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밥을 먹고 TV 앞에 모여서 쇼 프로그램을 본 후 방에 돌아오니 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TV를 더 보고 오겠다는 지란을 놔두고 마미와 함께 방으로 돌아오니 체링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에 등을 기대고 쭈그리고 앉아 작은 책을 읽고 있었는데 선물 상자 비슷한 게 세 개 그려진 약간 낡은 책이었다.
“체링아, 벌써 왔니?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얼마나 기다렸어?”
그들이 오는 줄도 몰랐던 듯 책에만 시선을 집중하던 체링은 여양이 말을 걸자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이 얼굴을 돌렸다. 늘 그렇듯 약간 졸린 듯한 부드러운 눈매와 옅은 미소는 여양에게 있어 인자한 할머니 같은 인상을 주었다.
“시간은 모르겠어요. 시계를 안 봐서.”
“진짜 미안해. 널 부르는 걸 깜박 잊었어. 저녁은 먹었니?”
“저녁……?”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손을 턱으로 가져가며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자 여양이 학생수첩을 꺼내어 휘저으며 말했다.
“알았어! 진~짜 진짜 미안해. 좀 있으면 지란이가 먹을 거 사갖고 올 테니 그거 같이 먹자. 오늘밤엔 좀 긴 회의를 해야 될 거 같아.”
체링은 여양이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깡마른 몸이 부실하게 휘청거리자 여양의 통통한 팔뚝이 휘어잡듯 가슴께를 감으며 안았다. 다른 손으로 문을 열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안으로 들어갔다.
“너 진짜 많이 먹어야겠다. 뼈에 가죽만 둘러놓은 것 같아. 하긴 너 같은 애가 나보단 인기가 많을지도 모르지만 말야.”
체링은 대답 대신 피식 웃기만 했다. 따라 들어오던 마미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인터뷰는 잘 되었나요?”
체링의 질문에 여양은 손사래를 쳤다.
“인터뷰라니, 그 정도는 아니야. 내가 무슨 신문부 기자도 아니고. 그냥 우리가 함께 궁리했던 질문을 모아서 물어본 것뿐이야. 그래도 사실 수확도 제법 있었어. 사진을 몇 장 얻어 왔거든. 근데 자세한 이야기는 다들 모이면 하자. 나 내일까지 외워야 되는 게 있어.”
그렇게 하여 잠시간 숙제 시간이 이어졌다. 마미도 지란의 책상에 앉아 미리 갖고 온 숙제를 하고 문제집을 풀었고, 체링은 원목 무늬 장판이 깔린 기숙사 바닥에 그냥 주저앉아서 책을 읽었다.
뒤늦게 방에 들어선 지란이 보고 놀라서 체링을 반강제로 침대에 앉혔다. 기숙사의 설비는 꽤 좋은 편이지만 3월에 바닥 난방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시스템 에어컨의 사용시간이나 강도에는 제한이 없어서 뜨끈한 공기가 방 안을 빵빵하게 채우고 있었다.
1시간 정도 지난 후에 금윤이, 조금 더 있다가 지란이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여양이 경과 보고라는 이름하에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있었는데 지란은 자신을 끼워주지 않는다며 투덜대었다. 그리고는 쇼프로에 나온 인기 연예인이며 드라마 내용을 전해주는 등 자기가 주인공이기라도 한 듯 열렬히 수다를 떨면서 모두의 이목을 모으는 바람에 이야기는 잠시 본론과 멀어졌다.
마침내 수다의 소재가 다 떨어졌는지 아니면 입이 지쳤는지 지란이 침대에 벌렁 드러눕자 방 안으로 들어온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체링이 입을 열었다.
“이제 재료는 거의 다 모였군요. 하나만 더 있으면 되겠어요.”
멍하니 있던 여양은 목캔디를 먹은 목처럼 귀가 확 트이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하나만 더?”
“네. 기숙사 입구에 있는 CCTV를 돌려봐요. 나영 선배가 숨지기 전날 밤 기록을요. 운이 좋으면 범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최소한 범인의 윤곽은 알 수 있겠죠.”
“정말? 어째서? 범인이 그날 밤에 기숙사 밖으로 나갔단 말이야?”
여양은 무릎으로 기다시피 해서 체링에게로 다가갔다. 금윤도 머리를 쓸어넘기며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방이 1층이니까 범인은 창문으로 들어갔다 나간 것일까? 수첩이 없이는 방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건 가능하니까……”
여양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무언가 자신 나름대로 그날 밤의 진상이 드러나는 듯 했다. 희미하고 흐릿한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라 두서없이 말로 표현해보았다.
“그렇다면 범인은 밤에 기숙사 밖으로 나가서 창문을 통해 금윤 선배의 방으로 들어가 미리 갖고 있던 가느다란 끈으로 나영 선배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커튼으로 목을 매어 자살로 위장하고 밀실을 만들기 위해 창문을 닫고 잠근 후 그대로 방을 나갔다, 라는 이야기가 되나?”
얼핏 들어보면 그럴싸했다. 여양은 금윤에게 다시금 미진한 부분을 재확인했다.
“선배는 창문을 최소한 이틀 정도는 연 적이 없다고 했죠? 잠갔는지 여부는 기억이 안 난다고 했고요.”
“응.”
“그렇다면 창문은 닫기만 하고 잠그지 않았다고 봐도 될 거예요. 그럼 창문의 유리에 지문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지금이라도 경비실에 알려서 지문을 채취하라고 해야겠네요.”
여양은 마치 문제를 해결한 탐정처럼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있던 지란이 반쯤 졸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근데 말야. 여전히 이상하지 않아? 창문을 열고 닫고 사람 목을 조르고 그 소동이 일어났는데 금윤 선배는 계속 자고 있었다며.”
윽, 여양은 목에 뭔가 걸린 듯한 소리를 내었다. 차마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미심쩍은 부분이며, 금윤 범인설에 무게를 실어주는 증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창문을 잠근 것은 금윤에게 유리하기도 하고 불리하기도 했다. 금윤이 범인이라면 창문을 잠글 리가 없다. 방 안엔 두 사람뿐인데 밀실 상태를 만들고 한 사람이 죽으면 당연히 남은 사람이 범인이 되니까, 범인이 왔다 갔다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창문이나 방문을 열어놔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발상이다.
반면 범인은 그런 불리한 상태를 만들어놓을 리가 없으므로 금윤이 범인이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다만 그럴 경우 범인이 어떻게 그 밀실에 들어갔다 나갔는지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인데, 범행이 벌어지기 전날 창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밀실은 밀실이 아니게 된다. 다만 현재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금윤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서 애매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