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높디 높은 구름 위에서 본다면 그림자 아래 웅크리고 앉은 아이들은 모두 뻘밭 위에 놓인 돌멩이처럼 보이겠지. 땅이고 바위고 모두 하나가 되어 누가 누군지도 알 수 없게 될 거야. 그저 검은 땅과 잿빛 바다만이 보이겠지. 이토록 작은 땅덩어리 위에, 벌레를 캐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 보잘것 없이 느껴졌다. 문득 하늘과 땅이 뒤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막힘 없이 드넓은 하늘지붕 위를 마음껏 달려봤으면. 하지만 아이의 몸은 너무 무겁고 등에 얹혀진 혹의 무게는 감당하기에 벅차다. 잠깐이나마 꿈결처럼 떠올랐던 마음이 억센 손에 이끌려 내려오듯 가라앉았다.
(제1장 중에서)
아버지. 속으로 외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목이 막혀서 목소리는 나오지도 않았고 들어줄 사람도 더는 없다. 아버지는 죽었어. 죽는 게 뭐야? 영원히 답을 들을 수 없을 허무한 자문.
(제1장 중에서)
소녀는 돌무덤을 돌아보며 그곳에 누운 이가 자신에게 전해준 삶의 기억과 그 절망과 슬픔, 그리고 아이들에게 남긴 희망의 편린을 되새겼다. 인간의 삶은 너무나 짧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과 인생을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영원히 이어지려는 소망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자식이 그의 뒤를 잇기 위해서만이 태어나고 존재하는 건 아닐 텐데. 소녀는 누구에게도 이어지지 않을 이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했다. 잿빛 하늘과 땅, 검푸른 바다와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채 영원히 세상과 유리된 이 작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살아갈 아이들의.
(제1장 중에서)
"기억하렴, 작은 아이야. 모든 이들은 저마다 바라는 욕망이 있단다. 그걸 이룰 수만 있다면, 당장 내 욕심을 채울 수만 있다면, 진실 같은 건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는 게야. 그게 자기 몸과 마음을 망치리란 걸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모르는 척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결국 인간은 욕망과 함께 사라지고 말지. 욕망도 먼지처럼 부질없는 것을……. 인간의 짧은 삶은 그걸 이겨내기에는 너무나 보잘 것 없단다."
(제1장 중에서)
"내가 하는 일은 마법이 아니란다. 마법은 자신의 의지로 자연의 힘을 이용하고 부리는 짓이란다. 그런 일들은 반드시 마음의 고통과 영혼의 소진을 초래하게 된단다. 자연 역시 마법에 의해 늘 상처받고 지쳐가지. 대신 나는 저 크고 위대한 자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말을 건단다. 진실된 목소리에 그들은 반드시 응답을 해주기 마련이니까."
(제1장 중에서)
옛날, 혹은 어린시절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무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 걸 보면서도 소녀의 몸은 여전히 소녀인 채로 있었고, 수없이 많은 기억들이 서로 겹쳐져서 언제 일어난 일인지, 무엇이 먼저이고 나중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뿔이 난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했다. 고대의 전설에 나오는 인간을 지배했고 지금은 멸종된 선민(先民)의 후예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소녀의 긴 삶과 자라지 않은 육체가 마법의 힘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저주라고도 했다. 사람들 틈에 섞여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려고 했던 소녀의 의지는 그렇게 번번히 꺾였고, 그들은 소녀의 뿔을 보며 두려움과 혐오감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은…… 지금은 이렇게 인간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외로움이 외로움인지도 모를 정도로 긴 시간을 혼자 보내고 있었건만.
(제1장 중에서)
별을 본 적이 없냐고 물으려다가 소녀는 말을 멈추었다. 하늘지붕 아래에서 자란 아이는 별을 보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 하늘지붕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막고 있으니까. 아이는 분명 이제까지 하늘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으리라.
(제1장 중에서)
소녀의 몸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거칠고 메마른 존재인 이마의 뿔은 황량한 바위산을 연상시켰다. 뿔은 풀 한 포기 없이 긴 세월에 조금씩 풍화되는 바위산의 빛깔과 모습을 닮았다. 이마 한 가운데에서 솟아나 약간 위를 향해 굽어진 가느다란 뿔. 소녀의 몸에서 굵고 투박한 건 하나도 없이 오직 섬세하고 가느다란 아름다움만이 가득했다. 반면 아이는 시커멓고 상처 투성이에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등에 있는 커다란 혹이 몸을 짓눌러, 날개가 떨어진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흉측한 자신의 육체를.
