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자키 리츠코 (Ritsuko Okazaki) - for RITZ
오카자키 리츠코 (Ritsuko Okazaki) 노래 / 이엠아이(EMI)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오카자키 리츠코. 그를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에 대해 소개해야만 할까. 그저 유명한 일본 만화 몇 편의 주제가를 부른 일본 가수? 그 정도로라도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게 다행일 정도로 그는 한국에서 무명의 존재였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와 그의 음악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의 음반이 (유작이라는 선정적인 홍보효과에 힘입어) 한국에 정식으로 발매된 것을 과연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도 가늠할 수 없는 착잡함을 애써 달래며 그의 마지막 음반을 들었다.

오카자키 리츠코의 사망소식을 들은 후 한동안 우울증에 가까운 증세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다. 틈만 나면 밤에 방의 불을 끄고 그의 음악을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누군가 봤다면 청승을 떤다고 면박을 주었을지도 모를 시간이 한 달이나 넘게 이어졌다.

그의 음악은 누구보다도 밝고 따스했으며 목소리는 감미롭고 속삭이듯 부드러웠기에, 언제나 삶의 희망을, 사랑의 기쁨을, 작지만 소중한 용기를, 함께 있음의 감사함을 노래하던 그가 병마에 시달리며 고통과 공포 속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4년 5월 26일, 그의 사망소식이 알려진 직후 나온, 그의 자작곡이 실린 앨범 'RAINBOW(게임 '심포닉 레인'의 보컬 앨범으로 게임의 캐릭터를 맡은 성우들이 불렀으며 이 곡들을 오카자키 리츠코가 직접 부른 것이 'for RITZ'이다)'가 나왔다는 걸 알고 천신만고 끝에 듣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의 음악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멜로디, 그 분위기는 오카자키 리츠코의 것 그대로였다. 가사는 슬프지만, 어디까지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정에 의해 그렇게 느껴질 뿐이었다. 슬픔을 말해도 희망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는 그의 가사에서 절망은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비'의 이미지처럼,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언젠가 밝은 햇살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그의 가사와 멜로디는 변함없었다.

마침내 그 곡들을 리츠코 자신이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그 안에 담긴 가사는 절절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어떤 부분은 마치 자신의 앞날(죽음)을 예견한 듯, 자신의 죽음 앞에 슬퍼할 사람을 위해 남겨둔 유언인 것과도 같이, 앞으로 자신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할 사람에게 바치는 리츠코의 메시지처럼 받아들여졌다.

처음 앨범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리츠코 본인이 부른 그 유언과도 같은 절절한 노래를 들으며 펑펑 울줄 알았는데, 막상 음악을 들으면서 그렇게 슬프진 않았다. 눈가는 자신도 모르게 젖어들어갔지만, 그의 속삭임과도 같은 노래를 들으며 나는 따뜻한 미소로 그를 보내줘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자신의 노래를 듣는 사람에게 원하는 것, 희망이 가득한 미래를 그에게 보여주고 싶어졌다. 이 음반은, 여기에 담긴 노래는 그와 그의 음악을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한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가장 멋진 리츠코의 답장이었다. 순진할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절망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메시지, 살아가라는.

수록곡을 'RAINBOW' 앨범과 비교하며 살펴보았다.

01. 空の向こうに (하늘 저편에)
게임 '심포닉 레인'의 테마곡. 'RAINBOW'수록곡과 완전히 같다. 정식 녹음된 곡이라서 리츠코의 보컬도 녹음상태도 좋다. 카사하라 히로코의 가창력은 좋지만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의 크리스털 보이스보다는 떨림이 느껴지는 리츠코의 목소리가 더 마음에 든다.

02. I'm always close to you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추가되어 더욱 깊은 맛이 느껴진다. 녹음상태도 우수. 가사가 가장 마음에 드는 곡으로 실질적으로 오카자키 리츠코의 유언과도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03. 秘密 (비밀)
후반부에 오르간 연주가 추가된 것 외에는 거의 같다. 녹음상태가 안 좋은지 보컬에 이펙트(기술적 용어는 잘 모르지만 reverb인가)를 많이 넣은 것 같다.

