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다. 건설 현장감독이었던 배리마틴은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서 철거 작업도 진두지휘해야했고 그 철거 대상의 주택에 살고 있는 이디스 할머니와의 이야기는 그들이 놓여있는 모습만 보아도 서로 으르렁 전혀 어울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조합이었다. 철거를 해야하는 이와 철거를 거부하며 지내는 이들이 어찌하여 따스한 정을 나눌 수 있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하려는 찰나,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하면 할 수록 절대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들은 서서히 서로의 삶을 마주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시위대를 마주하며 온 몸으로 막고 있는 전투경찰을 보면서 어쩌면 그들이 이 공간이 아닌 다른 곳이었더라면 서로 따스한 웃음을 나누며 있을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을 말이다. 서로 이해관계 속에 있기에 서로가 서로를 겨누고 있다곤 하지만 사실 그들의 모든 것을 내려 놓으면 함께할 수도 있을텐데, 라는 막연한 상상은 이디스와 배리에 의해서 현실화 되게 되는데 하나의 집이 아닌 그녀의 마지막 염원이 담겨 있는 소원과 그녀가 지나온 삶에 대해서 나누면 나눌수록 배리는 이디스의 집을 허무는 것을 멈추고 오히려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며 그녀와 함께 서 있게 된다.
"어머니가 바로 여기, 이 소파에서 돌아가셨어."
그녀가 말했다. 눈에는 다시 눈물이 글썽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건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기 위해서였어. 어머니는 늘 어디 '시설'이 아니라 꼭 지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사셨지. 그렇게 해준다고 약속하라고 해서 난 그렇게 했어. 어머니가 바로 여기서 돌아가셨어, 배리. 그리고 이젠 나도 여기서 죽고 싶어. 여기 있는 내 집, 이 소파위에서." –본문
꼬장꼬장하고 툴툴거리기 좋아하는 할머니로만 보여졌던 이디스는 점차 배리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집 앞 문턱을 넘어 가면 갈수록 그녀는 세상과 담을 쌓으며 지내는 이가 아닌 변화에 대해서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하는, 그러니까 현재의 시대를 함께하고 있는 이였다. 그녀가 이 집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작은 소망이자 마지막 바람이었을 뿐이며 건설업체에서 내미는 수 많은 금액의 돈은 그녀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일 뿐이었다. 그녀는 그저 이 집을 원했던 것 뿐이었으니 말이다.
이디스가 배리에게 점점 마음을 열어가면 갈수록 배리 역시 이디스를 보며 그의 가족들을 떠올리게 된다. 점차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아버지와 그가 꾸리고 있는 가족의 이야기가 함께 이디스의 삶이 중첩되어 비춰지게 되는데 특히나 이디스가 품고 있는 이야기들은 그녀가 담아 놓은 소설을 넘어 점점 더 깊이 하게 되면서 함께하는 삶에 대해서, 누군가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이따금 사람들이 왜 그랬냐고 이유를 묻는다.
이 편지가 내 대답이다.
우리는 할 일은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이해하고 배우기를 바라는 건 그 다음 문제다. 자식이 부모의 말이나 행동을 무시한다는 기분이 들 때, 사실은 그들이 항생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있는 것임을 깨닫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이 없다.
인생에 그것보다 더 큰 행운은 없다. –본문
애니메이션 UP의 원작이었다는 이 이야기가 판타지와 같은 꿈이 아닌 우리의 삶에서도 쉬이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이기에 더욱 따스하게 빛나는 것 같다. 그들의 이야기가 실제했기에 우리 주변에도 이들과 같은 따스한 우정이 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훈훈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