뢰델은 호스를 내려다본다. 검은색에 길이는 1미터 남짓하고, 추위에 뻣뻣하게 굳어 있다. 몇 초 지났을까 싶은 시간이 베르너에겐 몇 시간은 지난 것처럼 느껴지는데, 얼어붙은 잔디 사이를 바람이 가르며, 사이렌을 울려 대는 서풍과 눈발을 설원 너머로 몰아내자, 갑자기 졸페라인을 향한 그리움이 그의 마음속으로 파도쳐 흘러 들어온다. 오후가 되면 검댕으로 얼룩진 밀집 지역을 정처 없이 오가며, 어린 여동생을 수레에 태워 끌고 다니던 소년 시절의 오후. 뒷골목 쓰레기, 작업반 인부들의 목쉰 고함 소리, 벽에 코트와 바지가 걸려 있는 공동침실에서 완전히 곯아떨어진 소년들. 자정 녁 침상 옆을 천사처럼 지나가며 중얼거리듯 말하던 엘레나 아주머니. –본문
그리고 그들과는 또 다른 전쟁의 가해국의 입장에 속해 있는 베르너는 작은 체구와 흰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다. 광부였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동생 유타와 함께 아이들의 집에서 살고 있는 그는 라디오를 듣고 세상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라디오를 좋아하는 만큼 라디오를 고치는 대에도 으뜸이었던 베르너는 그가 가진 재주를 높이 사는 이를 만나게 되면서 광부가 아닌 군사 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그 안에서 만난 친구 프레데리크가 약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구타를 받으며 일어날 수도 없는 지경에 빠지는 것을 보고서는 끔찍한 학교의 현실과 친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 살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베르너는 나이를 속였다는 이유로 전쟁에 강제 징집 당하게 되는데 이 과정 속에서 프랑스의 소녀 마리로르와 독일의 소년 베르로가 만나게 된다.
전쟁터로 징집된 베르너는 주변에서 비밀리에 전해지는 송신들을 찾아내어 보고하는 임무를 맡게 되는데 전쟁의 참혹함과 광기 어린 현상이 그의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지게 된다. 독일군과 그들을 포위하려는 연합군과의 대치 속에서 어린 베르너는 호텔의 지하에 고립되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 어린 시절 그가 들었던 방송의 주파수를 들으며 마리로르의 목소리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동료의 도움으로 겨우 호텔에서 탈출한 베르너는 마리로르의 목소리를 찾아 생말로로 향하게 되지만 마리로르 역시 롬펠의 포위망 안에서 점점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질 위험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와 엔티엔 작은할아버지와 마네크 아주머니와 이름이 베르너 페닝이었던 그 독일 소년이 왜가리처럼, 제비갈매기처럼, 찌르레기처럼 무리 지어 다니며 하늘을 들쑤실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혼을 실은 그 거대한 셔틀이 주변을 날아다닐지도 모르며, 희미하지만 귀를 바짝 가져다대로 들으면 들을 수 있다는 것을?(중략)
그녀는 생각한다. 매시간, 전쟁을 과거의 기억으로 간직한 뿐인 누군가가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본문
베르너와 마리로르가 마주할 수 있었던 그 짧은 찰나를 보며 그들의 바람대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저 모든 사람들이 조용히 어느 한 장소에서 숨어서 지낼 수는 없었던 것일까, 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아니, 전쟁이 발발되지 않았더라면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물론 그랬다면 이 아련한 이야기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 먹먹함을 느끼기 보다는 당시의 수 많은 사람들의 웃음이, 그리하여 그 평범한 나날들의 그들의 앞에 펼쳐졌더라면 이 아득함은 애당초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앞이 보이지 않는 마리로르는 그 나름의 삶을 아버지가 이끄는 손을 따라 지냈을 것이고 베르너 역시 광부가 되었던 아니면 또 다른 인생을 지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만났을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전쟁 속에서 모두가 피해자의 자리에 서서 아련하게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랐던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왜 이 시간 속에 그들이 있어야만 했는지 서글픔이 밀려든다.
한 세대가 지나고 나서 마리로르가 서 있는 현재의 모습 속에서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그들에게 그저 역사 속에나 등장하는 이야기로만 들리고 있다.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그날들이 다시금 걸어오며 그 아득했던 시간을 건너 온 그녀가 전해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 안의 이야기들은 한동안 오랜 여운으로 내게 남아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