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미술
박영택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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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명의 작품이 들어있는 이 책은 제목만큼이나 실제로도 꽤나 묵직했다. 책의 단면을 보아도 알록달록한 것이 많은 그림이 들어있으리라는 짐작을 했었는데 이 한 권만 있으면 그 동안 등한시 했던 한국의 현대 미술에 대해 어느 정도 섭렵할 수 있을 거란 소망에 부풀어 읽기 시작했다.

이전에 영화 평론가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같은 영화를 보고도 나와는 첨예하게 대립되거나 상이한 견해를 가지고 바라보는 그들의 글을 읽을 때면 과연 그들과 내가 같은 작품을 본 것일까? 란 의문이 들곤 했었다. 그 때는 그래도 보고 생각한다라는 과정이 있었다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보고 흡수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듯 하다. 미술 평론가의 해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며 이해하려 했지만 사실 이 과정이 생각처럼 쉽지 많은 않았다. 하나의 작품 안에 저자는 너무나도 깊이 있게 꿰뚫어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작품과 해설 사이에서 맴돌고만 있었다.


박승예의 작품을 처음 보는 순간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괴기스러운 표정으로 종이를 투과하여 나를 보고 있는 듯한 이 장면은 책을 덮고 나서도 한 동안 뇌리에 남아 잊혀지지 않았다. 이 작품은 볼펜으로 그린 것으로 작가 자신을 얼굴을 모델로 하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볼펜을 스프링처럼 원형의 선들로 만든 것으로 나는 낙서할 때 종이에 무한이 그리던 이 방법으로 이러한 작품이 완성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작가가 이 그림에 담고자 하는 내용은 내 안에 자리 자고 있는 또 다른 나를 가감 없이 나타내고자 했단다. 하나의 표정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인간의 추악한 욕망들이 드러낼 까봐 억압하고 있지만 실제 우리 모두는 이러한 모습을 감추고 있다. 내 안의 괴물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드러내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누르고 있는 모습이 나의 두 눈 앞에서 드러나 있기에 그래서 이 그림 앞에서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관객에게 무척 친절한 그림이라 평하고 있는 이 그림은 실로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듯 하다. 작가가 원하는 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언젠가는 그 시대를 풍미했던 치열한 생의 흔적들이 새로움과 편한 것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지고 있다. 그 안타까운 시간의 기록들을 사진으로나마 남기려 했던 김종엽 작가는 오늘도 달동네로 향한다. 그에게 이 곳의 풍경은 유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고 자신이 살아온 역사를 다시금 마주치게 하는 파노라마와도 같은 장소이다. 그래,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어느 새 익숙해진 빌딩과 아파트 숲만을 보고 자라온 나는 이들의 삶이 이전 세대들의 보편적인 시간들이란 사실을 생각지도 못했다. 강남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구룡마을을 봤을 때의 느낌들이 살아난다. 도심에서 자리 잡고 생을 이어나가려던 그들의 터전은 미관을 해치고 금싸라기 땅을 놀릴 수 없다는 명목 하에 사라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이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아있게 되는 날이 곧 도래하겠지.


교복을 입은 소녀는 앳되고 고운 여학생일 것이다. 어깨부터 드러난 그녀의 사진 속에서 나는 손톱에 칠한 매니큐어의 색이 눈에 거슬렸다.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듯 하면서도 길거리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네일 아트가 교복과 함께 자리 잡은 모습이 왠지 불편했다. 두발 및 복장 자유가 선언된 지금 학생들에게도 자신을 표현할 자유가 있는 것은 지당하다. 하지만 너무 빠르게 하이힐의 세계로 다가오는 그들이 나는 안타깝기만 하다.

타인의 불안 혹은 불편함을 렌즈에 담으려 하는 오형근 작가는 청소년들의 불안한 정체성이 여성적 정체성으로 연기 되는 것을 꼬집어 이 작품을 내 놓았다고 한다. 10대를 위한 색조 화장품부터 TV만 켜면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아이들의 과감한 모습들이 보고 있노라면 자못 씁쓸하게 한다. 교복이라는 보호대 속에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 그녀들을 통제하려 하지만 그 이면에 교복은 여성의 관능적 몸매를 드러내기 위해 드러내는 옷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왜 우리 사회에는 그들을 그들 나름대로의 모습이 아닌 여성으로서만 부각시키기 위해 온 힘을 쓰는 것일까? 꽃이 피기 위해서는 봉우리로 지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인내의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여 촉진제로 그들이 피어난다면 그 잃어버린 시간은 누가 찾아 줄 수 있을까.