(제1장 중에서)
하늘우물의 꿈을 꿨다.
아이는 환하게 열리며 자신을 맞아주는 하늘우물을 보았다. 거기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 있고, 따스하게 지켜주는 마법사님이 있고, 나비의 날갯짓이 있고, 형형색색의 꽃이 있고, 영롱하게 빛나는 별이 있었다. 저 모든 걸 내 손에 잡을 수 있다면, 내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아이의 마음은 간절했으나 그 모두가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하늘우물은 점점 멀어지고, 소리쳐도 들리지 않을 저 멀리로 사라져갔다.
(제2장 중에서)
그는 그저 시커멓고 둥글둥글했다. 짧은 팔다리가 불쑥 튀어나와 있고, 딱히 머리라고 할 부분을 찾기 힘들었다. 대신 몸에 커다란 눈구멍 두 개와 입이 뻥 뚫려서 험악한 인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가 위협하듯 두 개의 짧은 팔을 번쩍 치켜들며 포효했다.
"워~!"
수많은 조그만 목소리가 마치 합창을 하듯 같은 소리로 외쳤다. 아이에게는 무섭다기보다 놀랍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이는 이제 일어나 앉아서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한 생기띤 얼굴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상대방의 반응이 기대한 바와 다르자 그는 조금 당황했는지 좀 주저하다가 다시 팔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우워~!"
(제2장 중에서)
하늘과 산과 들과 강과 바다와 땅 속과 바다 밑이 온전히 구별되지 않던 혼란스럽던 세상에, 뿔이 난 이들이 나타나 평화와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세상의 모습을 빚어 낼 큰 짐승을 만들었고, 세상을 지키기 위해 용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늘 아래 땅을 다스릴 인간을 만들었고, 하늘과 땅을 이어줄 날개 달린 인간을 만들었다. 그 후 세상은 오래도록 번영했으나 뿔이 난 사람들, 세상을 다스리는 선민들의 낙토, 코뉴코피아라 불리던 세상 위의 세상, 그 하늘지붕이 무너져 하늘과 땅이 동시에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그들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지금 하늘지붕의 반은 바다에 떨어져 사라졌고 반은 얼어붙어 생명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선민이 사라진 세상은 여전히 평화로웠으나 대신 풍요로움을 잃어갔다. 땅 속에선 세월의 흐름에서 낙오된 생명들이 모여 세상의 정화를 위해 버려진 오물 속에서 증오의 탑을 쌓고 있었다. 언젠가 그 끝이 땅 위로 솟아오르게 될 날, 세상은 두 번째의 위기를 맞을런지 모른다.
(제2장 중에서)
천천히 눈을 감고 스스로의 존재를 잊는다. 대신 거기에 존재하는 건 거대한 자연 그 자체. 나는 없고 모든 것이 나다. 내가 공기요 공기가 나이고 내가 숲이며 숲이 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내가 하지 못하는 건 없다. 나를 잃어버리는 대신, 나는 모든 것을 얻는다.
(제2장 중에서)
빗소리가 그치고 갑자기 찾아온 침묵이 어색했는지 소녀가 눈을 뜨고 일어났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웠고 주위는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고요했다. 호수는 비로 인해 더 풍성하게 불어난 채로 달과 별의 빛을 머금고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옆에는 늘 그렇듯 등을 하늘로 두고 엎드린 자세로 누운 아이가 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게 내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주 잠시동안 세상의 고요와 평화를 만끽한 후 소녀는 도로 누워 잠을 청했다. 꿈 속에선 여전히 비가 내렸고, 작은 두 생명이 그 속을 뛰어다니며 내는 웃음소리, 웃음소리만이…….
(제2장 중에서)
“울지 마세요, 마법사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울지 마세요.”
아이는 소녀의 가슴에 팔을 두르고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 따스한 체온에 소녀의 북받친 감정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아이야. 사랑하는 아르케야. 네가 나를 다 달래주는구나.”
“뭘요, 그동안 툭하면 우는 저를 달래주셨잖아요.”
