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권좌(權座)에의 도전장


시계 바늘이 밤 10시를 가리키던 때, 학생들의 몸은 쌓인 피로로 인해 늘어지고 정신은 구겨 넣은 지식으로 눅눅해졌다. 기숙사의 방에서 빛이 하나둘씩 꺼질 때, 하늘에선 되레 별들이 경쟁하듯 붉을 밝혔다. 이 어둠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빛나고자 하는 모습은 소녀를 닮아 보였다.

닫힌 창문 너머로도 환한 달빛과 바다의 심장 박동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도시에선 볼 수 없는 별빛과 육지에선 느낄 수 없는 해류에 둘러싸인 영화궁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신비롭고 황홀한 광경을 만들어내었다.

이날 밤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사건이 벌어질 터였다. 장소는 카밀리아와 돌로리스의 방. 며칠 전 마트료나가 끌려갔던 곳이었다. 그 안에는 그때의 당사자들이 그대로 모여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 10시 정각이 되자 큐사인을 넣은 배우처럼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딱 맞추어 작지만 또렷한 노크 소리가 들렸고, 파자마 차림의 카밀리아가 걸어와 문을 열었다.

“웰 컴(well come), 미스 여.”

여왕님은 그의 인사에 눈짓으로만 간단히 답례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메이브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레이스 달린 캐미솔을 입고 어깨엔 파자마를 걸친 차림으로 침대에 다리를 꼰 자세로 걸터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마치 애완동물처럼 작지만 요염한 인상을 주는 돌로리스가 파자마 차림으로 바짝 붙어 있었다. 옆쪽으로 아르진과 리디아가 의자를 끌어와 놓고 앉아 있었는데, 카밀리아를 포함한 방 안의 2,3학년생은 사제 잠옷을, 1학년생 두 사람은 여양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지급받은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그때와 똑같았다. 옷차림이나 앉아 있는 모습에서, 방의 불을 끈 채 촛불을 책상이나 침대 위에 여러 개 놓고 밝혀서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있는 것까지. 탐미적이지만 퇴폐적이다, 라는 감상은 여전했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해서 굳어진 목을 풀기 위해 얕은 기침을 두 번 내뱉고, 여양은 말을 꺼내었으나, 메이브의 목소리가 그것을 덮었다.

“저기……”
“모처럼 온 손님이니까, 우선 마실 거라도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때?”

시큼한 냄새.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아르진이 플라스틱 병을 들고 있었다. 그 안에 든 탁한 액체가 무엇인지는 이미 마트료나로부터 들어서 익히 알고 있다. 여양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사양하죠. 전 아직 술을 안 마셔봤어요.”

카밀리아가 의외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한국 아이들은 수학여행을 가면 몰래 감춘 술을 마신다고 들었는데.”
“전부 그런 건 아니에요.”

조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일부의 말만 듣고 그 나라 전체를 판단하다니, 이래서 외국인들의 편견은 종종 한국인들을 엉뚱하고 불쾌한 사람들로 만든다니까. 하지만 여양은 불평만 할 입장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빨리빨리’가 입에 밴 외국의 관광 안내원, 관광 명소에 새겨진 한국어로 된 낙서 같은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한국인의 모습이 아니던가.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핑계만으로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었다. 결국 그런 것들이 자신의 모습마저 규정해버리고 마니까.

그렇다면 여기서부터는 내가 한국인의 명석한 부분을 보여줄 차례지, 여양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기운을 북돋았다.

“서로 얼굴 오래 보고 싶은 사이도 아니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어요.”

하지만 다섯 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홀로 서서 이야기를 해야 하다니, 더구나 촛불밖에 없는 어둠 속이고보니 마치 모놀로그(일인극)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긴장은 되어도 떨리지는 않았다. 문득 얼떨결에 나가서 상을 받은 콩쿨 때가 떠올랐다. 생전 경험도 없던 연기와 춤을 많은 청중들 앞에서 보여줘야 했건만, 어색해 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실수도 없었다.
그 덕분인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심사위원들에게 좋게 보였는지 어땠는지, 유명 연기 학원을 다니며 예고 입학을 준비하던 쟁쟁한 학생들을 모두 제치고 대상을 받은 이변을 일으킨 것은 자신을 지도했던 중학교 시절 음악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했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면 스스로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예과의 동급생들에 비해 서툴고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다고 느꼈다.

갑자기 못난 자신을 화려한 주위 친구들과 비교하자 괜히 마음만 우울해졌다. 잡념을 떨치고 생각해둔 말을 꺼냈다.

“사진 얘기부터 하죠. 금윤 선배를 협박할 때 사진을 갖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건 손선지 씨에게서 받아낸 거 맞죠?”

상대방은 여양과 같은 연기 특기생도 아니고,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허를 찔렸는데 감출만한 강심장도 아니었다. 그들의 당혹감과 놀라움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손선지라면, 경비 직원? 그 사람이 너에게 말했어?”
“아냐! 우리 LXG의 비밀 루트로 입수한 정보야!”

카밀리아와 돌로리스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여양은 카밀리아의 질문에 대답하고 돌로리스의 외침은 무시했다.

“여러분들이 원한대로, 그 분은 메이브와 만났다는 것밖에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사건 현장을 찍었던 디지털 카메라에 데이터가 남아 있다고 증언을 했으니까 그거면 충분하죠.”
“요즘 여러 군데 돌아다닌다고 들었는데, 많이 알아낸 모양이구나.”

종이컵에 자기들이 담근 밀주를 담아서 홀짝거리던 메이브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따지듯 달려드는 둘과는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어쩌면 벌써 여양이 찾아온 목적과 할 말을 짐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면을 꿰뚫어본다는 소문이 자자한 에메랄드 아이라면 가능한 생각이었다.

“덕분에요. 메이브 선배님, 당신의 눈에 담긴 힘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초능력? 최면술?”
“왓 더 퍽(what the fuck)? 이 년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카밀리아가 따귀라도 올려붙일 듯 험악한 얼굴로 소리치며 일어났다. 하지만 메이브가 손을 들어 저지하자 분을 삭이지 못해 투덜대면서도 도로 침대에 걸터 앉았다. LXG의 규율은 엄격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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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2010-08-0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만에 연재를 재개한 이유 : 원래는 요청글이 올라올 때까지 연재를 미룰 생각이었는데 그 와중에 연재를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며칠 전에 생각이 나서 충동적으로 재개한 것입니다. 편의상 1부로 부르는, 책 1권 분량은 이미 다 썼으니 끝까지 연재하고요, 2부 이후는 반응 보고 연재 여부를 정하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