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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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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구글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알파고와 이세돌과의 바둑 대국이 진행될 것이라는 기사를 볼때만 해도 그 어떠한 관심도 없이, 아직은 인간의 두뇌가 인공지능을 뛰어 넘을것이라는 당연한 믿음에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첫번째 경기를 넘어 계속된 알파고의 승리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자 기술의 발전이, 인공지능의 발전이 이토록 빠르게 인간을 턱밑을 스쳐 오르고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우면서도 여느 SF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는가 싶더니만 뉴스에서는 조만간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인 인공지능으로 대부분의 직업군이 대체되어 인간의 설자리는 곧 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며 조만간 1가구 1로봇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뉴스마저 왠지 탐탁지 않게만 느껴졌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렇게 복잡미묘한 시대 속에 놓여 있는 우리는 어느 새 또 그 날의 뜨거웠던 충격에서 벗어나 오늘이라는 현실에 매진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던 찰나 구병모작가의 이 <한 스푼의 시간>이란 신작을 만나게 되었는데 세탁소에 살게 된 로봇 소년을 다른 이야기가 이번 소설의 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이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도 기대감이지만 로봇에 대한 왠지 모를 반감 혹은 두려움을 안고 있던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한 외경심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고도의 기술이 총 집합된 로봇과 인간의 이야기라니. 과연 그 둘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녹아들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을, 책을 펼친지 10분도 되지 않아서 깨닫게 되었으며 그렇게 책을 순식간에 읽어내리고 나서 로봇과 인간을 넘어 그들이 만들어내는 따스한 이야기에 살포시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진다.
외국어가 되어놔서 확실치 않은데, 라고 단서를 달며 기사입에서 더듬더듬 나오는 건 외아들의 이름이다. 아들이 아비를 위해 뭔가를 보낸 게 이상한 일은 아니나, 문제라면 아들은 8개월 전 자신이 살던 나라에서 또 다른 나라로 출장길에 오르던 중 승객 117명을 태운 비행기와 함게 태평양 한가운데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소식이 난 지 보름 뒤 바다에서 비행기 잔해가 일부 발견되었고 아비는 따로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 아들이 보낸 택배라니. -본문
어느날 명정에게 도착한 거대한 택배 상자는 각자의 사연 만큼이나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다가구 주택이 밀집되어 있는 고만고만한 삶을 사는 이웃인 세주의 도움을 통해서 믿고 싶지 않았던 아들의 죽음을 그제서야 제 손으로 택배를 뜯으며 받아들이게 된다. 이 아스라히 무어라 말을 이을 수 없는 현실을 너무도 담담히 그려지고 있는 이야기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보자면 자국민이 아니라 타국의 사람이 되어 버린 제 아들의 죽음을 이 나라에 아무리 요청해보았다 한들 번거로운 확인절차 속에 시간 낭비라는 듯 외면하고 있던 국가를 대신하여 한 때는 이 나라의 국민이었던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개개인이 확인하고서야 그 먹먹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을 보노라면 씁쓸함이 밀려들게 되는데, 어찌되었건 명정은 이 택배 박스를 받아들고서 이제는 더 이상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또 다른 마음앓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심심한 위안과 함께 아들이 보냈다는 박스 속 로봇과 함께 하는 나날이 펼쳐지게 된다.
은결이 이진법을 이용하여 N팩토리얼에 이르는 횟수에 연산을 수행하고 N의 자리에 얼마나 큰 자연수가 들어가더라도 결코 해결하지 못할 난제를 내주었다고 생각하곤, 명정은 콧노래와 함께 다시 다리미질을 시작한다.
