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4.
수업을 마치고 종례를 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학생이 2학년 5반 교실에 들어왔다. 압정을 치웠는데도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을 맛봤던 금윤은 한시라도 빨리 이 교실을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에 종례가 마치자마자 달아나듯 뒷문으로 향했으나 두 사람이 더 빨랐다. 금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금발에 작은 몸집을 한 2학년생 돌로리스와 붉은 기가 도는 갈색 곱슬머리의 1학년생 아르진, 이들은 뭇 학생들의 선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고 있는 LXG의 멤버였다. 돌로리스는 선연한 색색의 줄무늬 양말에 새빨간 스웨터 차림이고 아르진은 소매나 치맛단에 프릴을 달아서 개조한 교복을 입고 옆머리엔 조화가 달린 머리핀을 달고 있었다. 두 사람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자석의 척력을 받는 듯 좌우로 물러났다.
“길금윤? 잠깐 얘기 좀 할까? 네 자리에 앉아봐.”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어조로 돌로리스가 말했다. LXG에 맞서거나 반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무모한 용기를 가진 학생은 학생회 멤버를 제외하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외가 있다면 밤중에 당당히 찾아와 붙잡혀 있던 친구를 데려간 아이 정도?
그러니 금윤은 불량배를 만난 어린아이처럼 떨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아이들은 좀 떨어진 곳에서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싸움이라도 할 기세로 보였는지, 창문이 열리면서 옆 반 아이들도 얼굴을 내밀었다.
“길금윤, 단도 어쩌고로 물어보겠어.”
돌로리스가 물었다. 아르진은 단도직입이라는 말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네가 죽였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며, 여우처럼 매혹적이지만 날카로운 미소를 보였다. 돌로리스의 미소와 질문의 뉘앙스는 이미 알고 있는 대답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윤은 굴욕감과 무력감을 곱씹으며 떨리는 몸을 고정하려는 듯 주먹을 꼭 쥐고 허벅지를 눌렀다.
“대답하기도 싫다 이거니?”
돌로리스의 목소리에 험악한 기세가 섞여 들어갔다.
“내 추측을 말해줄게. 네가 출소한 날, 넌 원나영과 심한 말다툼을 했어. 그 내용이야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나이프 사건을 일으킨 무서운 아이와 같은 방을 쓰기 싫다든지 하는 식으로 너를 몰아세웠을 거야. 화가 나서 다투다가 어느 틈에 넌 걔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거지.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나영의 숨은 끊어져 있었던 거야.”
싸늘한 침묵이 주위를 배회했다. 형식상으로는 금윤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실은 교실 안의 모든 학생들이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어떤 수업에서도 느낄 수 없는 정숙과 집중이 지금 이 순간 있었다. 청중을 의식했는지 돌로리스는 한층 목소리를 높이고 감정을 실어 말을 이었다.
“그 두렵고도 긴박한 순간 속에서도 너는 가능한 차분하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겠지. 여기서 자수를 해봤자 나이프 사건을 일으킨 너를 이해해줄 사람은 없다는 거. 사람 목에 칼을 겨눴던 사람이니 목을 졸라 죽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다들 생각하지 않겠니? 우발적이었다든가, 실수였다든가 하면서 변명을 해봤자 먹히지도 않을 게 뻔해. 넌 살인죄로 잡혀 갈 것이고, 미성년자라고 해서 쉽게 용서받지는 못하겠지. 그래서 넌 나름 머리를 쓴 거야. 커튼으로 고리를 만들어 목을 묶어놓고 다음날 잠에서 깨어 자살한 룸메이트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신고를 했지. 물론 의심이야 받겠지만, 딱히 살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보이지도 않고 하니까 피곤해서 곤히 잠들어서 몰랐다는 식으로 넘어가려고 했지.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버텨왔잖아. 내 말 틀렸니?”
주위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열린 창문 틈에 신문부 학생의 모습도 보였다. 특종 거리를 놓치지 않는 신속함은 평가할 만 했다.
“자, 여기까지는 좋았어.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지만 이사회는 학교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얼른 사건을 무마시키려 했지. 이대로라면 그냥 자살 사건으로 묻혀지고 말 일이야. 하지만 난 어떤 사람으로부터 증언을 들었거든?”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일까, 돌로리스는 돌연 말을 멈췄다. 호기심이 고조된 청중들은 숨을 죽이고 그저 돌로리스와 금윤의 얼굴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금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그 창백한 얼굴은 마치 명탐정 앞에서 범행이 폭로된 범인의 것 자체였다.
“커튼을 푼 나영의 목에, 붉은 상처 자국이 있다고 말야. 두껍고 커다란 커튼으로는 절대로 낼 수 없는, 가늘고 깊이 파고 들어간 자국이!”
그 순간 아이들의 입에선 경탄과 공포의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신문에도 실리지 않았고, 이래저래 떠돌던 온갖 뜬소문 중에서도 없었던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중의 상처.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나영이 실제로 목을 졸려 죽은 것은 커튼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목을 조른 또 다른 끈이, 또 다른 손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그럴 만한 의심이 가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자, 어때? 비록 그 증인의 신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대신 우리 LXG의 힘으로 발견 당시 목을 찍은 사진을 입수하여 조만간 신문부에 넘길 생각이야. 그때가 오기 전에 네가 할 일은 하나 뿐이야. 교무실이나 경비실을 찾아가,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늦게나마 용서를 비는 일!”
금윤의 몸이 휘청거렸다. 돌로리스를 올려다보는 그 얼굴은 죽은 자의 것처럼 창백하고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아르진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발치에 내려놓았던 양동이를 집어 들었다.
“이걸 우짤꼬? 지금 울고 짜고 싶제? 내가 도와주께. 실~컷 울어삐라 마!”
갈색 머리의 백인 입에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흘러나왔지만 주위의 누구도 웃지 않았다. 아르진은 양동이 가득 담긴 물을 금윤의 몸에 천천히 부었다. 금윤은 눈만 질끈 감았을 뿐 앉은 상태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물을 맞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돌로리스가 팔짱을 끼고 불쌍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젠 마음껏 눈물을 흘리렴. 그리고 마음이 진정되면 우리 LXG를 찾아와. 널 도와줄 방법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네가 받을 처벌을 줄일 수 있는 길을 궁리하고 있거든. 고맙지 않니? 지금의 너에게 과연 누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을 것 같애? 학교의 평화를 바라는 우리 LXG밖에 없지. 자, 그럼, 기다릴게!”
돌로리스는 자기 할 말을 마치자 볼 일이 없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을 빠져나갔고, 아르진은 슬쩍 금윤의 물에 젖은 꼴을 우습다는 듯 흘겨보고는 그 뒤를 따랐다. 극에 몰입한 관중처럼 적막에 잠겼던 주위에서 조금씩 이야기꽃이 싹을 틔웠다.
신문부원은 지금껏 속기로 받아 적었던 대화(거의 돌로리스의 일방적인 말이었지만)를 정리하며 부실로 황급히 돌아갔고, 다른 반 아이들은 도망가듯 그 자리를 떠났다. 아이들 대부분이 피하듯 물러났고, 금윤은 찬 물을 뒤집어쓴 채로 몸을 떨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