야할 것같다. 데뷔작에 이만한 대작을 남겼으니....


p 78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질책하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장 먼저 규탄하는 사람, 규탄의 선두에 서는 사람에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아무도 찬동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규탄하는 누군가를 따르기란 무척 쉽습니다. 자기 이념은 필요 없고, ‘나도, 나도‘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게다가 착한 일을 하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으니 최고의 쾌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 번 그 쾌감을 맛보면 하나의 제재가 끝나도 새로운 쾌감을 얻고 싶어 다음번에 규탄할 상대를 찾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잔학한 악인을 규탄했지만, 점차 규탄받아야 할 사람을 억지로 만들어내려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이미 중세 유럽의 마녀 재판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벌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읽는 동안 와닿는게 극히 없다고 느낄 정도로 일반적인 성장소설이라는 어림짐작을 하고 있었다. 윤재가 그렇듯 일반적인 이성위에 잘 지어진, 그렇지만 미학은 없는 그러한 소설이 아닌가에 대해 읽는 내내 회의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주인공처럼 감정을 잘 느낄 수 없게 되버린 것일까 생각하며 무던히 읽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은 작가만의 고도의 탄력적인 설계가 작용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의 무딘 감정에 몰입된 나의 모습과, 그 감정으로 바라본 세계의 모습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설에 완벽히 몰입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느껴진 것이었다. 이걸 분명히 깨달았던 부분은 마지막에 윤재가 지금까지의 무딘 감정을 떨쳐내듯, 독자들이 느낄 수 있던 이 소설의 진짜 감정의 미학에 있다.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윤재의 주변에는 여러 조력자들이 극의 감정선을 균형있게 잡아주고 있었다.


작품 감정의 주체적 인물인 곤이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를 부러워하며 자신의 나약한 감정들을 떨쳐버리고 싶어하지만 그의 진실된 내면의 두려움은 의지로 떨쳐낼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나비에게 고통을 가하는 장면에서 그가 숨기고 있던 나약한 감정들이 잘 드러난다. 그도 그런 감정들을 처음부터 버려내고 싶어하진 않았을 것이다. '상처받지 않기위해서 상처를 준다'라는 곤이의 태도는 자신의 비극적인 삶으로부터 파생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곤이는 자신의 길을 따르기 위해 더 상처주는 길을 택하게 되지만 마지막에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는 윤재를 보며 내면의 감정이 요동치고 상처받는 자신의 모습을 용인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런 윤재도 곤이를 대신해 칼에 찔림으로써 자신을 지키기 위해 희생당한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하고 그 감정을 조금이나마 깨우치게 된다. 그렇게 둘은 성장했다.


개인적으로 도라와의 감정라인이 더 풍부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소설의 피날레를 아름답고 깔끔하게 장식하는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전반적으로 무미건조했던 느낌이 이어지다가 터져나오는 감정이었기에 효과가 극대화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박사는 말한다. 결국은 성장해가는 과정이라고.


구할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 의해, 무엇인가에 의해 때가 다른 도움이 기다리고 있을 뿐.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명의 괴물 소년들이 서로를 통해 성장해나가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p 40
엄마는 모든 게 다 나를 위해서라고 했고 다른 말로는 그걸 ‘사랑‘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엄마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하려는 몸부림에 더 가까웠다. 엄마의 말대로라면 사랑이라는 건, 단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 저럴 땐 저렇게 해야 한다, 사사건건 잔소리를 늘어 놓는 것에 불과 했다. 그런게 사랑이라면 사랑따위는 주지도 받지도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p 128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썼을까. 도와 달라는 손짓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원망이었을까.
엄마와 할멈에게 칼을 휘두른 남자와 곤이는 P.J. 놀란 같은 타입이었을까. 아니면 P.J. 놀란과 가까운 건 오히려 나였을까.

p 239
벽에 박힌 못에 찔렸는지 내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그걸 본 곤이가 어린아이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곤이는 그런 놈이다. 피 한 방울에 눈물을 찍어 내고 남이 아파하는 걸 보면 저도 아픈 애다.