식사하셨어요? 라는 인사에 많은 것이 담겨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에야 다이어트를 위해 밥을 굶는다지만 우리네 조상들에게 밥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밥 한 공기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는 것이다. 임명숙 작가는 밥 위에 꽃을 피웠다. 하나하나의 밥알을 그리며 그네들이 염원했던 삶을 그리고 그로 인해 생을 마감한 이들을 위로하고 있다. 제사상에 치성을 다해 흰 쌀밥을 올리는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올린 밥은 그 안에 정성과 희생이 담겨 있다. 내가 잊고 있던 밥에 대한 소중함을 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녀는 재창조 한 것이다. 밥 위에 소담스럽게 피어난 꽃. 그녀는 내일을 살기 위해 준비하는 우리를 위해 이 밥상을 준비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고양이가 좋아졌다. 이전에는 별 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만 고양이에 관한 다큐를 보고 나서부터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 듯 하다.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뉘는 고양이란 존재가 그 흑백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이 그림이 마음에 든 것은 온전히 고양이의 도도한 표정과 자세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이경미작가에 의해 재 해석된 이 그림은 안에는 수 많은 알레고리로 엮어져 있었다. 복잡하고 정신 없이 흘러가는 일상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자신을, 겉에서 보기에는 유연하게 자리 잡고 있는 듯 하지만 내면에서는 아직미 성숙된 인물을 고양이에 빗대어 그려내고 있다. 하나의 작품에 이렇게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니. 아마 저자의 해석이 없었다면 나는 그저 한 마리의 고양이에만 빠져서 나머지 부분은 버려졌을 것이다.












평론가인 저자의 시각에서는 명쾌하게 이해되는 것들이 내겐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상당했다. 전문가의 시선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 자체가 오만이었을 게다. 책을 보는 동안에 그 작품의 기반 내용이나 그 작가의 성향을 파악한 뒤에도 좋은 작품은 좋고 별로 마음이 가지 않는 작품은 여전히 미진하게 느껴졌다. 나에게는 그저 스쳐지나 가는 것들을 그들은 찰나의 순간에 그것을 잡아내고 하나의 작품으로 남긴다. 다 이해 할 수는 없다지만 한정된 틀 안에서 이것만이 미술이다! 란 벽을 산산이 부서뜨려 준 책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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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끼, 50cc 스쿠터로 유라시아를 횡단하다
권준오 글 사진 / 문학세계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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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자마자 사진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여행에 관한 책자를 보면 어느새 습관처럼 굳어진 것으로 그 안의 사진들을 통해 이 여행의 발자취에 더욱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지 속의 주인공은 이 유라시아를 횡단한 장본인으로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사람처럼 변화하는 듯이 느껴졌다. 그 공간 안에 딱 맞게 맞추어 변신하는 듯한 그를 보면서 젊은 나이에 이런 패기와 열정만으로 여행을 할 수 있는 그가 부럽기도 하면서도 시샘의 대상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스쿠터로 여행을 떠난 다는 것을 보며 그래도 일반 배낭 여행보다는 좀 더 수월하겠지 그리고 왠지 그에게는 금전적인 구속이 없이 이 젊은 나이에 훌쩍 떠났다는 사실에 배알이 뒤틀리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떠나기에는 힘든 여건 속에서 자신을 다독이며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책의 마지막을 읽고 났을 때는 나는 달려가서 그의 어깨라도 다독여 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항상 밝게 웃고만 있어 인식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며 그의 힘든 상황들을 하나의 에피소드로만 치부한 것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성장했을 것이고 나는 그의 여행을 통해서 인생을 다시금 배운 느낌이다.



