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리기를 못한다. 백미터 달리기 최고 기록이 16초. 아마 초시계를 재던 선생님이 2초쯤 느지막이 작동버튼을 눌렀거나 내가 2초쯤 빨리 튀어나갔을 게 분명하다. 내 기록은 아니지만 공식적인 나의 최고기록은 14초. 나와 함께 달렸던 아이의 기록이다. 내 기록인 19초는 그애의 기록에 남아있다. 기록하던 선생님의 실수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후로 나의 달리기는 20초 그 언저리였다. 다른 사람의 실수덕에 그나마 최고 기록이랍시고 쓸 수 있다니, 인생은 정말 아이러니다.
신호등이 제아무리 파란색으로 바뀌어있다해도 나는 결코 뛰지 않는다. 몇 분후면 나는 그 길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몇분을 기다리면서 사람 구경, 자동차 구경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요즘 유행 패션을 꿰기도 하고 자주 오는 버스의 번호를 익히기도 한다. 달리기를 안해도 되는 공간은 횡단보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서만큼은 달리기를 즐긴다. 언젠가 멀찌감치 걷고 있던 나는 파란 불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신호등을 보자 저 멀리서 걷고 있던 미술도구를 든 소녀들이 뛰기 시작했고 휴대폰 통화를 하던 아저씨도 뛰었다. 심지어 꼬부랑 할머니는 번쩍 허리를 펴고 달리기 시작해서 세상에 이런일이, 에 나올 법한 광경을 연출했다.
2006년의 골인 지점, 12월이다. 어느덧 중순이 무르익고 있다.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달력이란 기록은 긴 인생의 유턴지점인지도 모른다. 잘 달려온 사람에게는 스스로에게 다독일 기회를, 기록이 저조한 사람에게는 다시 뛰어보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는 유턴지점. 한 해를 돌아보면서 서재와 내 사적인 온라인 공간들을 뒤적였다. 비공개로 일기만 쓰고 나오는 이글루에서 나는 혼자 앓던 날들을 떠올리며 그 시절의 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좀 더 열심히 뛰지 못했다. 욕심에 내 발걸음은 진창인 줄 모르고 헤맸다. 들떠있던 탓에 오만방자했다. 잘한 일도 더러 있을테지만 어쩐지 그것들조차 안쓰러워보인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처럼 느긋했던 적이 없었던 것이 매우 안타까울 뿐.
2007년에 거는 기대가 크거나 많지 않다.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내 일을 묵묵히 해나갈 것이며 경솔과 속단을 경계하며 살자는 바람 밖에는 없다. 산타할아버지 오시는 날보다 더 두둑하게 양말을 채웠던 새해 소망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 나이에 책임지며 살고 싶은 것 같다. 다시 달리기 위해 준비운동이나 좀 해둬야겠다.

달리기든 다이빙이든 준비운동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