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며 ‘아, 이 문장들이 나에게서 나온 것들이라면.’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도무지 나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문장이겠지만, 이 글을 읽으며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는가, 라는 생각과 이러한 표현을 나타낼 수 있는 그들에 대한 존경심과 외경심은 물론 언젠가는 내가 이러한 문장들을 만들어 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신나게 읽어 내려가곤 하는데 이러한 책을 만났을 경우에는 이른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즐겁게 페이지를 넘기게 되니 이 <향기>는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해서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 마주한 ‘필립 클로델’은 이전에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서도 이 한 권의 책을 통해서 그에게 제대로 매료됐기에 그의 책들을 하나 둘 장바구니에 담으며 뿌듯해하고 있다. 냄새와 기억에 대한 삶의 순간 순간을 기록해내는 그의 이야기는 그저 글을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 빠져들게 되며 하나의 이야기를 쫓아 그의 기억 속으로 함께 들어서게 된다.
전기 면도기가 손가락 사이에서 팽팽히 당겨진 피부를 따라 미끄러진다. 같은 곳을 여러 번 지나가 반들반들해진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긴다.
놓치지 않고 계속 바라보는 내 눈길을 따라 아버지는 점점 더 젊어진다.
지난 밤, 아버지를 늙게 만들어 나에게서 빼앗아 가려던 수염, 잠자는 동안 아버지의 얼굴에 내려앉았던 수염, 흰색과 회색과 잿빛이 뒤섞인 그 수염이 사라져간다. –본문
어릴 적 아버지가 면도하는 모습을 보며 따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무심코 면도기를 들었다 어김없이 얼굴에 생채기를 남기고서는 그 범죄의 현장을 무마시키기 위해 꽤나 오랜 시간 휴지를 돌돌 말아 지혈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에게 아버지의 면도는 넘을 수 없는 선을 넘기는 대가를 톡톡히 알려주고 있었고 그 이후에는 면도하는 아버지를 본다 한 들 그저 무심히 바라보며 넘기곤 했는데 그 순간을 저자는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수염이 사라지며 점점 더 젊어지는 아버지를 보며 그는 어떠한 생각들을 떠올렸을까. 면도기가 아버지의 얼굴을 지나갈 때마다 내가 보고 있던 아버지는 몇 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한 그 마법의 순간을 보며 그는 경이로움을 느꼈을 것만 같다.
식은 양배추는 가장 잔인한 암살자와 같다. 항상 무언가를 남긴다. 범죄의 흔적을, 움직이지 않는 연기를. 증거를 인멸할 생각을 못하는 서툰 살인자다.
또한 그 누구라도 사랑하지도 방문하지도 않는 노인들의 냄새다.
죄수의 냄새. 양로원과 유치장을 떠나지 않는 냄새.
양배추는 거대한 유페의 공간을 받아들여 길고 짧은 형벌과 삶의 종말을 홀로 알고 있는 듯 하다.
파괴된 삶, 감시받는 삶, 질식할 것 같은 삶, 망가진 삶, 부서진 삶,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까지도. 본문
양배추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해서 잔상이 남아있는 부분이었는데 샐러드를 만들어 먹거나, 찜 요리에 사용하는 것이 전부인 양배추에 대해 이토록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라는 생각에 상념에 빠져본다. 양배추가 낯설어서 그런 것이라고 해도 매일 마주하는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를 보면서도 나는 그 어떠한 생각을 떠올린 적도 없기에 무언가 곤궁의 신분을 대변하는 이 양배추에 대해 애증 어린 시선을 조아리는 그의 고백은 생경하지만 그 생경함이 점차 반색이 되어 나타나게 된다.
현재 양배추가 그의 곁에 없으면서도 곁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흔적을 남기는 양배추의 향은 그로 하여금 학창시절 교실 내에서 자신에게만 풍기는 그 향이 가끔은 주변의 시선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는 다시 양배추를 찾고 있었으며 이것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변하지 않은 익숙함으로 남아 있다.
매 순간마다 마주하는 이야기는 향기에 대한 기반을 떠나서 그의 순간에 스친 짧은 시간들이 거대한 기록으로 남겨져 현재의 나에게 전해지고 있다. 나에게는 그저 찰나의 기억에도 머무르지 않을 것들이 그에게는 이 모든 기록으로 남았다는 것에서 부러움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앞으로도 그의 이 기록들이 계속되길 바라보며 다른 책들로 이 즐거움을 이어나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