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페이지의 책을 넘겨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 이야기가 어떠한 느낌이겠구나, 라는 것이 전해진다. 틈틈이 조금씩 읽어오던 것이 습관
아닌 습관이 되어 버린 지금,
몇 페이지가 아니더라고 몇 줄의 글만 읽어도 이 책이 나에게 쉽게 다가오겠구나, 아니면 버거운 것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 처음 마주한 누군가의 글이 몇 줄의
이야기만으로 느낀다는 것이 글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그들에게 외람되며 경솔한 것들이겠지만 <토우의 집>을 통해서 처음 마나게 된 권여선 작가의 이야기는 따뜻하면서도 내가 겪어 보진 못했지만 오래된 앨범이나
책장에서 마주한 이야기 같은 느낌이라 그렇게 속력을 내어 읽어보고 싶은 이야기로 다가왔다.
띠지에 적힌 '삼벌레고개'의 어린
스파이들이 자라는 법이라는 말만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그 아래에 적힌
'긴긴 성장통과 함께 써내려간, 고통에 관한 고백'이라는
글을 책을 다 덮은 후에 마주한 순간, '아, 이것이었구나'라는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였다.
아직 손떼 묻지 않은 아이들이 마주해야만 한 시리디 시린 현실 앞에서 아무말 없이 아린 가슴을 덮어야만 하는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파이가 되기 위해 주변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던 원과 은철이 왜
그들만의 고통의 방 안에서 살아야만 했을까.
좋은 스파이와 나쁜 스파이를 구분해서 복수를 해야 한다는 구실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던 꼬마 전령들이 웃는 것을 보지 못한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밤이면
동네 사내들이 술추렴을 하러 모여드는 박가네 가게 평상을 둘러싸고 기묘한 삼각편대로 자리 잡은 이들 세 사내와 어린 스파이들이, 말썽쟁이 남자들이 모두 부재하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낮 동안에 사벌레고개 중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이었다.
–본문
지금보다 더 복작거리며 수 많은 이들이 지내고 있던 동네이지만 누가
누구이며, 누구네 아들이
성공을 했다든가, 혹은 어느
집에 우마가 끼었다는 소식이 현재의 찌라시보다도 빠르게 퍼지던 마을 안에 우물이 있는 집의 계주였던 순분의 집에 사람들이 오가며 한바탕 동네의
이야기를 퍼다 다를 때만 해도 그저 평범한 예전의 마을 모습들을 전해주는 것이려니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것일까. 은철의 말마따나 원의 동생 희가
나타난 순간부터 서였을까.
아니면 호기 어린 마음에 시작한 금철의 장난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순분이 떠들었던 새댁의 시누이의 슬픈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올린 탓이었을까.
우물 속의 아흔 세명의 망령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던 원과 은철의 이야기가 진정 불행의 씨앗이 된 것처럼 이들에게
드리우는 불행의 서막은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며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은철은 차창에 다가가 정면을 보고 안아 있는 원의 옆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원은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은철은
알았다. 자기가 병실에서
느꼈던 것처럼, 원도
날카로운 고통이 사방에 철장을 두른 작은 방 속에 갇혀버렸다는 것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그 방에 원 혼자 갇혀 있다는 것을. –본문
더 이상 혼자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은철은 이제 혼자 화장실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금철은 은철에 대한 사고
이후에 자신의 행실을 점차 다잡아 가고 있다.
순분은 그 동안 자신이 퍼다 나른 이야기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들이었는지에 대해 깨닫고서는 이제는 그 어떠한 이야기들을
제 입으로 전하지 않는다.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덕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길을 떠나면서 영과 원에게 따스한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지는 모르나 그 일로 정신을 놓아버린 새댁이 다시 기운을 차려 아이들에게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그래, 그 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겠지만 나는
그들에게도 희망이라는 빛이 다시금 드리울 것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열린 결말에 대해서 늘 편견어린 시선으로 불만을 표했던 나로서는
오늘의 이 이야기의 끝이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에 새삼 다행이다, 란 생각을 감히 하고 있다.
그들의 마지막은 나지막한 위안이 전해질 것이다. 새로이 시작한 그들의 이야기는 다시
찬란한 봄으로 되돌아가 그들만의 방이 아닌 세상 속에 담겨 질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원과 은철,영과
금철, 새댁과 순분에게도
다시금 그들만의 봄이 전해져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