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바람이 몰아쳐 몸을 적신 물을 얼리기 시작했다. 온몸을 바늘로 찔러대는 듯한 격통이 밀려오자 금윤은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힘겨워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몸을 웅크렸다.
하다못해 버려진 길고양이라도 이렇게까지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을. 학생들은  호기심을 갖고 접근하다가도 그가 길금윤임을 알아보고는 즉시 고개를 돌리고 멀리 떨어지려 했다. 금윤이 갖고 있는 사악한 기운이 인플루엔자처럼 전염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윤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묘하게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저 온몸이 얼어붙는 추위만이 육체와 영혼을 옥죄고 있어 억울함과 서글픔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마치 두루뭉술한 악몽 속을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 친구를, 룸메이트를 잃은 슬픔도 컸지만, 하필 그의 죽은 모습을 발견했을 때 받았던 충격을 채 씻어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겪은 일련의 괴롭힘과 따돌림과 수모와 추위는 눈 위에 내리는 눈처럼 티도 나지 않는 듯 했다.

이대로 얼어붙어 동상처럼 굳어져 버릴 것만 같았을 때, 마음이 조금씩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망각만을 좇고 있을 무렵 몸 안에서 발신음이 났다. 하필이면 그때 울리는 소리는 금윤의 내면에서 외치는 내면의 외침과도 같이 들렸다. 나는 아직 살아 있어. 포기하고 싶지 않아.
금윤은 자문했다. 포기하다니, 무엇을? 그건 아마도 이 억울함을 해소하고 진실을 알아내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인생 자체.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준다면…….

「여왕님입니다. 만나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몸이 급격하게 떨렸다. 분명 얼어붙은 신체를 갑자기 움직여서 그런 것이겠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진정하려 했으나 뜨거워진 눈시울만은 둘러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떨리는 손가락을 흔들고 입김으로 녹이며 타블렛 펜을 들어 답장을 적어 보냈다.
「만나자. 지금 어디에 있니?」

비로소 금윤은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붙잡을 자신이 생긴 것이다.


* * * * * * * * * *


금윤은 여양, 마미, 체링과 함께 목욕탕에 가서 몸을 녹이고 젖은 옷을 세탁실에 맡긴 후 여양의 방에서 지친 몸을 쉬었다. 지란은 또 어디서 놀고 있는지 방에 없었다. 친구도 많고 놀기도 좋아하는 아이니까, 라면서 여양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지난 번 노혜와의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또 어딘가에서 다른 여자애랑 그런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건 질투라기보다는 가족을 염려하는 마음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아주 천천히 금윤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최대한 덤덤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설움을 막을 길이 없었다. 물벼락을 맞고 돌아오던 그 길,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물러서던 아이들을 떠올리자 눈물이 넘쳐흘렀다.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던 여양은 체링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중의 상처와 그걸 찍은 사진을 LXG가 어떻게 알았느냐가 문젠데. 그게 정말 사실이고 사진이 존재한다면, 역시 신문부로부터 알아낸 걸까?”

그때 금윤이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돌로리스는 사진을 신문부로 넘긴다고 말했어. 신문부로부터 얻은 정보가 아닌 것 같아.”
“흠, 그럼 더 알 수가 없는데. 대체 누가 신문에도 안 실렸고 아무도 모르고 있는 정보를 유출한 거지? 아무래도 금윤 선배를 협박하기 위한 거짓 정보일 가능성도 생각해둘 필요가 있겠어.”
“그럴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엔 시체를 옮긴 경비 직원과 시신을 보관한 의사와 간호원들에게서 정보를 얻어내지 않았나 싶어요.”

체링의 말에 여양도 뭔가 짚이는 듯 턱을 괴고 생각을 거듭했다.

“과연. 금윤 선배는 커튼에 목을 맨 시신을 발견하고 신고를 했어. 신문에 의하면 경비 직원이 와서 사진을 찍고 시신을 내렸다, 그 후에 의사가 와서 시신을 병원으로 옮겼다. 따라서 목의 상처를 보고 사진을 찍은 것은 직원이라는 얘기. 아무리 교내를 주름잡는 LXG라지만 어떻게 학생이 직원에게 그런 정보를 캐내었을까? 이사회에서 덮어두려는 걸로 봐서 직원들이 쉽사리 입을 열 리가 없을 텐데.”
“그건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겠죠.”

여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약간 연극적인 느낌으로 소리쳤다.

“그래! 여기서 모여 앉아 궁리해 봐도 답은 안 나와. 역시 직접 움직이고 찾아봐야 겠어!”

그러더니 금윤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선배, 나 결심했어요. 선배의 무죄를 내가 밝혀내고 말 거예요. 마미의 말대로, 금윤 선배는 나영 선배를 죽일 이유도 없고 죽였다는 증거 하나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벌써 선배를 보고 살인자라는 둥 괴롭히고 따돌리고 있잖아요. 더 이상은 이런 꼴을 못 보고 있겠어요. 선배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가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아서 안 되겠어요! 나라도 나서서 선배의 누명을 풀어줄 테니 두고 봐요.”

