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대한민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살인병기가 되어버렸다. 이유를 묻는다는 건 고귀한 질문. 그저 따라야만 하는 미친 상황에서 그들이 찾은 해법은 나의 동료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는 것. 살아서 만나게 된다면, 그순간을 진정 맞이할 수 있다면 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상대를 향해 공격하리라.  

자존심을 세워야 할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누군가의 생명을 빌미로 자존심 싸움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해야만 했던 그 시절,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지도에 선 긋기를 하며 머리를 쓰진 말았어야 했지만 상황은 그렇게 되어버렸다.

영화의 젊은 군인들 과거 이력은 아주 조금 짐작할 수 있다. 수혁(고수) 은 어눌하고 순진한 이등병이었다. 다른 이들 역시 그와 비슷할 것이다. 이제 막 세상을 알아야 할 나이었고 자기의 삶을 꾸려가야 하는 출발선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무엇을 했는지는 전장에선 중요하지가 않다. 그들은 처참할 정도로 살인 병기가 되어 움직여야만 했는데 그들 중 전쟁이 원하는 인물이 되버린 사람은 수혁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과 동료들을 위해 싸운다. 거기엔 상하 명령이 중요하지 않다. 수혁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안다. 지도를 펴놓고 이쪽은 우리 땅, 저쪽은 니네 땅 하며 자존심 싸움을 벌일 때,  전쟁을 하는 이유에 대해 수혁이 찾은 해답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에서는 좀 더 새로운 전술이 도입되었다. 전투기 폭격으로 먼저 초토화시킨 다음 진군하는 작전이다.  185쪽.  

그러나 전쟁은 1951년 봄에 끝났어야 했다. 아니면 늦어도 정전협상이 시작되는 시점에서는 끝났어야 했다. 또는 1951년말, 한 달간 임시 휴전이 성립되었을 때 끝날 수도 있었다. 유엔군과 공산군 모두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기 위해 무려 159회의 회담이 열렸다. 그동안 쌓인 정전회담 관련문서만 해도 어른 키를 훌쩍 넘는다. 회담 기간 내내 양측은 누가 정전회담 기간중의 약속을 위반했는가를 놓고 줄곧 싸웠다. 276쪽.  


회담장에서 서로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싸움이 오가는 동안, 남 북한군과 유엔군, 그리고 중국군의 젊은이들은 38선 주변의 고지 위에서 수없이 다치고 죽었다.  277쪽.

 

오래전 어떤 인연으로 외국인 친구와 잠깐 교우한 적이 있다. 그녀는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었으면서 문득, 우리나라의 작가들이 분단국가에 사는 만큼 그 이야기를, 전쟁 이후의 삶, 전쟁 중의 삶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겪지 않았으므로 잘 모르겠다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부끄럽게도 그건 내 부모 세대가 겪은 일들이고 나는 관심 밖의 일이라는 생각만, 혹은 아무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저 웃고 말았다. 한참후에 그것 아니어도 지금은 너무 견디기 힘들다는 변명을 찾아내곤 흐뭇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나의 부모는 한국전쟁 당시 어린이였다. 엄마는 가끔 한강 다리를 건너고 난 후 다리가 폭격되어 뒤를 돌아볼 수조차 없었노라며 회상했다. 하도 많이 들은 이야기여서 이골이 나기도 하는데 엄마는 티브이에서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만 보아도 그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내가 알지는 못하였지만 알아야 할 이야기들과 조우한다. 방관 이나 외면 모드로 일삼기엔 가슴 한 켠이 쓰린 이야기.  

 

올해 3월에 터키에 갔었다. 앙카라 한국 공원에 들렀다. 국사 교과서에서 앙카라 한국 공원을 본 기억이 났다. 그저 부모 세대만의 일이라고 했던 어린 마음이 부끄러워 나는 입을 뗄 수 없었다. 나는 무관심하게 존재해도 내가 속한 땅의 역사와 흔적은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공원을 지키는 아저씨는 한국전쟁에서 희생한 군인의 아들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중년의 사내였다. 하지만 아들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 터키 참전 용사들의 이름과 나이를 훑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스물 한 살, 스물 세 살, 스물 두 살... 그 나이땐 몰랐다. 지나고보니 그 나이가 얼마나 어리고 어린 나이인지 이제는 안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가 몹시 얄팍했지만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젊은이로 살아가는 건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게 주어진 현실, 내가 처한 사회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서 나는 움츠러들었고 쥐죽은듯 지냈다. 그러다 문득 내가 할 일을 찾고 그쪽을 향해 뛰어가다보니 어느 정도 움츠린 어깨를 펼 수 있었다. 전쟁의 참상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왜 그들이 젊은이들을 그곳으로 보냈고, 젊은이들은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좀 더 가슴이 넉넉해질지도, 시야가 뚜렷해질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알고 지나가야 하는 시절, 살아있는 자의 의무겠지만 그어느때보다 더 젊은 날은 그렇다. 그 시절의 젊은이도 지금의 젊은이도 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면, 어떤 것도 흘려보낼 수 없는 시절이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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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1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1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8-0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모르는 전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이산가족으로 80세가 다 된 친정아빠의 전쟁통 이야기를 가끔 떠올리는 정도에요. 터키의 젊은이들은 그렇군요.
아빠의 이야기는 대하소설감인데 그걸 그냥 묻혀야하는 (능력이 안 되니) 저는 별로 좋은
딸이 아닌 거 같아요.ㅠ
플레져님 그곳에도 비가 많이 왔나요? 여긴 이제 좀 멈췄어요.

플레져 2011-08-01 22:40   좋아요 0 | URL
서두르지 마시고 아버님의 말씀을 정리해두면 어떨까요?
지인 중에도 아버님의 전쟁이야기를 간직한 분이 있는데
그분도 늘 고민하시더라구요. 그냥 흘리기엔 너무 아깝고 귀하다고.

오늘도 비가 내렸어요. 스콜처럼 화르르 쏟아졌다가 햇빛이 쨍 났어요.
지난주부터 계속 그렇답니다. 지독한 비가 내리는 요즘이에요.

2011-08-01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1-08-0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자로 보아도 이렇게 짠한데 터키에서 마주친 그 젊은이들과 더 젊었을 그들의 흔적을 보는 순간 플레져님은 얼마나 울컥했을까요...

플레져 2011-08-01 22:42   좋아요 0 | URL
활자로만 보았던 전쟁 이후의 느낌을 손으로 만진 것만 같았어요. 아무런 느낌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아저씨를 뵙는 순간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너무 내 생각만 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