아이는 소녀의 손길이 기분 좋았는지 배시시 웃었다. 세계의 멸망이니 위기니, 그런 건 아이에게 있어서 이해할 수도 없는 말들이었다. 그저 그의 앞에는 슬퍼서 울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의 슬픔을 덜어주고 싶을 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을 뿐이었다. 소녀에게는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했다. 가슴의 뿔이 조금씩 무디어지는 걸 느꼈다.
(제2장 중에서)
“세상의 지휘자, 만물의 관리자, 용들의 주인, 하늘지붕의 소유자, 세계의 정점에 선 자, 하나의 뿔이 난 이들의 후예여. 내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가 바로 너인 셈이도다. 나는 어릴 적에 겪은 참사의 탓인지 육신의 고통이 가라앉은 날이 없었고 알 하나도 낳지 못했구나. 당시에 살아남은 용들은 모두 그랬다. 대부분 알을 하나 정도 낳거나 아예 낳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지. 지금 살아 있는 용들은 그 후에 태어난 운이 좋은 아이들이고, 전승받은 기억을 실감하지 못하니 그저 전설이려니 생각하며 하루하루 새우떼나 집어삼키며 살고 있도다.”
(제2장 중에서)
“그래. 그걸 추억이라고 부른단다. 언젠가 내 얼굴도 이름도 희미해지고 내 모든 걸 잊어버리는 날이 오더라도, 행복한 추억만은 사라지지 않는단다. 누군가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이 존재했음을 잊지 않는 한 말이다.”
“그건 싫어요. 마법사님을 잊다니, 말도 안 돼요. 전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래, 소녀는 가만히 중얼거리며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제 곧 멀지 않아 맞이할 이별을 생각했다. 이제 헤어지면 아마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지. 긴 세월 속에서 배운 무심함이 소녀의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수없이 되풀이해도 이별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일이었다.
(제2장 중에서)
눈물 맺힌 눈으로 올려다본 하늘은 그날따라 푸르고 새하얀 구름이 군데군데 아름다운 무늬를 흩뿌렸다. 저 하늘 위를 내 손아귀에 넣은 듯 자유로이 날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낙원이 무너지며 온 세상이 불타고 자신의 인생도 재앙에 휘말려 들어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빠른 포기가 아니었을까. 자신은 너무 성급하게 체념하고 운명이란 이름의 무력함에 몸을 맡긴 게 아니었던지. 회환이 꼬리와 발을 적시고 있는 파도처럼 살며시 그러나 깊숙하게 밀려왔다.
(제2장 중에서)
자신의 나라와 백성이 끔찍한 참사와 함께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왕은 꿋꿋하게 오직 목적지만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이었다. 네크로사이드는 문득 뒤를 돌아보며 사라진 지저인의 왕국을 위한 짧은 작별인사를 마음 속으로나마 건네었다.
‘잘 가거라, 구시대의 낙오자들아. 우리는 새로운 낙원을 열기 위해 갈 것이다.’
(제2장 중에서)
“그대가 알지도 모를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유각인들에겐 죄와 죽음이 없었지. 그들은 모든 마음을 열어서 이어놓고 살았으니 범죄가 있을 리 없었고, 세상의 목숨을 만든 이들에게 죽음이 있을 리 없었지. 하지만 권태가 때로는 잉여물을 만들기도 하는 법. 영혼을 하나로 합치는 건 단일 개체가 되는 것이고 이는 곧 개개의 죽음을 뜻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이도 나왔지.”
(제3장 중에서)
눈이 하늘로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가 밤하늘의 별처럼, 별보다 더 빽빽하게 하늘을 채웠다. 원래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대지에 쌓이는 것일 텐데, 이곳의 눈은 자신이 쌓여 있던 땅을 떠나 하늘로 돌아가고 있었다. 물구나무를 서서 거꾸로 바라보는 듯한,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듯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하물며 눈이 내리는 걸 본 적도 없는 지저인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을까. 그들에게 있어 이는 곧 신의 권능이요 기적에 다름 아니었다.
(제3장 중에서)
“그들은 로맨티스트였을 거야. 단순히 겁쟁이였을지도 모르지만. 험난한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느니 극락의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편을 택했으니. 하지만 지금 저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돌연한 화산재에 파묻힌 마을이나 다름이 없이, 한 날 한 시에 시간이 흐름이 멈춘 듯 영원히 고정되어버린 저들의 삶은 미래로 이어지지 않고 과거에 멈춰진 존재들…….”
(제3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