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똑.
그 순간을 방해한 것은 나지막한 노크 소리였다. 하지만 모두들 비상경보라도 울린 듯 행동을 멈추고 초조한 얼굴들을 마주보았다. 메이브는 턱짓으로 카밀리아에게 가보라는 지시를 했고, 그는 말없이 안경을 고쳐 쓰며 방문 앞으로 몸을 바싹 붙였다.
“누구……?”
“여왕님이라고 합니다. 열어주시죠.”
일부러 크게 낸 목소리가 방 안까지 들렸다. 카밀리아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자 메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어주자 여왕님이 역시 파자마 차림으로 서있었다. 조금 떨어진 뒤에는 나즐리가 파자마 위에 히잡을 덮어쓰고 목을 뻗어 안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유명하신 여왕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지?”
메이브가 약간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을 건넸으나 표정은 긴장이 채 풀리지 않은 듯 약간 굳어 있었다.
“이건 교칙위반 아닌가요? 밤에 잠은 안 자고 모여서, 더구나 이 냄새는 술 냄새 같은데요?”
카밀리아가 인상을 확 쓰더니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신입생 주제에……”
“교칙을 어기고 후배를 괴롭히는 선배들이 신입생을 나무랄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생활지도 선생님 만나러 줄줄이 몰려가고 싶은 생각이 없으시다면 지금 당장 마트료나를 보내주시죠.”
“썩스(Sucks)! 이년이 어디 앞에서 건방지게……!”
카밀리아는 당장 따귀라도 날릴 듯 성을 내며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메이브가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놔 둬. 역시 나이프 사건을 해결한 건 충동이나 행운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재미있군.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리고 유약한 신입생의 모습이 아니야. 어쩌면 우리보다 더 많은 시간을 쌓았을지도 모르는 그런 무게감이 느껴져.”
여양은 순간 움찔했다. 숨겼던 자신의 진짜 나이를 알아차린 걸까? 과연 에메랄드 아이라며 자자하던 명성이 단순한 뜬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사람의 속내를 간파하고 마음을 지배한다는 마력의 눈동자, 에메랄드 아이. 확실히 겁없이 굴었던 여양이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였다. 빈나련이나 돌로리스와는 또 다른 카리스마가 있었다. 성숙한 여성이 풍기는 고혹적인 분위기와 초록색 눈동자에서 뿜어나오는 마력과도 같은 매력이.
메이브는 또한 그 나름대로, 무시하지 못할 강적의 등장을 목도하고 있었다. 이 존재감과 파괴력…… 어쩌면 앞으로 빈나련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장하기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만 해. 그런 생각을 포커 페이스로 감추며, 메이브는 짐짓 느긋한 척 손짓을 하여 마트료나를 풀어주라고 명했다.
“모처럼 신입 회원을 맞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훼방꾼이 나타나서 흥이 사라졌어. 데리고 사라져!”
마트료나는 오한이 들린 듯 몸이 떨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여양이 얼른 다가가 옷을 대충 입히고 브래지어를 주워서 어깨를 끌어안고 방을 나섰다. 방을 나가기 직전에 고개를 슬쩍 돌려 방 안을 훔쳐보니 모두들 종이컵에 담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돌로리스의 도발적인 눈빛과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움츠러 들며 고개를 돌렸다. 막 닫히려는 문 너머에서 돌로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은데? 후후후.”
문이 닫혔다. 카밀리아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묻자 여양과의 비밀이라며 웃어 넘기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는 거지! 크크크…….”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마트료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어 여양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잘 자라고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마트료나가 불러 세웠다.
“……어떻게 알았어?”
“실은 나즐리에게 부탁했었어.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알려달라고. 거기 있던 사람 중에서 돌로리스라는 선배를 만났는데, 네 얘기를 하면서 묘하게 언행이 수상하더라고. 그래서 혹시나 해서……. 다행히 네가 방을 나간 후에 나즐리가 잠을 깨고 몰래 따라갔던 모양이야. 조금 늦어서 처음엔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했는데 어느 방에서 여러 사람 목소리가 들리길래 가보니 문 옆의 명찰에 돌로리스라고 적혀 있지 않겠어.”
“그랬구나. 도와줘서 고마워.”
“신경쓰지 마. 혹시 내일부터 그 선배들이 또 괴롭힐지 모르니 조심해.”
“참, 나, 네가 해준 말 생각했어.”
다시 나가려던 여양은 다시 마트료나의 머리맡으로 돌아왔다.
“언제였더라? 학기 시작되고, 내가 적응하기 힘들다고 했을 때 네가 해준 말 있지? 눈을 꼭 감고 셋을 센 후에 눈을 뜨라고. 눈을 감은 동안 기존의 세계는 사라지고,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세계는 새로운 세상이라고. 그러니 겁먹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랬던가. 확실히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은 난다. 그건 여양 자신이 어릴 적에 직접 만든 자기만의 주문이었으니까 잊을 리는 없겠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말해준 건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마트료나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듣기만 할 뿐이었다.
“그 말을 떠올리고 용기를 내었어. 선배들 다섯 명이 둘러싼 방 안에서, 그들의 엘리트 모임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했어. 괴롭힘을 당하긴 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 그때 난 눈을 꼭 감고 생각했는걸. 그 전의 나는 사라지고, 눈을 뜬 순간의 나는 용감한 새로운 내가 되었으니까.”
“마트료나…….”
“나, 앞으론 더 강해질 거야. 언제까지 네 도움만 받을 수는 없잖아? 그러니 너무 내 걱정하지 마.”
“그래, 오늘은 늦었으니까 자.”
여양은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고는 일어났다. 나즐리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파자마만 입고 복도에 나오니 무척이나 추워서 양팔로 몸을 감싸고 반쯤 뛰듯이 걸었다.
하다못해 교복 코트라도 걸칠 것을, 급한 마음에 침대를 박차고 튀어 나오니 이 꼴이었다. 스스로도 참 한심하구나 생각하며 여양은 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지란은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여양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생각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기를. 더는 마트료나가 슬퍼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는 그런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방 안에서 펼쳐지던 탐미적이되 퇴폐적인 풍경이 마음 한켠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일렁이는 촛불 아래 드러난 마트료나의 알몸과 이를 탐욕스럽게 더듬던 금발벽안 선배들의 손가락, 그 자극적인 손길, 손길들.
하지만 같은 시각, 또 하나의 손길이 어둠 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독사의 이빨처럼 치명적인 손짓이었다.
(제5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