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은 한숨을 쉬고 유리문 옆에 있는 자판기로 가서 수첩을 찍어서 계산을 하고 커피를 한 잔 뽑아 손에 들었다. 역전 광장의 비둘기 떼처럼 모여 있는 저 아이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누가 지나가다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체링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오! 체링아, 오랜만이야.”
“안녕. 오랜만이에요.”
“정말 요즘 통 얼굴도 못 보네?”
“난 시간이 나면 늘 도서관에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까 벌써 손에 책을 세 권이나 들고 있었다. 하얀색도 있고 검은색도 있고, 책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여양에게는 그저 신기할 뿐. 쳐다보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체링이 책 하나를 들어서 보여줬다. 새하얀 표지에 제목과 지은이가 작은 글자로 적혀 있을 뿐인 지극히 소박한 표지였다.
“어쩐지 여기에 오니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아서 빌렸어요.”
“『여자만의 나라』? 정말 그렇네. 여기는 여자밖에 없는 학교니까.”
“섬 전체가 폐쇄되어 여자만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학교도 헐랜드(Herland)와 비슷하긴 하죠. 근데 이 책 속의 나라는 더 대단해요. 처녀생식으로 여성들만의 생존이 가능해진 거죠.”
“그래? 그거 대단한데.”
“다 읽으면 빌려줄게요. 아직 반납기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고마워. 근데 그건 그렇고, 사실 난 학교 신문을 보려고 왔는데……”
“아, 오늘 나온 거요? 이상하게 인기가 있던데요.”
“아마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사건에 대해 알고 싶은 거겠지.”
“그럼 날 따라와요.”
돌연 체링이 손짓을 해서 영문도 모른 채 계단을 타고 3층 열람실으로 올라갔다. 구석 자리에 책을 쌓아 놓고 젠가(Jenga)라도 하려는 듯한 곳이 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체링이 찜해놓은 곳이었다. 이제는 아주 개인 전용석이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체링은 책 무더기 속으로 손을 쓱 집어넣더니 학교 신문을 몇 부 꺼내었다.
“음…… 오늘자가…… 이거예요.”
“어! 이거 어디서 났어?!”
“아침에 한 부 가져왔어요. 신문을 모으고 있거든요. 삼 년동안 모으면 꽤 많겠지만, 졸업할 때 기념으로 갖고 가려고요.”
“대단하다, 신문 모을 생각을 다 하고. 덕분에 이렇게 보게 되었네.”
“필요하면 복사기에서 복사를 해요. 제가 모아야 하니까 드릴 수는 없어요.”
여양은 애타게 찾던 걸 쉽게 손에 넣게 되자 헤벌쭉 웃었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체링을 다짜고짜 껴안고 뺨을 비볐다. 갓 구운 빵처럼 체링의 뺨은 탐스러운 갈색에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고마워! 이런 귀염둥이 같으니!”
숨이 막힌다며 콜록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양은 포옹을 풀지 않았다. 체링의 키가 작아서 여양의 품속에 쏙 들어간 느낌인데 너무 말라서 당장이라도 툭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여양은 왠지 체링에게서 그리운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체링아, 너한테서 할머니 냄새가 나.”
“할머니 냄새? 그거 좋은 건가요?”
“응……. 좋긴 한데, 솔직히 여고생에게 할 소리는 아니지. 미안해, 헤헷.”
“제가 할머니의 팔찌를 끼고 있어서 그런가 보죠? 난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아냐, 아냐. 그냥 내가 그렇게 느낀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마.”
겨우 포옹을 풀고 오늘자 학교 신문을 펼쳤다. 역시나 1면부터 대문짝만 하게 자살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현장을 찍은 사진이라며 실린 것은 나영과 금윤의 방문을 찍어놓은 것 뿐. 그 밑에는 경비 직원의 제지로 내부 촬영에 실패했다고 적혀 있었다.
우선 사건의 개요를 읽어보았다. 토요일 아침 7시 40분, 길금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보니, 룸메이트 원나영이 창가에 목을 매단 채로 매달려 있었다. 두 장의 커튼 중에서 하나를 뜯어서 창문 위에 설치한, 커튼을 고정하는 봉에 묶은 것이다. 기숙사의 천장과 마찬가지로 창문의 높이도 낮은 편이라 커튼 봉의 높이는 2미터도 되지 않아서 발견 당시 나영의 몸은 무릎을 살짝 굽히고 발등이 바닥에 닿은 상태였다. 옷차림은 파자마 상태였고 안경이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금윤은 발견 즉시 파자마 차림으로 1층 경비실로 뛰어 내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경비 직원은 당직 교사와 이사회에게 보고를 한 후 즉시 달려가 평소에 지시받은 대로 현장 사진을 서너 장 찍은 후 커튼을 풀어 시신의 상태를 살펴보고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임을 확인했다.
약 십 분 후 의사인 감지민이 간호원 및 경비 직원들과 함께 도착, 시신을 들것에 싣고 병원으로 운반했다. 경비직원들은 호기심에 몰려든 학생들의 접근을 통제했다. 신문부 기자들도 이 소식을 듣고는 등교 도중 혹은 자기 방에서 취재를 위해 달려왔으나 일체의 사진 촬영 및 취재를 거부당했다.
신문의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덕분에 배포가 평소보다 조금 늦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 나온 즉시 동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원래부터 인기가 없어서 소량만 찍었던 게 원인이기도 했지만.
듣기로는 기사를 더 써서 내일쯤 호외를 찍을 예정이라고 하니 더 자세한 소식은 그때쯤에나 알 수 있을지 몰랐다. 무엇보다 화제의 중심이 되고 만 길금윤을 여러 차례 만나 상세히 물어보겠다는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보니 기분이 착찹했다.
원래 길금윤은 나이프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비인간적인 처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생각이었고 기자인 제갈승미도 이에 동의한 상태였다. 그런데 며칠만에 극적으로 입장이 바뀌어서 자살 사건에 대한 목격자이자 용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이 되고 말았으며, 인터뷰 또한 자살 사건에 대한 것으로 바뀌고 만 것이었다.
여양은 신문을 책상 위에 떨어뜨리듯 놓고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앞이 막막하고 정신이 멍해졌다.
“아는 사이였죠, 길금윤이라는 선배와.”
체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원나영 선배도 만난 적이 있어.”
그것도 자살하기 전날에. 여양은 거기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너무나도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상인 것만 같았다. 나이프 사건으로 고초를 겪다 풀려난 날, 반갑게 재회했던 룸메이트가 그 다음날 목을 매달았다니.
그날 밤은 마트료나가 유학생들에게 끌려가 험한 꼴을 당했고 여양 자신이 직접 데리고 오기도 했던 날이다.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그 밤사이에 일어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