언제 이렇게 파란 하늘을 마음껏 봤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비몽사몽하며 회사로 출근하여 점심시간에도 시간 내에 이동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하늘을 한 번 쳐다보는 일 조차도 쉽지가 않다. 책을 펼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의 여행이 벌써부터 부러워졌다. 나침반과 지도 한 장 달랑 들고서 스쿠터를 타고 홀로 떠나는 여행. 28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혼자 국내 여행을 떠나면서도 시간 단위로 계획을 세우고 떠나기 몇 주 전부터 철저하게 계획했던 내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지인의 말처럼 나는 여행이 아니라 극기훈련과 같이 철저히 정해진 틀 속에서만 움직였다면 그는 전반적인 큰 틀 안에서 무한히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새벽부터 자정이 될 때까지 그는 근 2년동안 쉼 없이 이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일을 했다고 한다. 대학생 때 유럽 여행가는 친구들을 보며 마냥 부러워만 하면서도 실제 그 곳으로 가기 위해 아무런 노력은 하지 않고 동경하던 나는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에게 너무나도 달콤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이 펼쳐지기에 그 간의 땀방울이 이렇게 그를 위로해 주는 듯 했다. 뜻하지 않게 여기 저기서 만나게 되는 따스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보면서 그가 가는 곳 어디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정겨움이 느껴졌다.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도 바디랭귀지로도 이미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처음 본 사람들에게도 선뜻 손을 내밀 수 있는 그들의 보며 그 간의 여행에서 나는 너무 마음을 닫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사진 속의 그들은 너무나도 여유로워 보였다. 매일은 아둥바둥하며 살고 있는 나에게는 볼 수 없는 그 한산하지만 쓸쓸하지 않고 유쾌한 느낌이었다. 우리나라도 충분히 아름답고 절경이 많다고는 하지만 나의 일상에서는 그러한 여유를 만끽할 만한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 속에 웃고 있는 그들의 일상이 내겐 너무나도 갖고 싶은 하루라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그들에겐 이미 평범한 하루이기에 별 다른 감흥 없이 지내고 있는 것일까? 사진을 보는 내내 궁금해졌다. 그리고 정말 미친 척 떠나고 싶어졌다.


터키의 중부에 있는 카파도키아. 이 곳은 만화 스머프와 영화 스타워즈의 배경이 된 곳이라고 한다. 사실 이 책을 통해서 이러한 곳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자연이 만들어 낸 곳이라 하기에는 그 형태며 크기가 너무나도 웅대하고 장관을 이루었으며 버섯 모양 같기도 한 것들이 풍화작용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라니. 시간과 자연의 힘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곳에서 만난 터키인과의 토론도 인상 깊었는데 이슬람 문화에 대한 견해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핏빛 전쟁을 일으키고 남녀차별의 근원이 되고 있는 이슬람 문화는 터키를 이 만큼 성장시킨 성장 동력이기도 하단다. 아이러니한 그 현상을 나름대로 꿰뚫어 보고자 하는 그 시간 속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두바이하면 7성급 호텔이 떠오른다. 고급스런 휴양지와 평온한 그림들만 상상했었는데 그 안에는 또 다른 삶이 존재하고 있었다. 온 몸이 타 들어 가는 듯한 뜨거운 열기 속에 건물과 건물은 내부의 연결 통로로 이어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원한 공기 위를 사뿐히 거닐고 있다.  그 창 너머로 인근의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이 시스템들은 계속 거미줄마냥 연결하고 있었는데, 전형적인 빈익빈 부익부의 현장이었다. 자본주의의 논리 아래 당연한 그림이라 하기엔 뭔가 씁쓸함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갔던 곳 중에서 유일하게 내가 가본 곳이어서 그런지 인도가 가장 기억에 남기는 하다. 아니면 그에게 가장 슬픈 도시였기에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갠지스 강에 다다랐을 때 그곳은 그들의 삶터이자 놀이터였다. 산 사람에게 갠지스 강은 성스러운 강으로서 이 강물에 목욕을 하면 모든 죄를 면할 수 있었고, 죽은 자들에게는 이 강물에 뼛가루를 흘려 보내면 극락으로 보내지는 것으로 믿었다.

