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의 시간
도종환 지음, 공광규 외 엮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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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s Review

 

읽고 읽다 보면 어느 새 멍해져서 머리와 마음이 굳어져가는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웬만한 글을 읽어도 마음이 동하는 경우가 없는 듯 하다. 그저 지식의 한줄기를 얻었다는 순간의 감격이나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는 찰나의 감정들뿐,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지 못해 과연 이대로의 독서가 옳은 것인가, 에 대한 나름의 고민들로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묵직한 무언가가 덜어지지 않던 요즘, 나의 이 문제를 도종환 시인의 이야기들로써 조금은 덜어낸 듯 하다.

 좀처럼 시를 읽지 않는 나 역시도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은 그의 이야기들은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마도 지나가다 보았다 한들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에 나의 그릇은 아직 편협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읽어 내려가는 그의 이야기들은 여름날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온 몸을 적시는 것이 아니라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처마 끝의 빗줄기처럼 그렇게 나에게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 작은 울림들은 기어이 가슴 속 한 쪽을 시리게 만든 것이다.

<진눈깨비>로 시작하는 이야기부터 무언가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누이동생이 죽은 아이를 낳던 날 밤
 
진눈깨비가 내렸다.
 
영농기계대금이 밀려 보건소 언저리도 못 가보고
 
손바닥만 한 목숨을 얼어가는 풀뿌리 밑에 묻고
 
씻기지 않을 새벽 노을을 손에 묻힌 채
처가집 더부살이 더욱 기 꺼인 매제는 
 
도시락도 없이 재건조장 일을 나갔다. –본문 

이 안의 운율이든 심상이든, 함축적 의미든 시를 마주하면 꼭 알아야만 했던 모든 것들을 넘어서 그저 그날의 먹먹했던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 작은 생명에 손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차디찬 땅에 다시 묻어야 했을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돈이라는 몇 장의 지폐가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쓸쓸히 아이를 떠나 보내야만 했던 그들의 마음은 어두운 날 내리는 진눈깨비조차 아프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 눈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검은 고통으로만 밀려들었을 테니 말이다.

<조센 데이신타이>라는 시를 앞에 두고서 데이신타이가 무슨 말인지를 찾아본 순간 정적이 흐르게 된다. ‘조선 정신대의 일본어 발음이었던 데이신타이를 앞에 두고서는 그 영겁의 시간을 지나왔을 그녀들에 대해서 무어라 아무 말도 없이 숨어서 안타까워하는 나의 모습에 부끄럼만이 타고 오르게 된다.


관광 비행길 타고 제주도에 서울에 내려
 
사업인지 합작투자인지 꽃 같은 이 나라 처녀
 
몇 년이고 몇 달이고 데불고 살다
 
버리고 달아나도 또 오십사 뱃길을 열어주고
누구하나쓰다달단 말 한마디 없다믄요.
 
내 살 깊은 곳 찌르고 간 식민지의 낙인 하나
 
아직도 살갗에 흰 머리에 두터웁게 만져져요.
도라지꽃 우리 인생 꺼낼 말이 있을까만
 
그늘 속에 평생길 한번 피도 못한 도라지꽃
 
죄 없이 약한 저희더러 누굴 용서하라 하시나요. –본문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의 욕망의 그늘 아래 철저히 짓밟혀야 했던 여리디 여린 그녀들은 쓸쓸히 죽어가야만 했다. 아리따운 소녀였던 그녀들은 부모의 보살핌 아래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던 이들이었지만 이곳에서 그녀들은 삭풍에 바람 들어 손만 스쳐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적막 속에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그들의 노리개로 죽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눈을 감는 순간마저도 자신의 머리칼 만이라도 고향의 품에 전하고 싶었던 이들은 죽어야만 이 모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살아나 다시 제가 낫던 품으로 돌아온다 한들 그 누구도 그녀들을 반기지 않았다. 힘이 없던 나라의, 시대의 잘못이 아닌 마치 그녀들의 잘못인 냥 살아 돌아온 이들을 바라보며 환대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삶을 부끄러워했으니. 그녀들은 우리의 품으로 돌아와 또 한번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지나왔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그가 마주했던 제자들에게 하는 이야기들과 자식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들을 보노라면 이토록 따스한 이에게 가혹한 시간들만이 허락되는 것인지 가슴이 아련해진다.

모순투성이의 날들이 내게 오지 않았다면
 
내 삶은 심심하였으리
 
그물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지 않았따면
 
내 젊은 날은 개울 옆을 지날 때처럼 밋밋하였으리 무료하였으리
 
갯바닥 다 드러나도록 모조리 빼앗기고 나면 안간힘 다해 당기고 끌어와
 
다시 출렁이게 하는 날들이 없었다면
 
내 영혼은 늪처럼 서서히 부패해갔으리
 
고마운 모순의 날들이여
 
싸움과 번뇌의 시간이여 본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스란히 받아들여 다시 지금의 활자로 삶을 농축시켜 전해주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 짧은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처연한 마음이 들게 된다. 그만의 묵직함이 때로는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글을 읽는 내내 내게는 깊은 울림을 주었기에 그의 다른 이야기들도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다.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글을 마주했던 시간이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독서 기간 : 2014.12.23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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