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 작가의 이름은 너무도 친숙하리만큼 들어왔지만 실제 그녀의 작품을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 하다. 그녀의 작품을 첫 번째 조우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해변빌라>를 통해 바라본 감상평을 짧게 끄적여 본다면
읽다 보면 무언가 뜬구름을 잡듯 확고한 그 무엇을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책을 넘기게 하는 마력이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A는 B다,
라는 확고한 명제는 아니지만은 에둘러 가는 그 길마저도 싱그럽게 만드는 그녀의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멍해지면서도 또 어느 순간
또렷하게 각인되기에 신비로움이 담겨 있는 듯 하다.
삶이란
부재의 사과를 깎는 일이다, 할 때의 그 사과이지. 삶이란
사과 껍질을 얇게, 끊어지지 않게 깎는 일이야. 그 사과는
페루에만 있는거야? 라고 물으면 당연하지, 라고
말했다. –본문
해삼을 찾으러 새벽부터 바다로 나가는 모습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 속에서 해삼에
대한 상념은 유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회귀되는데 과연 이러한 생각들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
한 명의 독자를 넘어 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상상력에 무한함에 다시금 외경심을 갖게 된다.
어찌되었건 다시 소설로 돌아와 아버지인줄 알았던 이는 그저 고모부일 뿐이고 작은
고모라고 생각했던 이가 실은 생모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녀는 담담하다. 자신의 생모에 대한 진실보다는
고모부가 자신의 생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았던 그녀는 고모부가 생을 마감한 순간보다 그가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에서 상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생부에 대해서 이린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않지만 유지는 계속해서 아버지를 찾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가 보여요?’라는 그녀의 질문 안에서
존재하지만 실제 세상에 섞이지 못한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문을 향한 물음을 내던지는 셈인데 그 순간 이사경 앞에서 나체의 모습으로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타인이, 그러니까 중년의 아버지와 같은 누군가가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이
아니서였을까. 물론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수도 없는 고민을 해보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해석한 바로는 그녀의 존재를 타인에게 확인 받고 싶은 마음에서 일으킨 충동적인 행도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 사건 이후로 그녀와 이사경의 존재는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게 되고 이사경의 어머니인 노부인을 마주하게 되는데 주말마다 노부인의 집을 방문해 피아노를 치며 유지는 그들과의 관계도 점점
쌓이게 된다. 손이린과 이사경 사이의 관계 정리를 위한 교가로 유지를 이용하고 있는 노부인이지만
유지는 그 시간 속에서 과연 이사경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만이 점점 커져갈 뿐이다.
갑작스레 떠나버린 이린과 남겨진 유지와 해변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계속
이어진다. 노부인의 죽음 이후에도 남겨진 사람들은 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연조는 이혼을 했고
어느 날 동네에 나타났던 연인은 세상을 등지고 카페의 주인인 편사장은 또 나름의 사랑을 그리고 있었으며 한때는 연인이었지만 이제 다른 이와
결혼한 오휘까지 다시 돌아오면서 모든 것을 머금어 조용하다 못해 고요할 것만 같은 이 마을은 나름대로의 생기를 가지고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한 후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쓰나미에 휩쓸려 사라진 모터바이크가 알래스카의 해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처럼 처음 시작한 지점에서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사랑이야. 어느 물리학자가
그랬지. 사랑의 법칙은 푸앵카레의 비가역적 에너지론에 지배를 받는 다고. 비가역적이라는 말은 살아의 끝은 생각지 않은 고으로 삶을 옮겨 놓을 수 있다는 의미야. –본문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해서 처음과 끝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경린 작가의 말마따나 그저 떠오르는 것들을 들려주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는 확고한 틀을 가지고서 들려주는
것들이 아니기에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라기 보다는 스타카토처럼 순간순간을 들려주고 있지만 그 순간들을 또 하나의 덩어리로 이어지게 된다.
해변에 써 놓은 글자처럼, 순간들의
이야기가 눈 앞에 펼쳐지기는 하나 파도 속에 다시금 사그라드는 현실처럼 유지를 비롯해 그들의 이야기는 살아있는 듯 하면서도 또 금새 고요히
자리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모든 것은 파도 속에 묻어져 버렸지만 그럼에도 답답하거나 풀리지 않은
궁금증에 원망이 들기 보단 오히려 이 문장 하나하나를 스쳐지나 갈 수 있었다는 것에 그저 즐거웠을 뿐이다.
아마 이것이 전경린 작가의 마력인 듯 하다.