p 247
마지막으로 눈이 내리던 날. 그러니까 내 생일날. 피로 눈을 물들인 엄마가 쓰러져 있다. 할멈이 보인다. 표정이 맹수처럼 사납다. 유리창 너머로 나를 향해 외친다. 가. 가ㅏ. 저리 비켜! 그런 말은 보통 싫다는 뜻이다. 도라가 곤이에게 외친것처럼, 꺼져 버리라는 뜻이다. 왜지. 왜 나한테 가라고 하지.
피가 튄다. 할멈의 피다. 눈앞이 붉어진다. 할멈은 아팠을까. 지금의 나처럼. 그러면서도 그 아픔을 겪는 게 내가 아니고 자신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지겨울 법도한 플랫 속을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 우리가 살아오면서 두 명 정도의 인연이 있을 법한 지혜라는 흔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여성은 적당히 튀지 않는 삶 속에서 적당한 사건들을 겪어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런 적당한 소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무난한 일상을 묘사하며 진행되는데 사실 이 모두가 겪고 있는 일상, 그리고 무난하게 받아 들여지는 사건들은 절대로 무난하게 넘어가져서는 안되는 일들이 대다수이다. 약자를 괴롭히고 그들을 착취하며 권력의 힘으로 짓누르는 이 시대는 갑질이라는 현상이 곳곳에 만연해있다. 그들은 계속되는 갑질과 언행으로 종종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지만 그들이 반성하는 순간은 우리가 눈 한번 깜빡할 정도로 반짝함과 동시에 곧바로 수면 아래로 묻혀져 버린다.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떨어지는 유성처럼 잠깐 찬란하게 빛나는 그 순간일 뿐. 유성이 떨어져 버리고 난 뒤면 잠잠해지다가 조용히 잊혀진다. 그러한 의식은 각자의 내면에 잊어서는 안된다고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점차 흐려지기 마련이며, 그러고는 곧바로 잊지 말아야 할 유성이 또 하나둘 떨어지고 만다. 떨어지는 유성에 정면으로 맞대어 피해를 입지 않은 이상. 그러한 행렬은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반복되어지는 중이다.

청년들은 자신의 현실에 슬퍼하고 좌절한다. 사회는 그런 청년들에게 끊임없이 희망이란 가치를 좇으라 강요한다. 기준치에 미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고립되고 낙오되어진 채.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한다. 왜, 무엇이 이렇게 만든 것일까? 나의 불행은 오로지 내 잘못인 걸까? 나의 판단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 구조는 우리를 소극적이고 위축되게 만든다. 그런 사회에 당당하게 나타난 규옥은 작은 체 게바라를 그리며 갑에 대해 저항하는 놀이들을 계속해서 궁리하고 행한다. 지혜는 무인과 남은이란 묘한 이름을 지닌 사람들과 더불어 평범한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이지만, 그런 투쟁가에게 합세하여 작지만 확실한 저항을 지속해나간다. 

그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관심을 끄고 무시하는 것은 우리가 말 잘 듣는 순한 양이란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내에서 최선을 다 해야 하며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할 힘을 가지고 있다. 분노를 억압하는 사회는 모두를 순한 양으로 만든다. 대인 관계에서 분노는 지양할 필요가 있다고 보지만 부당한 사회 구조에 대해서 우리는 매 순간 분노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분노할 줄 아는 힘은 사회에 필요한 성분이다. 그래도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다행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청와대의 청원이 생겨 났다는 것. 여론의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 댓글 공작들도 외적으로는 혼란스럽지만 피가 끓고 있는 자들의 내면을 선동시킬 수는 없다. 작은 목소리들의 힘이 합쳐져 사회에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의 기초적인 덕목이다.

