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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페이퍼를 쓴 지 어언 반 년이 흘렀다. 9월, 나는 대전에 내려왔다. 그동안 서울에서 지낸 날이 더 많았다. 시댁에서 지내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도무지 나는 이 한적하고 조용한 이 곳 어디에도 내 자리 한 곳을 마련하지 못했다. 도서관에 다니면서 차츰차츰 내 발자국을 찍었고 내가 살아가게 될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이사한 지 열흘이 채 되지 않았다. 아파트는 입주 기간이라 붐비고 낮에는 공사 소음도 심하다. 오늘 아침에도 드릴 소리에 잠을 깼다. 그래도 얼추 이사 마무리가 되어가고 내가 살 집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내가 사는 층에도 네 집 중에 세 집이 들어왔다. 살아보니 대전은, 주거 환경으로는 그만이다. 넓고 쾌적하고 청정하다. 구의 슬로건처럼 청정하다.
콘솔과 액자가 있는 곳이 현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맞닥뜨리는 곳. 왼쪽으로 방 두 개와 공동욕실이 있고 오른쪽으로 방 두 개, 주방, 거실...등이 있다. 공간이 독립적이라는 점, 기다란 복도가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복도는 일명 앤틱스트리트, 라고 이름지었는데 마감재나 여러가지 기본 인테리어 컨셉이 앤틱스타일. 남편의 고집으로 가구와 가전은 아주 모던한 것들로 마련하는 바람에 이 공간만이라도 내 의지대로 꾸몄다. 마치 오래된 유럽의 거리를 걷는 것처럼 양면 시계도 걸어두었고 작은 콘솔과 그림도 그런 분위기로 걸어놓았다. 콘솔 옆에는 숯이 든 단지.
블라인드만 하면 얼추 집 꾸미기는 마무리 될 것 같다. 안방엔 침대 하나 달랑 있을 뿐이고, 서재도 이제 막 책정리를 했을 뿐이다. (책정리 하다 몸살났다...) 정남향집이라 낮에는 햇살 포식이다. 남편의 숙원이었던 와인셀러를 장만하고, 그동안 모아둔 와인잔도 장식장에 넣어두었다. 아. 이게 정말 내 집이구나 싶은것이,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벅차다. (와인셀러 옆엔 공기청정기 ^^;;) 유리도마는 이쁘긴한데 실용성은 떨어진단다. 하여, 장식용으로 놔 둘 생각. 친구가 만들어 준 예쁜 리스는 작은방에 달려있고, 역시 작은방 벽에도 선물받은 이스라엘 산 거울. 전화는 아직 연결할 계획이 없어 장식용으로 두었다.
거실만 확장 공사를 했다. 안방과 작은방에 딸린 베란다에는 옛마루를 깔았는데 여기가 명당이다. 여름엔 무지 덥겠지만 봄엔 따뜻한 햇살 받으며 독서하기 딱이다. 안방 입구에 걸린 리스와 십자수 웨딩 액자. 서울에 살 때부터 걸어두었던 것인데 여기에 오니 더 달라 보인다 ^^ 특히 저 웨딩 액자는 큰언니가 내 결혼을 앞두고 삼개월간 수놓은 작품이다. 그땐 몰랐다. 저 작품이 얼마나 눈물겨운 흔적인지. 그러고보니 결혼할 때 세심하게 준비해준 언니한테 너무 못하고 살았다.
남편이 고른 소파와 식탁. 식탁은 강화 유리인데 역시나 모던한 분위기에는 그만이다. 먼지가 잘 타는 게 흠이지만... 좀 더 꾸미고난 후에 공개하고 싶은 서재. 아늑한 분위기가 참 좋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떠나온 것이 서럽고 불행했던 지난 가을. 누가 떠민 것도 아니고 자처해서 내려온 주제에 참 불평불만이 많았다.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봄' 이 온다는 말을 실감했다. 정말이지 나는 3월이, 봄이 올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집없는 천사처럼 지내는 게 괴롭고 슬퍼 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서울이 그리워 도망치듯 새벽에 KTX를 타고 올라간 적도 있다. 서울역에 내리면 찬공기가 얼굴을 스치는데도 마냥 좋았다. 아. 이 공기. 이 매캐한 공기가 그렇게 그리웠더란 말이지...하며 버스를 타고 쌩. 건재했던 숭례문을 보며 서울역으로 향할땐 마음이 착잡해 버스에서 울곤 했었다. 그런 날들이 사무친다.
물 한방울이라도 튀기면 낼롬 닦고, 먼지가 보인 곳은 참지 못하는 요즘의 날들. 아. 정말 이런 날이 오긴 오는 구나. 긴 터널을 지나 봄을 맞이하러 나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