금윤은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목이 메어서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왜 나를 위해서 그렇게, 그렇게까지 하려고 하니. 그런 의문만이 입 안을 맴돌다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그때 금윤의 손등에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닿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마트료나가 자신의 손을 들어 금윤의 손을 살짝 쥐고 있었다. 솜털로 간지럽히는 듯 부드럽게 속삭이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선배, 나는 믿어요. 선배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나영 선배가 자살 같은 걸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금윤 선배가 친구를 죽이지 않았음을 믿고 있어요. 이럴 때 내가 무언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난 왕님이처럼 용감하지도 않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잠깐, 마미! 왜 네가 울려고 하는 거야? 지금 여기선 웃어야 할 때야! 내가 금윤 선배의 무죄를 밝혀낼 거라고 지금 선언하고 있잖아! 다 같이 웃으면서 박수를 쳐야지!”

감동해서 듣고 있을 생각이었지만 돌연 마트료나가 감정이 북받친 듯 눈물을 글썽이자 화들짝 놀란 여양이 분위기를 바꿔보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호령에 따라 체링을 시작으로 모두는 기운이 빠지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양팔을 살짝 벌리고 허공을 두드리는 듯한 거만한 손짓으로 박수를 가라앉힌 여양은 팔짱을 끼고 서서 다음 일을 궁리했다.

“말은 멋지게 했지만, 일단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 우선은 신문에 발표하지 않은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해. 신문부에 도움을 요청하고, 그 다음엔 사진을 찍었다는 직원과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물어봐야 겠어.”
“정보는 많을수록 좋아요. 현실은 추리소설처럼 단서를 착실하게 제공해주지 않으니까. 뭐가 중요한 힌트고 뭐가 맥거핀인지 알 수가 없으니 최대한 정보를 많이 확보할 필요가 있어요.”

“좋아, 체링 너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 같아. 근데 여기서 맥머핀 얘기는 왜 나와?”
“맥거핀이요. 추리물에서 독자를 속이기 위한 불필요한 정보를 말해요. 중요한 단서인 줄 알고 독자들을 집중하게 한 후 반전으로 놀래키기 위해 쓰이지요.”

여양은 체링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사실 확실히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수첩을 꺼냈다.

“그럼 내일부터 당장 수사를 시작하겠어. 수사라니까 내가 수사반장이라도 된 것 같은데, 일단 신문부에 만나자고 연락을 해야지. 내가 아는 사람은 제갈승미 선배밖에 없으니 그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펜을 빼내어 액정 위를 휘갈겼다. 활자인식으로 입력된 문장이 화면에 출력이 되었다. 잘못 입력된 글자를 고쳐서 학년, 반, 이름을 입력하여 송신을 했다. 혼자 메시지를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겨우 끝났는지 수첩을 침대 위에 던지고는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아우, 지겨워.”
“잘 안 되었니?”

마트료나가 걱정스레 물어보자 여양은 누운 채로 거꾸로 비치는 그의 얼굴을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나보고 여왕 선발전 출마 선언 인터뷰를 하면 전면 협력하겠대.”
“정말? 그래서 하겠다고 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멋대로 정하려고 하고 있어.”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 그래서 마트료나의 반박도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그건 그렇지만…… 많은 학생들이 너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해.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걸.”
“마미 너까지 내가 원하지도 않는 광대짓을 하라고 부추기는 거야?”
“광대라니. 절대로 그렇게 생각 안 해. 난 사실 조금 동경하고 있어.”
“진짜야?”

여양은 놀라서 일어나 앉았다. 마트료나는 찰랑거리던 검은 머리카락과, 반짝이던 왕관 모양의 브로치를 떠올렸다.

‘이 왕관을 기억하고 있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이라기엔 너무나 또렷했다. 이 화원의 주인은 너야, 그때가 되면 우린 다시 만날 거야……. 의미도 알 수 없던 말들이 예언처럼 느껴졌다. 심장에 각인된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지금껏 조금도 퇴색되지 않고 있었다.

꿈꾸는 소녀처럼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 그대로 마트료나는 그때 느꼈던 생각을 두서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꽃이 만발하던 화원에서 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분을 만났어. 그 사람이 분명 이 학교의 여왕 초월랑님……. 그곳에서, 그 분에게서 나는 꿈꾸고 동경하던 모든 것을 보았어. 내가 바라던 나의 미래가 거기 있는 것만 같았어…….”

여양은 잠시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누가, 왜, 무엇을 위해 여왕이 되는가. 여왕이라는 직위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그 해답의 일부분을 알아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 결심했다.”
“응? 뭐를?”
“그건 비밀. 나중에 알려줄게.”
“피. 그런 게 어딨어?”
“여기 있지 어딨냐?”

웃으며 얼버무리는 여양을 보며 마트료나는 잠깐 어이가 없었지만 결국 따라서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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