모든 것이 힘든 상황을 감내하고 떠나온 여행이었지만 그는 이 곳에서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된다. 더군다나 비자 문제로 삼일장 내에 한국에는 돌아갈 수도 없이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그는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중학교 이후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그는 이 곳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 아버지를 찾아가 울겠다고 다짐을 하며 다시 길을 떠난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수 많은 풍경을 만나는 동안 스쿠터와 함께 출발한 여행에서 배낭 하나만 고스란히 되돌아 오게 된다. 모두들 스펙을 쌓기 위해서, 더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고군분투할 때 그는 혼자 홀연히 떠났다. 공부로서 자기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한 그들이나 미친 척 혼자 떠나 세상을 누비다 온 그나 누가 더 잘하고 바른 선택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기회가 왔어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수 많은 제약에 발목 잡혀 그냥 오늘을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똘끼가 존경스럽다. 단순히 미치고 허망한 것을 좇는 것이 아닌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크게 느껴진다. 나도 언젠가 이런 미친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이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잃은 것도 많다. 이 여행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고민을 해결해줄 수는 없을지언정 내가 살아가면서 겪을 아픔을 이겨내는 데는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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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시간은 갈수록 내 편이다 - 진짜 내 삶을 찾아가는 일곱 여자 분투기
하이힐과 고무장갑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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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속 그녀는 뭔가 당당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마흔이라고 하기엔 젊어 보인다지만 마흔의 그녀들에게 보고 싶고 기대하는 바는 이러한 당당하게 그들의 자리를 영위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아직 나에게 마흔이란 숫자는 10년이란 시간이 남아있다. 그 전에 먼저 서른이란 숫자에 익숙해져야 할 터인데 아직까지 낯설기만 한 것이 사실이다. 스무 살 초반만 해도 서른이 되면 무언가 자리 잡혀 있고 멋진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은 현재의 나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허함만을 감싸 자리잡고 있다. 마흔을 앞두고 혹은 그 시간 속에 있는 그녀들에게서 나는 지금의 혼란을 떨쳐버리고 재도약 할 수 있는 힘을 고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마흔이 도둑고양이처럼 조용히 그리고 갑작스럽게, 내 앞에 다가왔다. 전문성과 성숙함, 단단한 배포로 무장한 채 흔들림 없는 자기 길을 갈 거라고 믿었던 마흔이란 나이. 하지만 나의 마흔은 달랐다. 스무 살의 어설프고 나약하고 이기적인 모습에선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젊은 날의 당당함과 무모한 도전 정신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어처구니 없는 초라함. –본문

 하이힐과 고무장갑. 20대에겐 하이힐을 신고 달릴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시간들이라면 40대언저리인 그녀들에게는 하이힐에 고무장갑이 추가되었다. 도통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묘한 조합을 그녀들은 충실히 각 아이템들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들의 역할은 점점 더 늘어난다. 가정에서는 엄마로서, 부인으로서 혹은 미혼일 경우에는 딸로서 그녀들은 자신의 나이가 주는 중압감과 현실에서 요구하는 바람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들을 끊임없이 독촉해야만 한다.

마흔인 그들에게 생물학적인 여자의 의미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라지고 아줌마라는 존재로만 남아있기 마련이다. 사회에서는 상사에게는 달콤한 부하로서 부하에게는 서번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며 퇴근하자 마자 엄마로서 제 2의 야근을 해야 하는 그녀들에게 남는 것은 제로섬의 법칙뿐이다. 어느 역할에서나 척척 해 나가는 원더우먼 같은 그녀들을 원한다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매사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기엔 버겁다. 직장과 육아라는 두 개의 추를 두고 마냥 저울질만 할 수 없는 그녀들의 서글픔이 아려온다. 나는 결혼이라는 관문만을 통과하면 무언가 달달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나 보다.