우리 사회의 88년생 김지혜 씨들이 부당한 사회로부터 서서히 저항을 해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의 평범함이라는 이미지가 길들여지는 순한 양을 의미하고 있음을 나타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내보일 수 있는 평범함의 의미는 부당한 일에 대해 연약한 힘으로 두드려 대고 개미의 목소리로 울부짖는 반항하는 양의 태도를 취하자고 소설은 말한다. 우리는 기득 세력에 대해 분명한 약자의 입장이기에 작은 힘이 모여서 큰 힘을 이룬다면 큰 권력과도 맞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가 한 순간이라도 그런 식으로 부조리에 대해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규옥이라는 든든한 지원자가 있었기에. 그만한 버팀목이 뭔지 모를 위안을 전달해주었기에. 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정작 사회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곁에, 규옥이란 행운의 버팀목과의 우연한 만남은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내용일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이 그러한 지혜들에게 규옥만큼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한 순간 사회의 지혜는 서로에게 규옥으로써 두 가지의 모습으로 발현하는 때가 나타나지 않을까.


p 80
"그런데 사실 난 가끔 궁금해요. 우리가 욕하고 한심하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입장에 놓였을 때 나는 그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비판하는 건 쉬워요.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 상식을 잣대 삼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이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순간에 놓이면 존엄성과 도덕, 상식을 지키는 건 소수의 몫이 돼요. 내가 그런 환경과 역사를 통과했다면 똑같이 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결국 뭔가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p 91
억울하건 화가 나건, 사람들은 세상에 비일비재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꾸역꾸역 잘도 잊어버렸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잊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아니, 살아지지 않는다.

p 136
어쩌면 정진 씨를 만날 때마다 바랐었는지도 모른다. 정진 씨 같은 건 없다고 말해줄 사람이 있기를. 혼자 있지 말라고, 밥을 같이 먹자고 말해줄 사람이 있기를. 혼자 있지 말고 함께하자는 손길을 내밀어줄 누군가가 있기를....

p 202
"가서 항의해요. 가만있으면 그게 당연한 줄 알아요. 가만있으면 그렇게 해도 되는 것처럼 대한다구요."

p 232
무거운 마음을 실어 터벅터벅 걷는데 갑자기 발밑에 무지개가 떠서 걸음을 멈췄다. 어디선가 흘러온 기름이 작은 물웅덩이에 고여 찬란한 무지개띠를 만들어낸 거였다. 그런데 모양이며 색이 어찌나 선명한지, 진짜 무지개보다 더 진짜 같았다. 그 묘한 아름다움이 생경해서 기름띠가 물 위에 자리 잡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꼭 비 온 뒤 청명한 하늘에 뜨는 무지개만 아름다운 건 아니구나. 아무런 사건도 등장인물도 없는 그날의 기름 무지개가 내 인생에서 꼽는 몇 장면 중 하나란 건 참 아이러니하다.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난한 환경에서 살아온 밴스. 그가 살아온 힐빌리의 사회는 가난 그 이상의 거칠고 투박한 환경을 자랑한다.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삶이 보여지는 데 그것은 그들에게 일상이었다. 그는 마약에 취해, 지속적으로 바뀌는 남편들에 빠져 살던 엄마로부터 도망쳐 조부모들과 생활한다. 그들은 어릴 적 삼촌에게 장난감을 못 만지게 하는 점원 앞에서 장난감을 부셔버리고,술을 마신 채 귀가한 할보에게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이기도 하며,총을 장난감 다루듯 가지고 노는 매우 솔직하고 거친 사람들이었다. 괴팍하고 화끈한 성격이긴 하지만 따뜻하고 진심 어린 할모와 할보의 애정을 받고 자란 그는 지독한 환경을 벗어나기로 다짐하며 열심히 살아낸다. 이 지역에서의 삶은 어찌 보면 생존해낸다는 말이 더 적합할 듯 하다. 밴스에게 이러한 환경이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은 중독자가 되어버린 엄마를 보며 자신이 잘못키웠다고 자책을 하고 한 번도 흘리지 않던 눈물을 터뜨리는 할보와 할모의 굳건한 다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성취해내고야 만다. 


