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울프
닐 게이먼.케이틀린 R. 키어넌 지음, 김양희 옮김 / 아고라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우선,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알아두면 좋을 (몰라도 상관은 없을) 사항들.
* 이 소설은 영화 베오울프와 거의 동시에 나온, '무비 타이업' 소설이다.
* 영화의 원작 소설은 아니고, 그렇다고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소설로 옮긴 것도 아니다.
* 그러나 그 중심 구성은 원전인 고대 서사시 베오울프와 굉장히 흡사하다(의외로 원작에 충실한 셈).
* 그래도 원전과의 결정적 차이점이자 제작진(작가)의 재해석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원작에서는 베오울프가 그렌델과 어미를 물리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 왕이 된 후 용과 싸웠는데 여기서는 적을 물리치고 그대로 그 나라의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는 점이다.
* 이러한 차이점이 원전과 이 소설/영화가 품은 의식, 세계관,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는 시발점이 된 셈이다. 원전이 신화, 영웅, 권선징악, 승리와 영광을 이야기한다면 소설은 나약한 인간, 슬픈 괴물, 신화시대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셈이다.
* 유명세 덕분에 닐 게이먼이 전면에 나서긴 했지만, 케이틀린 키어넌의 비중이 만만치 않다. 게이먼은 원작 영화의 시나리오와 설정만 제공하고 키어넌이 실제 소설을 썼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렇다고 글이 좋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오히려 더 좋아졌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어쨌든 둘의 공동저작이라고 보는 게 맞을 듯.

이 작품은 1권짜리 판타지라는 짧은 분량의 작품이지만 사건 자체의 중량감이 남달라 한 마디로 '굵고 짧은' 이야기가 되었다. 한 마디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1부와 2부의 사이에 3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데 구태여 설명하지 않고 자연스레 이해하게끔 만든다.

이런 특징이 우리나라에서는 특이한 위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사실상 1~2권짜리 분량의 판타지 소설은 번역작밖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나라의 판타지 소설은 대하 시리즈화되어 있다. 더구나 환협지니 퓨전이니 게임 판타지니 하여 판타지, 무협을 섞는 건 기본이고 온라인 게임과 밀리터리를 할 수 있는 한 많이 뒤섞고 패러디하고 뒤집어야 새로운 것처럼 여겨지는 흐름, 파티를 구성해서 돌아다니는 모험담에 군사를 이끄는 대규모 전쟁까지 이어지는 구성 속에서 한 영웅의 짧은 두 개의 모험만을 다루는 '심플'함은 오히려 독특해보이기까지 하다.

또한 그리스와 인도의 신이 동시에 등장하는 등 세계 각지의 신과 괴물의 이름을 마구잡이로 갖다 쓰는, 또 그래야 왠지 멋지고 특이해 보일 것만 같은 몰개성적인 퓨전 판타지의 시대에서 오직 북유럽의 세계관 하나만을 깊고 치밀하게 다룬 짧지만 우직한 '왕도' 정통파 판타지 소설이 어떤 위치를 점할지, 앞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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