04. いつでも微笑を (언제나 환한 미소를)
'RAINBOW'버전에서 초반에 들어간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삭제되고 편곡 자체도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목이 잠겼는지, 아니면 가녹음이라서 무성의하게 부른 것인지 노래는 좀 아쉬운 퀄리티다. 대신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 속삭이는 듯한 정겨운 느낌이 든다.

05. 雨のmusique (비 내리는 musique)
편곡이 완전히 바뀌었다. 평범한 보사노바였던 곡이 귀재 토리야마 유지의 편곡으로 세련되게 바뀌었다(직접 비교해서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듯). 가녹음이지만 녹음 상태도 좋고 리츠코의 노래도 만족스럽다. 중간의 전화기 느낌을 주는 필터(역시 용어는 모름)를 적용한 부분은 놓치지 말 것.

06. メロディ- (멜로디)
같은 MR을 쓴 것 같다. 곡 자체는 변한 게 없다. 녹음상태는 중간 정도?

07. リセエンヌ (lyce enne)
역시 'RAINBOW'와 곡은 같고 녹음상태도 좋다. 개인적으로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들을 때마다 도입부부터 눈물을 짓게 만들어준다. 초반의 가사처럼 정말 존재감이 없는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이 가사가 오카자키 리츠코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멋대로 상상해보곤 한다. 죽음을 맞이한 이가 말하는 '지금 살아있으니 어떤 내일이 오더라도 두렵지 않다'는 목소리는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그가 남긴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에 대한 믿음은 앞으로 긴 시간 나를 지탱해줄 것 같다.

08. Hello!
오케스트라가 추가되어 음이 풍부해졌다. 역시 이 음반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의 하나로 마치 뮤지컬의 한 부분인 듯한 가사와 멜로디도 마음데 들고 오리카사 후미코도 꽤 잘 소화해내어 마음에 들지만 역시 리츠코 본인의 목소리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이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처럼 고통을 녹이고 행복을 찾아내는 노래의 힘은 리츠코 자신의 음악에 대한 지향점을 시사하는 것 같아 흐뭇한 마음이 든다.

09. fay
편곡은 같으며 마지막에 코러스가 추가되었다. 남아 있는 이들에게 바치는 밝은 메시지.

10. 淚がほおを流れても (눈물이 흘러내려도)
역시 편곡은 같으며 정식녹음이라 녹음상태도 노래도 만족스럽다. 끝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작지만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담았다.

11. For フル-ツバスケット (For 후르츠 바스켓)
그의 이름을 알린 가장 큰 계기가 된 곡이지만 싱글에 수록되었던 원곡을 그대로 실은 것은 이 앨범에 대한 거의 유일한 불만사항이다. 비록 생전에 리츠코 자신이 이 곡을 새 앨범에 싣고 싶다고 말했다고 하지만, 편곡을 다르게 하든가 라이브 버전을 싣든가 했으면 좋았다는 아쉬움이 든다. 아니면 싱글로만 발표된 'Morning Grace'와 '나의 사랑은 조그맣지만'도 싣든가. 솔직히 냉정하게 말하자면 'For 프룻츠 바스켓'은 아름다운 가사를 제외하면 단순한 편곡과 평이한 멜로디일 뿐, 리츠코의 디스코그래피 전체를 통털어도 수위에 손꼽히는 미려한 멜로디와 화려한 편곡이 돋보이는 'Morning Grace'쪽이 노래로는 한 수 위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글을 다 적고 난 후 느껴는 푸념 같은 잡상이지만, 억울할 정도로 안타까운 감정을 느껴야 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노래를 남긴 분의 음악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앨범을 홍보해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이런 상업적이고 노골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주목을 받을 수 없다는 처절한 현실을 변명으로 삼기엔 자칫 고인께 누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 죄의식을 조금이라도 떨쳐내고자, 그리고 팬도 아닌데 유작 앨범을 사야 하냐며 망설이고 있는 사람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앨범은 고인의 유작이라는 이유만으로 판매를 강요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훌륭한 음반이라는 점이다. 그저 우리나라의 두 가지 현실-즉 게임/만화 관련 음악에 대한 무지와 평가절하, 그리고 디지털 복제 및 배포에 있어서는 천국과도 같은 환경-때문에 어떤 수로라도 이 음반을 알리고 판매를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인이 부른 혹은 일본어로 된 노래는 죽어도 못듣겠다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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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 2005-09-30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리츠코씨 노래를 좋아하는 제가 처음으로 음반을구입해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