'뭐든 할 수 있다. 절대 자기 앞길만 막혀 있다고 생각하는 빌어먹을 낙오자처럼 살지 말거라'


사실 그가 출세하는 과정에서 그의 노력은 자세히 비춰지진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공부를 열심히 했고 운 좋게 로스쿨에 합격하고 사회적 자본인 주변 사람들을 잘 만나 승승장구를 누리는 순탄한 후반부의 인생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노력의 출처는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삶으로부터 길러진 생존력 덕분일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수많은 고통과 위험으로부터 생존해내었기에 훗날의 고통은 별 것 아니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국가는 다행히도 장학금을 통해 나름의 보장을 해준다. 그렇듯 사회의 궁핍한 면모는 역설적으로 사람의 끈기와 투지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오하이오에서의 삶을 빠져나온 밴스가 로스쿨 학생의 삶과 힐빌리 청년의 삶 사이에서 갈등을 벌이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상승된 신분을 즐기는 태도로부터 만들어내는 인식의 차이가 자신의 과거를 비하하고 외면하는 마음이 되지 않기 위해 그는 노력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놓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세상을 파악하는 과정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똑같이 겪고 있는 환경의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사회에 갇혀 고립되어지고 피폐한 삶을 이어나가게 된다. 주변에 밴스처럼 괜찮은 사례가 있지 않은 한 그들은 반복되는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 시점에서 이 소설은 매우 의미 있게 작용된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싶다던 할모의 소망과 마음을 이어받아 이 소설을 통해 그들에겐 일상이지만 우리에겐 충격적인 사회를 직시하게 해준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이 고립된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생각해 보게 될 것이고, 자신들의 사회를 묘사한 이 책을 본 진정한 '그들'은 이런 선례를 통하여 자신도 해낼 수 있다는 조금의 희망을 품어냈을지도 모른다.


갇혀진 세계는 어느 나라에든지 존재한다. 우리는 밴스가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그 세계에 더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려 해야한다. 세상에 수많은 J.D와 브라이언이 공평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p 49
내가 할모라고 부르는 말괄량이 블랜턴 여사와 블랜턴 남자들은 힐빌리의 정의의 집행자였으며, 내게는 최고로 멋진 사람들이었다.

p 220
할모는 내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비통하고 실망스러운 일을 겪고 난 뒤에도 결코 그 희망을 놓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평생 그토록 배신을 당해놓고도, 언제나 그들을 믿을 구실을 찾아냈다.

p 238
할모는 진심으로 마음 아파했다. 마약, 다툼, 가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생활은 너무도 비참했다. 이웃들의 삶에는 지독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p 305
힘 있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의 처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우리를 도우려고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p 332
나는 예일대 로스쿨 학생이 될 건지 힐빌리 조부모님을 둔 미들타운 청년이 될 건지 선택을 해야 했다. 전자를 택하면 서로 인사치레를 하고 뉴헤이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담소를 나누게 되겠지만, 후자를 택하면 그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와 다른 편이 되어 내가 믿지 못할 존재가 될 터였다. 그녀는 조카와 함께 참석한 칵테일 파티나 근사한 만찬에서 오하이오 사람들이 얼마나 촌스러운지, 그들이 총과 종교에 얼마나 빠져 사는지 얘기하며 깔깔댔을 게 뻔했다.
나는 거기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심한 대답으로나마 문화적 저항을 드러냈다.

p 371
잘 풀리건 안 풀리건 간에 인생에서 개인의 탓은 어느 정도인가? 대를 거쳐 결점을 물려준 문화와 가족, 자식을 망쳐버린 부모의 탓은 어느 정도인가? 엄마의 인생에서 엄마의 잘못은 얼마나 되는가? 어디까지 비난을 해야 하고 어디서부터 공감을 해야 하는가?

p 403
브라이언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 부모와 연락을 끊는 건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다. 우리는 한순간도 우리 부모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그들이 변하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은 적도 없다. 오히려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나 법적 조치 때문에 자기보호적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