튀어나온 살들을 큰 옷으로 감추듯 덮어 두고, 모른 척하고 싶었단 중년의 불안과 나이 듦의 서글픔이 어느 날 한 편의 시를 읽으며 낱낱이 내 앞에 드러났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며 중년의 흙바닥 위에 시인이 엎드린 순간 나도 그랬다. ‘물고기 같이 울었다라는 구절 앞에서는 나 역시도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나를 덮친 중년의 피곤과 허탈함에 나는, 놀랐다- 본문

세월 속에 숫자가 늘어나고 내 이름이 사라지고 수식어로 대체 된다고 해서 여자로서의 삶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대한 기대와 설렘의 순간이 아득하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그 마음들을 끄집어 내어 드러낼 시간이 없을 뿐이다. 여자로서 사랑을 원하지 않는 순간이 있을까 만은 전쟁 같이 빠르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사랑에 대해 태무심하게 만들어 버린다.

 가끔 텔레비전 속의 소재로 종종 등장하는 남편의 외도에 대한 그녀들의 견해는 한 번쯤 살다 보면 발생하게 되고 언젠가 그는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라 한다. 사실 나는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해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무던하게 기다리고 있는 혹은 그저 마음을 놓고 있는 다는 그 시간을 이해하고 싶지도 이해 할 수도 없는데, 글쎄. 연륜의 힘이란 이런 것일까? 그녀들은 묵묵하게도 이 시간을 견뎌왔고 지나왔다. 아직 터널의 입구에도 다다르지 못한 나에겐 아득히도 멀기도 하고 내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지만 과연 내 앞에 이러한 일들이 나타났을 때도 나는 처연하게, 지혜롭게 그 시간을 지나갈 수 있을까?

 내게 다가온 사랑의 세 번째 모습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 특히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의 시선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분노로 어쩔 줄 모르고 괴로워하던 마음은 나의 소유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의 사랑을 지켜보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세 번째 모습이다. 이런 사랑은 참 힘들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사랑을 하게 될 때가 온다. 그때 나는 사랑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그의 사랑을 축복할 순 없지만 말없이 지켜보고 견뎌낼 수는 있을 것 같다. 견뎌냄이 내가 나의 자유를 사랑하듯 그의 자유를 사랑하는 방법이기에. –본문

 아직 가보지 못한 마흔의 그녀들을 보며 나는 미래의 나를 보기 보다는 이미 그 시간을 지나온 엄마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엄마가 마흔이란 그 격정의 시간을 보낼 때 나는 나의 미래만을 걱정하고 있었을 뿐 그 당시 그녀의 시간은 나와는 별개의 것으로 보였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도 혹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을 테지만 매번 쳇바퀴 속 일상 속에 엄마는 엄마의 공간이 없었다. 하루 정도 가게를 본다고 외출을 감행하시는 엄마한테 그 하루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에 대하 생색을 냈었는지. 단 하루의 외출도 마음 편히 못해보신 엄마를 떠올리며 안식 휴가를 떠난 그녀의 이야기는 비수처럼 다가왔다.

 내 두통의 원인은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과 긴장이었다는 것을. 그 동안의 나는 완벽하게 내 역할을 소화해내야 내 자존심을 지키는 줄 알았다. 가족 누구에게도 힘들다고, 좀 도와달라고 손 내밀지 않는 동안 내 몸이 먼저 지쳐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결혼 안식 휴가, 많은 여자들이 생각은 하고 있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다. 내가 없으면 우리 애들은 어쩌지? 남편은? 혹시 내가 너무 무책임한 행동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대자면 백 가지도 넘는다. 떠나기 좋은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영원히 떠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

 시간이 흐를수록 고려해야 하는 문제의 폭이 더 넓어지고 있다. 마흔인 그들이 현재의 나를 보면 뭐든 할 수 있는 나이야, 나도 그 나이만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내가 지금 20대 초반의 그녀들에게 말하듯 말이다.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는 듯한 불안감이 엄습해 오곤 하지만 그녀들은 그녀 나름대로 멋지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어디든 정답은 없을 게다.

얼굴은 지나온 삶을 오롯이 담는 그릇이라고들 한다. 나의 마흔을 위해 지금부터 나의 일생을 닮을 나만의 잔을 어떠한 형태로 채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들과 많이 다르진 않을 것 같다.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고 지금과도 별 반 다르지 않을 내가 있을 테지만 나의 마흔이 기다려진다. 바둥거리며 살고 있다곤 하지만 하이힐과 고무장갑이 잘 어울리는 그녀들이 위대해 보이고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뭘 했다라는 결론은 생각하지 마라. ‘내가 하고 있다라는 과정을 즐기다 보면 결국 무엇이 되는 것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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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 도대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시인의 사랑 편지
최원석 지음 / 에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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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얼마나 달달하고 결정적인 한 마디인가. 여자라면 한 번쯤은 이 상황 속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을 상상해봤을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그 순간, 그래 나는 그 순간을 평생 꿈꿔왔고 지금고 꿈꾸고 있다.

