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되리, '나는 사랑의 신봉자'
서울여성영화제 4인 감독을 만나다 1
2006.04.17 / 김용언 기자 

일상에 만족할 줄 모르는 여자와,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겁내는 남자가 만났다. 마법의 물고기를 낚은 어부와 현대판 인어공주가 이뤄나가는 독특한 러브스토리 <내 남자의 유통기한>은, <파니 핑크>로 유명한 도리스 되리 감독의 신작이다.

감독의 이름이 낯설었다. 유명 스타도 출연하지 않았다. 하물며 미국도 아닌 독일영화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994년 한국 극장가를 조용히 뒤흔든 영화 한편이 있었으니 바로 도리스 되리 감독의 <파니 핑크>였다.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여자 나이 서른에 좋은 남자를 만나기란 길을 걷다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더 어렵다”라는 명언과 함께, 우울한 인생을 탓하기에 앞서 나 자신부터 사랑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는 격려와 행복한 유머로 고독한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그 영화 말이다. 보편적인 인기와 더불어 컬트적 인기까지 누린 드문 케이스 중 하나라고 할까. “물론 모든 감독들은 관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최대한 잘 전달될 수 있기를 바라며 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나와 관객의 감정이 딱 맞는 타이밍을 예상하는 건 불가능하다. <파니 핑크>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멕시코, 베트남 등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매년 발렌타인데이마다 대학과 아트하우스 극장 등지에서 <파니 핑크>가 상연된다. 이렇게 너무나 다른 나라들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까? <파니 핑크>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인기 있을 수 있었을까? 나조차도 여전히 놀랍다.” 그 이후 꼭 12년 만에 도리스 되리 감독의 또 다른 영화가 관객들을 열광시키는 중이다. 8회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내 남자의 유통기한>이 바로 그 작품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도리스 되리 감독은 1983년 <진심에서 우러나와>로 데뷔한 이래 <고래의 뱃속에서> <남자들…> <천국> <생일 축하해!> <파니 핑크> <확실한 계몽> 등을 통해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격찬 받는 감독 반열에 올랐다. 그녀의 영화들은 일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 속에 희비극적인 정조를 녹여 넣으며 보편적인 감수성을 적재적소에 건드리는 뛰어난 드라마로 평가받고 있다. “완전히 팝콘용 영화거나 완전히 예술영화거나, 양쪽 모두 내게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 코미디와 비극도 마찬가지다. 둘 중 하나만 택한다면 비현실적이고 깊이가 없어진다. 계속 달라지는 리듬에 맞춰 춤출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해외 평자들에 따르면 독일 내에서 엄청난 흥행과 비평적 성공을 동시에 거두었던 도리스 되리의 1985년 작 <남자들…>을 두고 이런 평가까지 내린다. 1982년 베르너 라이너 파스빈더가 사망한 이래 뉴 저먼 시네마의 격렬한 저항이 끝났고, <남자들…>로 대표되는 코미디의 새로운 시대, 즉 즐겁지만 마냥 가볍지만도 않고, 그러면서 상업적 장점을 잃지 않은 엔터테인먼트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이다.

<내 남자의 유통기한>도 그녀의 달콤씁쓸한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채, 도리스 되리의 관조적이며 한층 깊어진 시선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의 물고기에 관한 옛날 동화로부터 <내 남자의 유통기한>이 시작되었다.” 디자이너 이다와 비단잉어 전문가 오토는 일본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져 단숨에 결혼식까지 올린다. 그러나 열정은 잠시, 곧 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넓은 집과 정원, 귀여운 아이, 충분한 작업 공간, 세계적인 명성을 끊임없이 바라는 이다와 ‘지금 이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며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오토 사이에 균열이 온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균열을 극복하려 애쓰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사실 한국에서만 이런 줄 알았다. 가정과 직업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려 애쓰는 슈퍼우먼 콤플렉스, 그렇게 동분서주하는 상황도 몰라주고 “혼자 잘난 척하는군”하는 삐딱한 시선에 대한 분노,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캐묻지 않은 채 그저 따뜻하게 안아주기를 바라는 고독한 심정…. 하지만 도리스 되리 감독은 그에 대해 “실망시켜 미안하다”라며 웃는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남자들은 영화 속 오토처럼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에 대해 매우 수동적인 방어 태도를 취한다. ‘아, 당신 슈퍼우먼 할래? 그러든가. 난 그에 대해 할 말 없고 관심도 없어’ 이런 식으로. 이 부분은 지난 25년 동안 독일에서도 계속 논의된 문제다.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에 대해서는 얘기가 이미 끝났다. 이제는 역할의 진정한 전환, 또는 남녀가 함께 맞춰 나아갈 수 있는 리듬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경제적 주도권에 의해 남녀의 역할이 결정되었던 1백 년 전의 상황에서 벗어나, 이제는 사랑 그 자체만으로 서로를 선택하길 원하는 시대가 되었다. 도리스 되리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사랑이 어떤 의미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표현하고 싶어 한다. “사랑은 변화가 심하고 센시티브한 영역이다. 언제나 새롭게 정의내리고 그 본질을 탐구해야 한다. 남녀의 위치가 거의 비슷해진 지금에 이르러 사랑은 1백 년 전과 완전히 다른 단계에 접어들었다. 복잡하고 어렵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적 성공과 행복한 결혼생활이라는 쉽지 않은 두 물고기를 잡은 도리스 되리 감독은 스스로를 일컬어 “굳건한 사랑의 신봉자”라며 경쾌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내 영화는 여성만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그건 세상의 절반만을 얘기하는 게 된다. 내 관심사는 세계 전체, 특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관계에 대한 갈망이며, 그건 대개 사랑이다.” 요즘 LA라는 공간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으며("LA는 그냥 대도시가 아닌, 뭔가 다른 무엇이다.”), 60대 아버지와 자식 간의 소통 부재 상황에 대한 영화를 준비 중이라는 도리스 되리 감독은 그치지 않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감성과 이성 양쪽을 만족시키는 새로운 작품들을 계속 만들어갈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춤출 준비가 돼 있다.

 

<기사출처 :  필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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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6-30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einer liebt mich, 파니 핑크를 보고는 독일어 공부를 했어요. 독일에서는 이 감독, 책도 여러권 (서너권?) 쓰고 작가로도 활동중인데 한국에는 어째 나 이뻐? 밖에 나오지 않은 것 같아서(그것 말고도 단편 모음집이 하나 더 있습니다만 조기절판되는 바람에..) 아쉬워요.

플레져 2006-06-30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의 열정이 부럽네요. 세익스피어때문에 (번역이 중구난방이라) 영어 공부에 잠시 몰두한 적이 있는데, 정말 아주 잠깐이어서 명함도 못내밀겠습니다 ㅎㅎ 동화 몇 권이 더 있을뿐 그 재밌는 소설은 정말 나 이뻐? 한 권 뿐이네요. 조기절판이라니 더 아쉬워요...

로드무비 2006-07-0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리스 되리의 책 <나 이뻐> 말고 한 권 있는데.
제목이 뭐였더라?
아아, 멋지고 당당한 모습이네요.
여전히 사랑의 신봉자라니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플레져 2006-07-0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숏 컷트에 레몬색 머리 넘 섹시하지요? ^^
그 책이 쥬드님이 말하는 책과 같은 책인 것 같아요.
저도... 사랑의 신봉자에요. =3

2006-07-19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