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에는 금윤을 비롯해서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모두 자기 방으로 불러 모아 자신의 성과를 자랑스레 들려주었다. 뻐기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멋진 수확이었고, 당연히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게 있었다.
예상대로 지란과 마트료나는 장하다고 추켜세워 주었고, 금윤도 겉으로 지나치게 내색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억누르고 있음이 눈에 보일 정도로 자제하고는 있으나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팔짱을 끼고 듣고만 있던 체링은 모두의 말이 끝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린 후 입을 열었다.
“결국 새로이 밝혀낸 것은 별로 없군요.”
“뭐?”
여양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예상치도 못한 말이기 때문에 미처 생각을 정리하지도 않고 입이 열린 것이다.
“LXG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은 감지민 선생님의 증언으로 뒷받침이 되었지만, 범인을 추측할 만한 단서는 나오질 않았잖아요.”
확실히 그랬다. 아직 금윤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도,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할 만한 단서도 얻어낸 것은 없다.
“그리고요, 그 말을 들으니 원나영 선배의 죽음은 타살임이 확실해졌어요.”
“어째서? 역시 이중의 상처가 문제인가?”
“물론 그것도 있죠. 정황상 가느다란 끈으로 목을 맨 후 그것을 풀고 커튼으로 묶어서 위장했을 거예요. 현장에 끈이 남지 않았나, 나중에 방을 정리하고 사진을 찍었다는 경비직원을 만나서 물어보세요. 그리고 울혈로 얼굴이 붉어졌다면 그건 교살, 타인이 목을 매서 살해했다는 증거예요. 자살이라면 얼굴에 핏기가 없이 창백한 상태여야 해요.”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체링은 고개를 잠시 갸우뚱거렸다.
“모르겠어요. 책에서 읽은 것 같아요. 아마도 추리소설이겠죠.”
체링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냥 희소식이라고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나영이 타살되었음이 밝혀졌음은 현재로썬 오히려 금윤에게 불리한 상황인 것이다. 차라리 나영의 죽음이 자살임이 확실하다면 금윤의 혐의는 없어지는 셈이니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여양은 그런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자신이 이 일에 뛰어든 이유는 두 가지 아니던가. 나영은 자살하지 않았다, 그리고 타살이라면 금윤은 범인이 아니다, 라는. 여양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직은 기뻐할 때가 아니에요. 이 학교는 섬 안에 갇혀 있으니, 일종의 거대한 클로즈드 서클인 셈이에요. 그렇지만 학생과 교사에 직원까지 합하면 천 명은 되는 용의자가 있지요. 소설처럼 간단하게 범인 후보들이 등장하지는 않는다구요. 그러니 전에도 말했지만 정보는 많을수록 좋아요. 무엇이 중요한지 골라내는 게 힘들지만요.”
“하지만 넌 지금 바로 하나를 찾아내었잖아. 얼굴에 피가 모여 붉었다는 증언을 듣고 타살이라는 걸 알아냈으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우린 현장사진도 없고, 발견 당시 정황도 상세히 모르니까요.”
“알았어. 내일은 내가 최초 발견자를 만나볼게. 물론 금윤 선배가 가장 먼저 보긴 했지만 놀라고 충격을 받아 제대로 기억도 못하는 모양이니까, 선배의 연락을 받고 방으로 들어온 경비 직원, 그 사람을 만나야 겠어.”
“어…… 나 그 사람 이름 기억해.”
멍하니 듣고 있던 금윤이 무심코 말했다.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금윤의 얼굴로 쏠렸다. 여양은 코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물었다.
“정말요? 그럼 진작 말씀을 하시지! 누군데요?”
조금 당황한 듯 했으나 금윤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에 만난 적이 있거든. 마침 내가 감방에서 나올 때 데리고 나온 사람이어서. 손선지라고……”
윽, 하고 여양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여양도 유일하게 이름을 알고 있는 직원이었던 것이다. 얼굴만 아는 사람이라면 식당과 매점의 아줌마들도 있었지만 이름과 얼굴을 다 아는 교직원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평소에 만난 일이 없는 경비 직원 중에서 아는 사람은 오직 손선지밖에 없었던 것이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선지는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여양을 알아보았다. 서로 대충이나마 아는 사이이니 대화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일런지. 역시나 여양은 직접 부딪쳐보고 판단하기로 마음 먹었다.
* * * * * * * * * *
손선지와의 만남은 수업을 마치고 저녁을 먹기에는 약간 이른 오후에 이루어졌다. 매점 바깥에는 카페테리아처럼 커다란 파라솔이 한가운데 꽂혀 있는 통나무 테이블과 등나무로 짠 의자들이 잔디밭 위에 펼쳐져 있었다. 여양은 승미를 대동하여 선지와 마주보고 앉았다.
이미 전날 저녁에 전화를 통해 간단한 용건을 말해두었기 때문에 만나게 된 이유부터 시작하는 번거로운 사전 질의는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상황판단이 빠른 선지는 여양이 교장의 대리인이 맞는지만을 확인하고(즉 교장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기본적으로는 신문에 실려 있는 내용과 차이는 없지만, 그것만이라면 구태여 만나자고 할 이유는 없겠죠.”
과연 이해가 빨랐다. 여양은 고개를 끄덕이곤 연습장을 펼쳐서 조심스레 밤늦게 궁리하며 적어놓은 질문을 확인했다.
“나영 선배의 시신에 처음으로 손을 댄 사람이 맞으시죠?”
“네, 맞아요. 금윤 학생이 몰래 건드리지 않는 한에는. 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딱히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어요.”
“신문에 따르면 사진을 찍은 후 목에 감긴 커튼을 풀고 그, 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셨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죽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조금 힘들었다. 그래서 잠깐 말을 더듬고 좀 더 완곡한 혹은 정중한 표현인 숨이 끊어졌다고 바꿔야만 했다. 여양은 등에서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옆에 교내신문 기자가 있는데 왜 자기가 이런 인터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승미를 원망했다.
순전히 초조하고 긴장되는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는 심리에서 비롯한 마음이었지만. 제갈승미는 처음 공언한 대로 방관자와도 같은 관찰자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사진을 갖고 계신가요?”
“그때 찍은 사진은 카메라 째로 이사회에 제출했어요. 그쪽에서 넘기라고 해서요.”
여양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 사진이 무엇보다 필요한 데 말이다. 하지만 사진이 유출되었다면 그럴 만한 사람은 선지밖에는 없을 것이다. 메이브와 LXG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여왕이 아닌 이상 이사회와 접촉할 수는 없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얼른 본론으로 가야만 했다. 여양은 가장 중요한 의문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