제목과 표지만으로 나는 그의 이야기에 함께 하고 싶었다. 언젠가 이러한 날이 나에게도 올 것이라는 기대감과 그 시간에 대한 상상 속에 부풀어 책을 펼쳤다.

 누군가의 연애 편지를 읽는 다는 것이 타인의 허락하에 이루워지는, 정당한 것이라는 것에 설레였는지도 모르겠다. 관음이 아닌 당당하게 볼 수 있다는 그 호기심에 한 장 한 장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사실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점차 신비감이 사라지고 멀어지고 싶은 느낌이었다.

 한 여자를 향한 오롯한 사랑의 이야기는 나에게는 현실과의 괴리감으로 다가왔고, 나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만의 공간 속에 침입한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그로 인해 나는 그들의 시간 속에 함께 하기 보다는 거리를 두고 배회하는 인공위성 같은 처지가 된 듯 했다. 그들의 아름다운 스토리는 여전히 그들 만의 것이었고 내가 스며드는 부분이 없었다. 내가 이토록이나 차디찬 감성을 가진 것인가 란 고민에도 빠져 보았다만, 글쎄. 결론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기에 그리고 내가 공감할 수 있는 교집합의 그늘이 없었기에 라는 씁쓸한 변명만은 남기기만 한다.

 누렇게 변질되어 버린 오래된 편지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그들만의 이야기에서 나는 그들의 너무나 한결같은 러브스토리가 진부하게

만 느껴졌다. 한 인간이 아닌 마치 신에게 고하는 고해 성사와 같은 투영한 그의 글을 읽는 동안 감동이라기 보다는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 속에 읽는 동안의 시간이 너무 더디게만 느껴졌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당신의 청혼에 YES라 당당히 답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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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화가들 사계절 지식소설 4
박석근 지음 / 사계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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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눈 앞에 아름다운 명화가 있다 한 들 그것을 바라보는 두 눈에 기초적인 지식이 없는 경우 그것은 한 점의 그림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전에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갔을 때에도 세계 3대 뮤지엄이라는 명소 안에 수 많은 걸작 앞에서 나는 그저 아름답다 혹은 거대하다 등의 생각밖에 갖지 못하였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을 보면서 책에선 느낄 수 없었던 붓 터치감이나 색채가 이러했구나 란 생각뿐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곳에 가기 전에 좀 더 미술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알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미술이란 과목에 대해 필기 시험을 보는 날이면 이 그림이 어떤 시대에 탄생되었으며 그 시대의 특성이 어떠하고 대표하는 화가들은 누구이며 등 단순 암기하는 과목일 뿐이었다. 그 속에 흐름이나 왜 이러한 시대가 탄생하게 되었는지, 작가의 의도나 사상에 대해서는 고려되지 않는 부분들이었다. 그래서 인지 시간이 지나게 되면 습자지 마냥 얇게 도포되었던 지식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으며 언제나 미술이란 것은 내겐 어려운 존재일 뿐이었다.

이 책 속의 철수는 미술을 전공으로 목표하며 대학 입시를 위해 미술 학원을 다니며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 미술을 원하는지, 미술이란 게 무엇인지 제대로 인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혼란에 빠져있을 때 수상한 화가들과 시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미술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청소년들을 위한 미술에 관한 지침서와 같은 책이라고 하지만 내 눈높이에도 알맞은 수준이라 오랜 만에 책에 매료되어 본 듯하다.

