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신비의 섬, 영화궁(永華宮)
‘……님……!’
목소리가 들린다. 아득히 먼 하늘에 스며드는 메아리처럼 희미한 외침이었다.
‘……왕님……!’
어딘가 들어본 적이 있는 그리운 목소리였다. 어쩌면 꿈속에서, 아니면 전생에서 들었을지도 모르는. 그 소리가 파문처럼 일렁이는 것이 느껴진다. 마치 깊은 바다 속에 몸을 담그고 수면을 흔드는 파도를 느끼듯, 그 물결에 몸을 맡겨본다.
‘……여왕님……!’
점차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게 되자, 소녀는 그것이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외침임을 알았다. 그 누군가란 바로……
“야, 왕님아!”
풍선이 터지는 듯한 고함소리에 소녀는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들었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는데, 실은 잠시 졸았던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여왕님이라 불린 이 소녀는 그 짧은 순간 마치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영원히 일렁이고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을 되새겼다. 너무 빨리 현실로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쉽다는 듯, 무거워진 눈꺼풀이 다시 빛을 가리고 어둠을 좇는다.
“왕님아, 다 왔대. 빨리 잠 깨고 내릴 준비나 해.”
하지만 옆에 앉은 소녀의 우렁찬 목소리가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님은 실눈을 뜨고 멍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부스럭 부스럭, 손을 쉬지도 않으며 과자 봉지를 뒤적이며 남은 부스러기를 훑던 소녀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새 그렇게 깊이 잠들었어? 세상에 몇 번을 불렀는데도 반응이 없냐.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
“어……. 그런 것 같아.”
길고 긴 꿈. 그건 마치 긴 터널을 지난 듯한, 깊은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깊이 잠들어본 게 얼마만인지. 왕님은 스스로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수업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책상에 엎드렸을 때,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버스의 의자에 앉았을 때 침대에 누웠을 때보다 더 깊고 편하게 잤던 적이 있었다. 그게 긴 학생시절을 보내며 얻은 습관이라는 것일까. 더구나 지금 타고 있는 15인승 승합차는 소음도 적고 흔들림도 거의 없어서 잠이 들기에는 최적의 쾌적한 환경이었다. 다만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바로 옆에 앉은 상대 정도랄까.
“이 경치를 봐. 이걸 보고도 잠이 오니? 정말 너는 이름처럼 여왕님이셔, 진짜."
특이한 이름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기억에 남기기에는 좋지만 그만큼 놀림감이나 희화화의 대상이 되기에도 쉬웠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걸쳐 한두 번 전학을 가본 경험이 있는 여왕님은 자신의 이름을 보고 비웃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익혀야만 했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마음은 민들레처럼 가늘고 약한 것인데도, 세찬 웃음소리에 씨앗들은 저 멀리로 흩어지고 만다.
“이제 좀 있다 내리면 그 담엔 배를 타고 간대. 난 배멀미가 있거든. 여기 올 때도 진짜 죽는 줄 알았어. 그래서 좀 걱정을 했는데 10분도 안 걸린대. 그나마 다행이지.”
우물거리는 불명확한 발음. 지란은 입 안에 과자를 넣고 연신 씹으면서 말을 했다. 뽀작거리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이런 아이 곁에서도 꿀잠을 잤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자기 멋대로 사는 아이가 발산하는 소음을 애써 무시하듯 왕님은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았다. 승합차는 쭉 뻗은 제주도의 국도를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섬의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도로의 오른쪽에는 바다가, 왼쪽에는 육지가 있었다. 정말로 그 단순한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 외의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만 해도 거기엔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오른쪽엔 검푸른 바다와, 수채화처럼 투명한 하늘과, 그 둘 사이를 갈라놓기에는 너무나 흐릿하게 존재하는 수평선, 그리고 단조로움을 달래주려는 듯 흩뿌려진 구름들이 있었다. 왼쪽엔 눈에 덮인 정상이 뿌옇게 보이는 한라산이, 소생할 날을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는 검은 빛의 땅이 있었다. 푸른색 기조의 컬러와 모노크롬으로 나뉘어진 두 세계가 병행하고 있었다. 길고 긴 국도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녀는 자신이 땅과 바다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듯한 신비로운 기분을 느꼈다. 서로 다른 두 세상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타고 가는 것만 같은 느낌. 이대로 차는 레일을 벗어나는 은하철도처럼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설렘에 부푸는 가슴이 열기구처럼 둥둥 떠오를 것만 같다.
그렇지만 소녀의 환상과는 달리 현실 세계의 승합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작은 항구의 어귀에 정차했다. 창 너머에 자신들을 마중나온 배의 모습이 보였다. 여객선이나 페리라고 부르기엔 너무 작고, 베니스에서 볼 수 있는 바포레토(Vaporetto) 정도의 크기여서 수상 버스라고 부르는 것이 알맞을 것 같았다. 승합차에서 내린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온 듯 들뜬 모습이었다. 저마다 크고 작은 가방을 들거나 메고 서로의 상기된 얼굴을 보면서 한층 더 자극을 받아 밝은 표정을 짓는다.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웃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여왕님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은 평범한 외모를 한 소녀뿐이었다. 청바지에 운동화, 셔츠에 스웨터를 덧입고 추울까 싶어서 챙겼던 재킷과 목도리는 벗은 채로 왼팔에 두르고 오른손엔 학교다닐 때 늘 들고 다니던 평범한 검은색 책가방을 들고 있었다. 짐은 그것뿐. 바퀴 달린 커다란 여행 가방이며 커다란 스포츠백이며 잔뜩 짐을 챙겨든 몇몇 아이들과는 대조적인 간소하고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올 때 받았던 팜플렛이며 입학 안내 책자에는 갖고 올 소지품을 최소한으로 하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생활 필수품과 학용품 등 거의 모든 것을 학교측에서 지급하며, 휴대폰 등 일체의 전자기기의 반입이 금지되어 있는 등 굉장히 까다롭기는 했지만 대신 들고 들어올 것이 거의 없어도 되니까 편하기는 했다. 사실상 맨손으로, 몸만 와도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여기는 군대나 교도소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했다. 바다 위, 조그만 섬에 있는 작은 학교에서 삼 년씩이나 갇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왔다는 자체가. 그 단어만으로도 우울한 감정을 솟아나게 해주는 고등학교와 대학입시. 그것은 사실 젊은 시절에게 내리는 유배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 유배지가 어디가 됐든 무슨 상관이랴. 차라리 집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멀리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더 좋지 않을까. 어차피 변색되고 퇴색되어 무채색인 채로 낡아가다가 언젠가는 바스라져 망각 속으로 흩어지고 말 인생의 한 페이지로 남을 시간일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