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의 시집에 실린 "혼쥐 이야기"
할머니는 사람의 콧구멍 속에 쥐 두 마리가 살고 있다고 했다.
세상모르고 골아떨어진 동생의 얼굴에 연필 수염을 그려놓고 키득대고 있노라면,
에그 망할 놈, 나갔던 혼쥐가 딴 구멍으로 들어가겠구나 혼쭐을 내시곤
가만가만 아기가 깨지않게 수염을 지워주곤 하였다.
(중략)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났다.
오정희의 "새" 도입이었다.
잠자는 우일이의 얼굴에, 빨간색과 파란색의 크레파스로 울긋불긋 그림을 그렸을 때
외할머니는 질겁을 하고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 망할 년, 잠든 사람의 얼굴에 그림을 그리면 잠든 사이
나들이 나갔던 혼이 제 몸을 찾아 돌아오지 못해 떠돌아다닌다는 걸 모르니?
엄마도 그랬나? 떠도는 혼을 찾아 나갔나?
꿈은, 몸 밖으로 나간 혼이 헤매는 길, 세상이라고 외할머니는 말했었다.
손택수와 오정희의 글에 혼쥐가 인용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여기 옮길 생각은 없었다.
책정리를 하다가 오랜만에 펼친 은희경의 책, 아무 페이지에서 혼쥐를 만났다.
은희경의 "멍" 에도 인용되 있는 혼쥐.
어린 시절 잠든 동생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넣었다가 몹시 야단맞은 일이 있다.
잠든 사이에 얼굴이 달라지면 살짝 빠져나갔던 혼령이 제 몸을 못 알아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이렇게 오래 내 곁을 떠나 있을 리는 없다. 그는 돌아왔다.
남의 옷이 입혀진 탓에 자신의 몸을 찾지 못하는 것뿐이다.
나는 그의 몸에서 병원의 로고가 어지럽게 박힌 환자복을 벗기기 시작한다.
내 손은 부들부들 떨린다.
혼쥐란, 사람에겐 혼이 있는데 그것이 잠을 잘 때 콧구멍을 통해 들락날락 하는 것을 일컫는다.
꿈을 꾸면서 체험하는 것들은 혼쥐가 돌아다니면서 보고 온 것이 많다고 한다.
가령, 또하나의 내가 잠들어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 혼쥐가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작가들이 소재로 다룬 혼쥐, 그 소설과 시에 맞게 인용한 것만으로도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