이집트의 벽화는 이전에도 몇 번 본적이 있다. 그 전반적인 분위기는 익히 알 고 있었지만 그림에 담긴 포즈에 대해서는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이집트 화가들은 사람을 그릴 때 앞모습과 옆모습을 결합시켰다고 하는데 특징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부분들을 골라서 그린 것으로 한 것이다. 얼굴은 옆모습이지만 눈은 정면을 보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가슴은 앞에서 본 모습, 허리와 발은 옆에서 본 모습으로 실제 이런 자세를 취하기는 불가능 하지만 그 화가들에 있어서는 가장 완벽한 사람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영향은 그리스의 조각가들에게도 오랜 동안 미치게 되는데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 인간의 생동감을 불어 넣은 작품이 폴리틀레이토스의 창을 든 청년이라고 한다.

그리스 신전이나 피라미드. 비너스 상에 반영된 황금 비율이 현대에 와서 밝혀 지는 것들을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에 이토록 철저한 비율을 적용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작품에 대한 열정을 기반으로 한 끊임없는 실험과 도전정신 덕분이었으리라. 8등신의 법칙이 적용된 밀로의 비너스는 현재 두 팔이 사라진 상태라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편안하면서도 아름다운 비너스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이 걸렸을까?





노트르담의 꼽추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배경이 되는 성당이 이토록 아름답고 그 안에 수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을 줄은 몰랐다. 아마 실제로 가서 본다고 해도 웅장하고 견고한 장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겠지만 내면에 담긴 알찬 의미들은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성당의 정문에 조각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는다면 하나의 장식으로 눈길 한 번 주고 지나쳤겠지만 수상한 화가에 의해 최후의 심판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맨 위에는 죽은 자를 심판하려는 듯한 예수가 엄숙하게 앉아 있어. 그 아래에는 천사 미카엘에 의해 저울질된 영혼의 무게에 따라 천당 행과 지옥 행이 결정되는 모습이 표현되고 있고, 맨 아래에는 죽은 사람들이 천사들의 트럼펫 소리에 깨어나 관 뚜껑을 열고 일어나 심판대로 향하는 모습이 있지

근데, 왜 입구에 이런 내용을 조각한 건데요?”

이곳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이는 최후의 심판을 떠올리며 마음가짐을 다지고, 지은 잘못이 없는지 돌아보라는 의미인 거지. 그만큼 이곳은 신성한 공간이니까.” –본문

라오쿤 군상. 이 작품이 기원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라오콘과 그의 아들을 두 마리의 바다뱀의 공격을 받고 있다.  독뱀에 물려 죽는 순간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을 보며 실감나는 표정을 보며 대리석으로 어찌 이렇게 조각할 수 있었을까 란 경이로움을 느꼈는데 사실 이 작품은 그것보다도 기존의 생각을 깨고 탄생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미술의 역사에도 기틀 위에 새로이 시도되는 도전 정신이 점차 새로운 장르를 만들고 그러한 도전이 또 다른 역사로 연명되는 것을 보면 현재의 진화가 역사의 주춧돌이 되는구나 란 생각이 든다.

 기존의 생각에 의하면, 신화의 한 장면을 상상해서 그리는 것은 미술의 일이 아니었어요. 현실에 있는 것을 화폭에 옮겼죠. 그러나 <라오콘 군상>은 현실에 없는 것, 즉 신화 속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서 작품을 제작했어요. 뿐만 아니라 인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전통에도 반기를 들었어요.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끔찍한 순간을 꾸미거나 미화하지 않고,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했어요.” –본문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절친한 친구가 어느 날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고 온 소감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선 순간 모든 사람들이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경이로움에 푹 빠져서 봤다고 했다.높이 14미터, 13미터에 400여명이나 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는 내용을 보면서 그 크기에 압도된 것일까 란 생각을 했었는데 7년이란 시간을 들여 이 작품을 제작한 미켈란젤로의 집념이 오롯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물 하나하나의 표정이며 생동감 있는 모습들, 인간의 욕망을 그림으로 완전하게 표현한 그의 작품을 보며 그는 이 거대한 화폭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완성한 것이리란 생각에 존경스럽다 란 마음과 실제 이 작품은 두 눈으로 보고 싶다 란 생각을 간절히 갖게 해주었다.