그리 오래지 않아 이런 장면에 익숙해지고 시들해지겠지만 당분간 즐길 거리 정도로는 충분하다.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주고받을 상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늘 같은 자리에 떨어져 심장에 구멍을 내던 물방울의 낙하 방향을, 조금이나마 바꾸었다는 것은. -본문
사람과 너무도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는 로봇소년 은결을 두고서는 SNS을 넘어 각종 신문기사와 미디어까지도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덧 은결은 일상 속의 한 페이지로 자리잡아 이제는 명정과 함께 세탁소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담한 세탁소라고는 하지만 오랜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의 세탁소에는 시호와 준결처럼 은결을 보러오는 학생들의 모습도 있고 세주네의 이야기와 이웃들의 이런 저러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마을의 소통의 출입구와 같은 모습인데 그렇게 하루하루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가는 동안 은결은 점차 인간의 행동과 생활 패턴, 언어 등을 통해 분석하고 인식하며 점차 사람 향기가 나는 로봇으로 변화하게 된다.
처음에는 생경한 것이 호기심이 일었던 것들이 어느새 익숙해져서 평범한 일상으로 변모해가고 그것이 점차 닳아가는 은결을 바라보던 시선은, 세탁소 오기 전 새것이었던 옷들이 명정와 은결이 있는 곳에 왔을때에는 얼룩이나 구김이 온 채로 도착을 하고서는 그것들을 최선을 다해 새것과 같은 상태로 돌려놓으려 그들은 옷감을 안고서 고군분투하지만 그 횟수를 그 옷은 처음에 산 새옷이 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건 그럼에도 우리는 그 옷을 계속 입고 지우고 다시 입고를 반복하는 것처럼, 이 안의 이야기들은 그럼에도 자신의 삶 안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안고서 계속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굴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출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본문
예전에 사촌언니와 이야기를 했을 때, 손 언저리에 난 상처를 바라보던 내 눈빛을 읽었는지, 어디서 놀다 들어와서는 다쳤다고 보여주는 아이의 손을 보며 자신의 몸 안에서 완벽한 상태로 내어 놓았던 아이가 하나 둘 몸에 생채기가 생기는 것을 바라볼때면 그렇게 마음이 아플수가 없다고 읊조리던 모습이 세주와 시호, 준교의 이야기를 보며 오버랩되어 나타난다.
공부를 하고 싶지만 그의 앞에 드리워져 있는 현실은 늘 그를 옥죄고 있기에 대학에 가서도 매번 힘겨운 사투를 버리고 있는 준교, 이 마을을 떠나 훨훨 날아간 것으로 보였으나 아이와 함께 돌아와 전 남편과의 지리부진한 싸움 속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세주, 하루하루의 벌이로 살아야만 했던 그녀에게 철학과의 진학은 힘겨운 선택이었다는 듯 늘어가는 아르바이트 속에서 마주해야만 했던 폭력 속에 시달리던 시호.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명정과 은결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당면한 모습들을 제 3자의 눈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인사치레의 말들과 무언의 행동들, 어떠한 사건이 발생되었을 때 하는 익숙한 몸짓이 고도화된 기술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은결의 모습을 통해 다시금 인지해가면서 그 하나하나의 시간들이 축적되어 점차 로봇과 인간이 아닌 인간 안에 함께하는 소년으로 변해가는 은결의 모습이 전해진다.
그는 어쩌면 아이가 자라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완전히 멈출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이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수도 있다.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본문
우주의 시간으로 보았을 때 한 인간의 수명은 세제 한 스푼이 녹아내리는 찰나의 시간이지만 그 찰나의 시간을 보내는 그들은 그들 어제의 흔적이 그들에게 남아있다고 해도 다시금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 찰나의 시간을 함께 보낸 은결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이 총집합된 기계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넘어서 마지막에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 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우리네 인생을 한 편의 드라마로 바라본 느낌이라 애잔하면서도 그 안에 따스함이 밀려들게 된다.
언젠가 로봇과 함께하는 나날이 온다면 은결의 모습을 한 이들이기를 바라본다. 인간의 손을 거쳐 탄생하게 될 그들이, 자국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내는 살상무기가 아닌, 인간의 심장을 닮은 감성을 담은 그들이 되어 오기를, 그리하여 우리네 삶을 조금 더 따스하게 함께해가기를 바라본다.
독서기간 : 2016.09.1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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