밀레의 만종은 감자를 수확한 그들의 평화로운 농촌의 모습을 그린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바구니 안에 있던 것은 감자가 아니라 갓난 아이였다고 한다. 바쁘고 고된 일상 속에 아이를 차마 마저 일터로 데리고 와서 일을 해야 했던 그들의 서글픈 일상이 담겨 있는 것이란다. 그래, 그제서야 이 두 남녀의 뭔가 서글픈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감자를 수확한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아닌 자신들의 처지의 비관은 아니지만은 자신의 아이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그 아이도 계속 이러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그 안타까움이 서려있는 듯 하며 이전에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너무나도 유명한 마네의 풀 밭 위의 점심식사’. 여자만이 누드화로 나타나 있어 이색적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는 그 당시 시대에 있어서는 커다란 논란이 된 작품이라고 한다. 비단 여자의 누드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꼬집는 풍자적인 내용의 작품으로 이 전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비너스가 아닌 경우 외설로 치부했다고 한다. 비너스의 누드는 아름답고 경건하지만 그 이외의 누드는 외설이라고 보는 시각은 다분히 흑백논리 적인 사고 방식으로 그러한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관람객들을 향해 벌거벗은 여자는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장면이 외설로만 보이는가? 란 질문을 하는 듯이 말이다. 또한 이 그림은 남자 관람객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그 당시의 중산층 남자들에게도 아내 이외의 애인을 두는 것이 사회 전반적인 흐름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그려져 있으니, 그들은 마네의 그림을 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이중생활을 덮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마네를 비난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거란 생각에 미치자 마네의 대범하고도 철저히 분석적인 작품 속 그의 손길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나는 피카소의 작품을 보면서 그가 유명하고 위대한 작가라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그의 작품을 이해한 적은 없는 듯하다.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면서도 매혹적이기 보다는 뭔가 조각조각을 내어 다시 이어 붙이기를 한 듯한 느낌에 어색하기만 했었는데 이것은 그가 입체주의로 들어설 것이란 전주곡과 같은 작품이라고 한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 원근법도 없고 인간의 이상적인 형태도 사라진 이 작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원근법이란 하나의 방식만이 아닌 것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기원전의 이집트의 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는 이집트의 벽화 속 모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변화를 시도하게 되며 이러한 시도는 게르니카라는 작품에서 여실히 들어난다

전쟁의 비참함을 다룬 작품이라고 하지만 그림만 봐서는 꽤나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다. 무차별 폭격에 의해 무너진 마을 안에서 자신의 아이를 울부짖으며 찾는 아이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마냥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황소, 놀라 비명을 지르는 사람까지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마을의 풍경 안에서 당시의 고통과 비극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자신이 실제 겪은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분노를 가득 담아 이 화폭을 완성하게 된다.

화가는 내면이 눈으로 사실을 보고, 그 느낌을 캔버스에 표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비극을 나의 비극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감성이죠. 비록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현대 사회에는 그러한 자세가 무척 중요할 거예요.” –본문

뒤샹의 샘이란 작품은 또 한번 미술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산산이 깨뜨렸다.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그리거나 만들어 낸다든지 혹은 그 안에 자신의 신념을 담고 새로이 창조해야 하는 것이 예술에 대한 나의 견해였다면 뒤샹은 그러한 생각에 빠져 주변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 변기를 통해서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 소변기라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 쓰임새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있기에 이 물건은 아름답다기 보다는 생활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물품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면 뒤샹은 그 안에서 고정관념을 탈피하면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물건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예술가는 더 이상 작품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이오. 이미 완벽하게 아름다운 형태를 갖춘 기성품이 있는데 굳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 필요가 없지.” –본문

이 한 권의 책으로 인해 내가 미술사를 통달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중세시대에는 어떠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어떠했으며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의 단어에 발목 잡혀서 알아봐야겠단 시도 조차를 포기하려 했던 비관적인 자세는 벗어날 수 있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로의 시간 동안 이상한 미술가들을 따라 여행하면서 미술에 관한 전반적인 흐름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되면서 다른 작품들에 대한 관심마저 가지게 되었다.

미술이라는 영역뿐만 아니라 현재의 모든 것들은 이전의 것들에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도전 정신으로 만들어진 결과일 것이다. 미술에 관한 이해를 돕고자 읽게 된 책 한 권이 이 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신호탄 같은 역할을 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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